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지은이는 ‘마크 레빈슨 Marc Levinson’으로 경제학자 겸 역사학자다.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에서 기고하는 전문 저널리스트로 뉴스위크 경제 전문 기자다.
세계화는 최근 개념이 아니다. 1929년 벨기에 교육자였던 ‘J.O.테크롤리‘가 어린이는 혼자만의 세계가 아닌 넓은 세계에 관심을 발전시키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 처음 썼다. 1989년 공산주의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를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다. 시장의 힘을 의심하던 국가들이 환영하면서 국제무역은 세계 경제보다 세 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2003년까지 500대 미국 기업 가운데 285개가 일상적 사무업무를 인도로 이전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 후보가 “급격한 세계화와 노동자의 권리 박탈”을 비난하고, 프랑스 정치인 ’마린 르펜‘은 “걷잡을 수 없는 세계화가 우리 문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비판했다.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기 시작하여 사업 활동 중단 및 자가격리 사태가 발생하고 세계의 상업 및 여행이 중단되어 세 번째 세계화는 국제적 관계로 전환되고 있었다.
세계화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거나 수량화하는 노력으로 많은 나무가 종이가 되어 사라졌다. 2세기에 걸쳐 발전한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세계화는 기술의 변화, 인구학적 압력, 경영자의 야망 그리고 정부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지난 200년에 걸쳐 스스로 변화시켜왔다. 세계화는 수억 명의 사람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과거에는 무관했을 기술 덕분에, 지구상에서 고립된 지역들도 일부는 세계 경제와 연결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공호흡기를 급히 찾았다. 인공호흡기를 만들려면, 12개 국가에서 생산되는 부품이 필요했기 때문에 느렸지만, 세계 시장의 도움을 받아 밸브와 튜브, 모터 부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세계화는 우연한 축복이 아니었다. 가난했던 국가들,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산업화는 북미와 일본 및 유럽 전역에 걸쳐 잔인했던 탈산업화와 연결되어 있다. 임금에 의존하는 노동자는 먼 곳의 저임금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됐고, 대도시들이 성장의 과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작은 마을들은 위축됐다. 기업은 언제라고 해외로 이전할 가능성이 커져 정부는 기업의 세금을 낮추기 위한 경쟁이 일어났지만,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이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및 사회프로그램에 투자할 세수는 고갈됐다. 컨테이너 상자로 운반은 과거의 세계화였다. 경제 발전의 다음 단계로 세계 경제를 더욱 결속시키는 것은 아이디어와 서비스의 흐림이다.
디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은 설비투자를 미루고 소비자는 지출을 중단한다. 경제침체는 그 자체로 국제무역을 감소시켰다. 미국은 1930년대 이미 세계 최대의 무역국이었으며, 세계 무역의 약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1년 이후 은행 위기가 확산하자, 통화와 금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금본위제는 무너졌고 환율은 폭락했다. 국제 경제 관계의 해체가 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게 되면서 외국 투자는 사라졌으며 국경을 넘는 대출 역시 중단됐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150만 명의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군하면서 전 세계를 황폐화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1944년 7월 2차대전이 6년째로 접어들 때, 44국의 경제 전문가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환율과 금의 연동이 대공황을 악화시켰고, 이로써 대량 실업과 사회적 불안에 직면했던 정부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할 수 없었던 점을 모두가 분명하게 인식했다. 미국은 중앙은행 보유, 금을 온스당 35불에 바꿔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거래할 수 없는 제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돈‘이었다. 따라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금융의 세계화는 허용될 수 없었다.
긴 역사에서 1956년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 있다. 공산품의 무역이 처음으로 원자재의 무역 규모를 초과했고, 화물운송 방식이 컨테이너로 운송을 시작한 것이다. 대양의 항해는 범선이 증기선으로 바뀌었고 선체는 강철로 바뀌었다. 원자재를 그대로 수출하는 일은 간단했다. 밀이나 철광석을 화물창에 실었고, 원유나 휘발유는 펌프를 이용하여 실었는데 모두 노동력이 필요치 않아 적재 시간이 짧았다. 그러나 개별 상품을 적재하는 데는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향해가 끝나고 하역에도 번거로웠다. 미국의 공산품이 유럽의 고객에 전달되는 데, 3달이 걸렸다. 운송비용은 상품가의 10~20%였고 도난과 손실도 높았다. 여기에 나온 ’아이디어‘가 ’컨테이너‘ 운반이다.
컨테이너는 길이가 10피트, 20피트, 30피트, 40피트로 결정되어 1961년 11국 대표단이 뉴욕에서 논의를 시작해 크기, 내부 구조, 도어 배치 등의 논쟁을 하여 1965년에 합의에 도달했다. 베트남 전쟁은 ’복합운송‘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전에는, 베트남에 들어온 화물은 사이공 부두에 쌓이지만, 전선의 군대는 기본 장비도 부족했다. 베트남의 물류의 혼란은 워싱턴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컨테이너 운송은 세계화를 세계적인 현상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다. 컨테이너는 일본이 수출 초강대국이 되게 했고, 일본 공산품이 유럽과 아시아에 침투하면서 일본의 해외 투자가 뒤따랐다. 10년 전보다 일본은 미국에 투자를 10배로 늘렸다. 일본 기업은 이제 불규칙한 운송 경로로 인한 고립 상황을, 겪지 않게 되자 대만과 한국의 공장에서, 다른 개발도상국에 판매하기 위한 저렴한 라디오 및 알람 시계를 일본 부품을 사용하여 조립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기업은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에 있는 공장에서 미국산 부품으로 조립하여 모듈화한 ’서브어셈블리‘를 만들어 미국의 공장에 돌려보냈다, 이는 새로운 급진적 세계화를 가져왔다.
“1970년대는 국제화가 실로 은행 업무를 장악한 지 10년”이었다. 은행가들은 위험의 새로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행가들은 돈을 빌려 쓴 사업가를 평가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환율의 위험은 잘 몰랐다. 달러 예금을 사용하여 ’리라‘나 ’엔‘화 대출금을 조달했는데. 환율이 약화할 때 예금자에 돈을 상환치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금자의 예금을 상환할 수 있도록 은행이 어느 정도 주주 자금, 즉 자본금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국제적 합의는 없었다. 자본이 부족한 은행은 자본이 충분한 은행과 경쟁하기 위해 더 공격적으로 대출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은행들은 경기침체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한 국가의 문제가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부유한 국가 정부들은 저개발 국가들이 해외채권자에 상환하는 데 필요한 금액을 축적하려면 긴축 정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건강, 교육, 주택에 대한 요구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대규모 외채를 부담하던 국가들 가운데 한국만이 유일하게 부채상환에 필요한 달러를 축적할 수 있게 수출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다른 나라들은 부채상환에 발목이 잡혀 경쟁력이 있는 교육받은 노동자를 키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시아 개발도상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적자는 1980년 40억 달러에서 1986년 300억 달러로 증가했다. 미국의 의류업체와 신발공장, 제철소 수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부채위기가 터지기 4년 동안 1,900만 명에 이르던 미국 제조업 고용자 수는 다시는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은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비즈니스 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은 20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규제 완화 옹호론자는 정부 규제는 보장된 이익을 선호하도록 하며, 혁신을 방해하고 대중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을 촉진한 때도, 규제 완화는 소비자 보호와 노동조합을 약화했으며 많은 노동자를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도록 했다. 금융 부분에서 잘못된 규제 완화는 한국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많은 국가에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 되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3.07.16.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마크 레빈슨 지음
최준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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