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기원과 역사(2) - "개신교의 신성 불가침 영역"
3. 오염된 물줄기의 도래
그리스 연설이 어떻게 기독교 교회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을까? 3세기를 전후해서 상호 간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시들어지게 되자 공백이 생겨났다. 이 때 즈음 예언의 부담과 자발적 확신에 의해 말씀을 전했던 순회 사역자들이 교회 역사의 장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 사람들의 공백을 메우려고 성직자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열린 모임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교회 모임은 더욱 더 의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 모임'이 '예배 의식'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계급적 구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종교 전문가"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지체의 기능을 발휘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진화된 교회 구조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의 은사들을 사용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4세기에 와서 교회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많은 이교 연설가와 철학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이교 철학사상들이 부지 중에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초창기에 교회의 신학자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쓴 문서 일부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돈을 받고 연설을 하는 훈련된 전문 연설가의 개념이 기독교 주류 속으로 직수입되었다. '유급 전문 교사'의 개념이 유대교에서 유래하지 않았고 그리스에서 왔음을 주지하라.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 직업을 따로 갖고 있던 것이 유대교 랍비들의 관습이었다.
이 이야기의 종국은 이런 전직 이교 연설가들(지금은 기독교인이 된)이 그드르이 그리스와 로마 연설 기술을 기독교 목적에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무용 의자에 앉아서, "소피스트가 신성에 가까운 호머의 원문에 주석을 달듯이, 성서의 신성한 본문을 해석했다." 만일 당신이 3세기 때의 이교 설교와 교부들의 설교를 비교한다면, 그 구조와 어법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 안에 새로운 스타일의 메시지 전달 수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 품위 있는 수사법, 세련된 문법, 화려한 웅변, 그리고 일방적인 스타일. 그것은 설교자의 연설기술을 과시하도록 설계된 스타일이었다. 즉, 그리스와 로마식 수사법이었다. 그리고 오직 수사학에 훈련된 사람들만 청중 앞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선포는 원래 쌍방통행의 대화였다 ... 그러나 서방 세계 연설의 대가들이 기독교 메시지를 손에 넣게 되자 그들은 그것을 아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설이 대화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연설가의 위대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건을 대체해버렸다. 그리고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는 시들해져서 일방적인 설교로 탈바꿈해버렸다.
한마디로, 그리스와 로마식 설교가 예언적 선포, 열린 나눔, 그리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교훈을 대체하게 되었다. 설교는 교회 성직자들, 특히 감독들에게만 주어진 엘리트의 특권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말하는 법을 배우려면 수사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런 교육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찍이 3세기경,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설교를 그리스 연설가들이 그들의 연설에 붙였던 것과 같은 이름인 하멀리스(설교)로 불렀다. 오늘날에는 설교하는 것을 배우려고 '설교학'이라는 과목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서 수사학 법칙이 적용된 일종의 과학'이라고 여겨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설교나 설교학 어느 것이든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이교도들에게서 훔쳐 온 것들이다. 오염된 물줄기가 기독교 신앙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그 물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 물줄기는 4세기 때 못지 않게 오늘도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
4.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존 크리소스톰은 당대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설교자 중의 하나였다. (크리소스톰은 '금으로 된 입'이라는 뜻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리소스톰의 설교보다 '더 능력 있고, 재치가 번뜩이고, 솔직한' 설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매우 흡인력이 있어서 때때로 사람들은 더 잘 들으려고 강단을 향해 청중 사이로 밀치고 나가기도 했다.
천부적인 연설가의 재주를 가졌던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탁월한 소피스트였던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연설하는 법을 사사했다. 크리소스톰의 유창한 강단설교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재주가 얼마나 탁월했던지, 그의 설교는 종종 회중의 박수갈채에 의해 중단되기도 했다. 크리소스톰이 어느 날 하나님의 집에서는 박수소리가 적합하지 않다고 그것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는데, 이에 아랑곳없이 설교가 끝나자 그의 설교에 매료된 회중에게서 또다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얘기는 그리스 수사학의 못 말리는 위력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크리소스톰과 전직 수사학 교수였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을 강단설교를 기독교 신앙의 주요 부분으로 유입시킨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스식 설교는 크리소스톰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식 설교 스타일은 수사학적인 재능과 시구의 인용이 두드러졌고, 청중을 감명시키는 데 그 초점을 맞추었다. 크리소스톰은 "설교자가 유창한 웅변능력을 얻으려면 자신의 설교를 놓고 장시간 씨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거스틴에게는 라틴 설교의 극치를 엿볼 수 있다. 라틴 설교 스타일은 그리스 스타일보다 더 실제적이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더 단순하고 도덕적인 면을 다루었다. 츠빙글리는 존 크리소스톰을 그의 설교 모델로 삼았고, 루터는 어거스틴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라틴과 그리스 스타일 둘 다 알기 쉽게 해설하는 형식과 구절을 한 절씩 해석하는 주석 형식을 포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은 그리스 소피스트의 계보에 속했다. 그들은 세련된 기독교 수사법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독교'설교, 즉 내용은 성서적이지만 스타일은 그리스적인 그런 설교를 물려주었다는 말이다.
5. 개혁자, 청교도, 그리고 대각성 운동
중세 때는 성찬이 로마 카톨릭 미사를 지배했고 설교는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등장과 함께 설교가 다시 예배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루터는 교회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라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 때 교회 건물을 '입 또는 연설의 집'이라고 불렀다.
루터를 신호탄으로, 장 칼뱅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입'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둘 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개념을 신랄하게 비난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개혁자가 수사학을 공부했고, 어거스틴이나 크리소스톰이나 오리겐이나 그레고리 같은 사람들의 그리스와 로마식 설교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교부들의 오류는 개혁자들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신교의 소문화 집단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이것은 특히 청교도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사실 현대 복음주의 설교의 전통은 최근의 뿌리를 17세기 청교도 운동과 18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찾는다.
청교도들은 칼뱅에게서 설교방법을 빌려왔다. 그 방법은 어떤 식이었을까? 그것은 매주 성서를 조직적으로 강해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교부들에게서 물려받은 방법으로써 르네상스 때 유행했던 것이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고전문학 작품들의 문장마다 주석을 달았었는데, 칼뱅이 이런 방식의 대가였다. 그는 회심하기 전에 이교 학자인 세네카의 주석에 이 스타일을 적용시켰다. 회심하고 설교에 눈을 돌렸을 때는 똑같은 분석방식을 성서에 적용시켰다.
청교도들은 장 칼뱅의 발자취를 따라서 교회의 모든 예배를 성서의 조직적인 교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그들은 영국을 개신교화시키면서(영국 국교회의 오류들을 정화하면서) 그들의 모든 모임을 매우 구조적이고 방법론적이고 논리적인 성서구절 강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개신교를 '성서'의 종교라고 강조했다.(아이러니한 것은 '성서'에 이런 식의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또한 '평범한 스타일'이라는 설교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스타일은 설교원고를 암송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었다. 그들은 성서 본문을 나누고 더 세분해서 나누고 분석함으로써 설교를 우수한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방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수많은 목사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부연하자면, 청교도들은 한 시긴짜리 설교(어떤 청교도 설교는 90분 동안 계속되었음), 회중이 설교를 듣고 기록하는 관습, 네 개의 부분으로 작게 나뉜 설교 개요, 그리고 목사의 설교원고 노트의 사용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현대 설교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인 대각성 운동은, 초기 감리교회들에서 유행했었고 지금도 현대 오순절 교회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류의 설교에 책임이 있다.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강단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 등을 포함한 강한 감정의 표출은 모두 이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들이다.
현대 설교의 기원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기독교는 그리스와 로마식 수사학을 택해서 그 목적을 위해 도입한 다음 침례(세례)를 베풀고, 강보로 쌌다. 그리스식 설교는 2세기 경에 기독교 교회에 침투했고, 4세기 때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같은 강단 설교자들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기독교 설교는 5세기부터 설교가 개신교 예배 의식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종교개혁 때까지 우위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지난 5세기 동안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그것의 기원이나 효력에 관해 전혀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 조지 바나 지음. 이남하 옮김. 대장간.
147쪽 ~ 152쪽 전문('설교 - 개신교의 신성 불가침 영역' 중에서)
- 다음에 마지막 편이 계속됩니다 -
첫댓글 참고가 되는 좋은 글 같습니다..
그런데 (1)은 어디 있나요? 3장부터 시작하는 (2)편인데 (1)부터 읽고 싶습니다
좋으신 말씀 잘보고 감니다.
루터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을 설명하면서 일요일을 노동자들이 쉬며 설교를 듣는 안식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무지한 평신도들이 설교를 듣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은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설교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범하는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며 악한 재해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루터는 일요일을 설교 듣기 위해 쉬는 날이라고 정의하고선 이를 엉뚱하게도 구약의 안식일 규례와 연관시켰던 것이죠. 오늘날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가 꽤 있죠.
앞의 짧은 문단 딱 두 개 읽었는데..
와우...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이미 가르쳐 주시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글로 그리고 사료를 들어 기술한 책이 있었네요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수사학과 철학의 방법론이 유입됬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사실상 그리스 철학이 유입된 것이 아니라 헬라 철학 시스템에 기독 색만 칠한 것) 이 책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얘기를 하네요.
교회사 책을 볼 때.. 여러 엉터리 대마왕들이 많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거스틴 포함) 토마스 아퀴나스도 대표적인 엉터리 같았는데 그 분에 대해서도 어디 다룬 부분이 있으면 보고 싶네요
헉 9월 1편이 있었세요. 댓글까지 달았놓고는 기억도 못했네요 ㅋ 어째든 예배에서 설교는 빠지거나 다른 형식으로 간략화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바도, 성령 안에서 알게되는 바도 그렇다고 봅니다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 현실과 주장에 의문을 가졌었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저도 귀납법적 말씀 나눔을 선호합니다만. 교인 수가 최소 수 십명 이상인 대부분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지 또한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