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퇴역 미공군 대령들 중에서 "게일 할보슨" 공군 대령, 그에게 대중적 인지도를 선사한 역사적 에피소드일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그의 인생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런 그가 현재 100세로 생존 중인 가운데 그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여하라는 백악관 청원운동이 시작됐다.
대통령 자유메달은 미국의 안보나 국가적 이익, 세계 평화 등등에 기여한 인물에게 대통령 이름으로 내리는 훈장이다.
흔히 1948~49년 사이 "사탕폭탄"을 베를린에 투하한 미공군 조종사 정도로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인생경력에 큰 전환점이 됐다.
사실,
"게일 할보슨" 중위에게 있어 2차대전은 절망적이었다.
유타주 출신의 "촌닭" 이었던 그는 미국 비행학교 졸업증이 있었고 영국공군의 전투기 파일럿 교육과정을 이수했지만 결국 그는 미육군항공대의 수송기 파일럿이 됐다.
2차대전 내내 그가 한 일은 남아메리카의 미군 기지들을 순회하며 화물과 비행기를 운반했고 때론 영국령 아센션 섬이나 영국 본토까지 날아가보기도 했지만, 그가 한 일은 후방의 수송기 조종사에 불과했다.
수많은 파일럿 동료들이 최일선에서 적과 싸우며 경력과 계급을 높여가는 상황에서 할보슨 중위에게 2차대전은 사실상 파일럿 커리어의 종착점이나 다름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모를리 없었기에 2차대전이 종료된 후, 그는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Western Auto company라는 회사에 들어갈 기회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때 그의 운명이 바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소련이 서베를린으로 가는 육로를 막아버린, "베를린 봉쇄" 였다.
이때 미공군은 전세계 각지의 수송기 파일럿들을 불러 모았고 미혼의 젊은 파일럿이었던 할보슨은 자원했다.
갑자기 모인 수송기 파일럿들은 빡빡한 비행일정과 준비가 덜된 현지 상황 때문에 고생을 했다.
수차례 베를린까지 비행하던 할보슨은 어느날 그 비행과정을 필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빡빡한 스케쥴 상 이런 일이 쉽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동료 파일럿 중 한명이 그가 탑승객 자격으로 수송기에 탑승하는 것을 허가했고 그는 비행과정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다음 비행 스케쥴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자 그는 비행장 인근의 아파트 위에서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는 수송기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인근 아파트 옥상에서 카메라를 돌려 동료들이 수송기를 몰고 활주로로 내려가는 장면을 담는데 성공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주위에 30여명의 독일 어린이들이 몰려와 미국인 파일럿이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략 8~14세 쯤 되어 보였다. 아이들은 그에게 비행기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흥미로워했다.
이윽고 복귀해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봐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할보슨 중위는 그에게 흥미를 가지고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본 꼬마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들은 중위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봉쇄로 인해 서베를린은 물자가 부족했고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은 더 부족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그가 가진 것은 없었고, 주머니 속에 있던 건 검 2개 뿐이었다. 그는 이 2개의 검을 줬을 때 아이들 사이에 소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일단 그 검을 작게 쪼개서 기지 외곽 펜스 사이로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조심스레 받아들었고 다시 더 작게 쪼개서 모두가 나눠가졌다.
이 장면은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는 돌아가서 반드시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결심했다.
부대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방법을 연구했고 손수건으로 낙하산을 만들어 투하하기로 했다.
수송기가 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하강할 때 바로 그 아파트 위를 지나가게 되는데, 그때 항법사 "엘킨스"가 기체 왼쪽 주익 앞부분의 비상 조명낙하산 투하구를 통해 사탕 등을 묶은 낙하산을 투하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들은 착륙해 기체를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후 몇주간에 걸쳐서 사탕을 있는대로 모아서 투하작전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는 규정 위반의 소지가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후 어느날 기상체크를 위해 템펠호프 공항의 미군 사무실에 들렀던 할보슨 중위는 자신에게 보내는 아이들의 편지 꾸러미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와 동료들이 사탕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한 이후로 활주로 끝에 몰려드는 독일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었다. 할보슨과 동료들은 또 한번의 사탕폭탄 투하를 하기로 했다.
이번까지만 하자!
들통나서 일이 커지기 전에 딱 한번만 더하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다음날,
그는 상관의 호출을 받았다.
그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대령"은 "프랑크푸르트 차이퉁" 지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 할보슨, 자네 어제 베를린 상공에서 사탕을 투하해서 일면 톱 기사로 실렸고 전유럽에 소문이 퍼졌다. 장군님이 호출해서 가봤더니 축하해주시더군, 난 뭔 일인지 영문도 몰랐는데... 왜 니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을 벌인거냐?"
할보슨과 동료들의 해프닝성 선의의 행동은 이제 전유럽의 유명세를 탔다.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의 정치적 대중적 가치를 꿰뚫어 보고 "Little Vittle" 이란 작전명을 부여하고 공식화했다.
이제 할보슨과 동료들은 상관의 지시로 보다 대담하게 대량의 사탕을 투하할 수 있게됐다.
이 작전에는 수십명의 동료 파일럿들이 동참했고 "할보슨"은 홍보대사로 인터뷰 등 언론매체에 나서게 됐다. 유명 사탕제조회사들은 자사의 제품을 대량으로 기부했다.
이렇게 할보슨은 영웅이 됐다.
전역을 고민하던 초짜 파일럿에서 단숨에 아이들의 영웅이자 미국과 유럽을 잇는 친선대사가 된 것..
베를린 수송작전은 그의 인생을 확실히 바꿔 놨다.
그가 베를린 수송작전의 비행과정을 찍은 필름도 유명해졌고 그로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공군을 대표해서 참석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는 그에게 새로 16mm 카메라를 선물했다.
1949년 5월 12일 미국의 막강한 항공수송력에 스탈린이 백기를 들면서 봉쇄는 끝났다.
49년 1월 중순에 베를린 수송임무에서 본국 귀환을 명령받은 게일 할보슨은 이후 공군에게서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장기복무와 그에 따른 연봉지급 그리고 대학진학기회를 제시한 것이다.
할보슨은 기회를 잡았다.
한때 유타주에서 농부로 지냈던 촌닭 게일 할보슨은 플로리다 대학에서 우주항공엔지니어링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오하이오 "데이튼" "라이트-항공개발센터"에서 근무하게 된다. 우주항공프로그램에도 동참한 그는 "타이탄 3"로켓의 개발에도 참가하고 재사용 가능한 유인우주왕복선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1969년, 이제 공군 대령이 된 "게일 할보슨"은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의 위성추적설비 책임자로 근무하게 된다.
한창 공군의 우주사업으로 바쁘던 69년 7월 어느날 그는 국방성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당신이 비행사 아저씨 맞나요?"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그가 사탕 폭탄을 배달했던 독일의 아이들이 당시엔 그때 그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되어 있었고 그중 몇몇이 베를린 수송작전이 수행된 "템펠호프" 공항 기지사령관 "클라크 테이트" 대령과 접촉해 공항 기지 공개행사때 사탕폭탄 작전을 재현해줄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할보슨은 기꺼이 응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기지 공개행사 당시 비행장 상공을 선회하며 캔디 폭탄 투하를 재현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주최한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이것을 일회성 이벤트로 생각했지만, 상관인 공군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다.
세월이 지났지만 사탕폭탄이 가지는 위력은 여전했다. 사탕 폭탄은 유럽에 있어 미국의 기여를 확실히 인식시켜주는 상징물이었다.
마침, 기지 사령관 테이트 대령이 병중이어서 기지 사령관 자리가 비어 있었고 공군은 그에게 베를린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이미 비행일선에서 물러나 우주항공분야에 몸담고 있던 할보슨 대령은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우주항공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술을 마시지 않는 몰몬교도인 그에게 알콜이 빠지지 않는 유럽의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군인 외교관에 가까운 보직이었다.
내켜하지 않던 그는 결국 템펠호프 공항기지 사령관 직을 맡았고 오히려 예상보다 더 오랜 기간인 4년 동안 머물렀다. 이는 전후 어떤 미군 기지 사령관 보다 오래 근무한 사례였다.
그가 그렇게 오래 머무르게 된데는 "캔디 폭탄"이 한몫했다.
템펠호프 근무 기간 중에 그는 자신에게 편지를 썼던 여자 아이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영문을 모르고 초대받았던 할보슨 대령은 이제 아이의 부모가 된 그녀의 집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 답장을 다시 보는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우주항공분야 테크노크라트로 활약하던 할보슨 대령이 그의 커리어에서 한직인 베를린 템펠호프 기지 사령관을 4년이나 맡게된 데는 이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74년 베를린을 떠나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그 뒤에도 그때 캔디폭탄으로 인연을 맺은 독일인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캔디폭탄 이벤트의 인연은 그뒤에도 계속되었다.
1989년에도 200명의 수송작전 참가자들이 베를린 템펠호프 이벤트에 모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몇 주 전의 일이었다.
그후 10년 뒤 베를린 수송작전 50주년(99년)에도 그는 복원된 c-54 수송기의 기념 비행 이벤트에 참가했다. 그의 선행이 낳은 이벤트는 이제 하나의 축제처럼 자리잡았고 역사로 기록되게 됐다.
2001년,
미공군은 수송사령부에서 널리 활용하는 2만 5천파운드 짜리 운반로더에 "할보슨 로더" 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명명했다.
< 미공군이 사용하는 화물수송 로더, 할보슨 로더 >
[출처] Candy Bomber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 게일 할보슨 대령 스토리 ]|작성자 sundin13
첫댓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군요~
한 개인이 .... 어이없이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보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