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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배우자, 컴퓨터를 원문보기 글쓴이: 최한용
[許文道氏의 글]
▒『亡國의 敎訓』▒
【編輯者註: 이 글은, 知日派인 前統一院長官, 許文道氏가 2005년 「月刊朝鮮6월호」에 기고한 것을, 編輯者의 要請으로 2006년5월9일 오후에 許文道氏가 보내 온 것을 받아서, 편집자가 漢字로의 一部變換을 加味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許文道씨의 사전양해를 얻지 못했으나 이 자리를 빌어 諒解를 구한다. 그리고 지난 달, 독도문제로 日本과의 韓國간 논쟁이 일어났을 때, 盧武鉉이가 일부 인용발언한 것도 포함되어 있어 귀중한 글이다. 즉,『동봉하는 글은 2005년 6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글인데 이번에 盧大統領이 獨島問題特別談話에서 參考한 것 같아 參考用으로 元來의 原文을 보내드립니다.이 原文을 月刊朝鮮側은 편집하면서 大幅削除하여 저는 심히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라고 許文道씨는 述懷하고 있다.】
日本에 國權을 빼앗긴 乙巳保護條約 100주년, 日本의 植民침탈에서 解放된 지 60주년, 韓日國交正常化 40주년 되는 해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해를 맞이하여 있다.
제정신을 갖고, 최소한도의 歷史意識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오늘에 꼬리를 뻗치고 있는 이들 거창한 歷史事案을 되씹어 보고, 오늘을 살아낼 의미를 찾고, 敎訓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보다 더한 기념은 있을 수 없다.
意味와 敎訓의 주제는 망국(亡國)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망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올해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百年前의 乙巳條約으로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었다. 왜 망했는가? 乙巳條約에 끌려 들어간 각료 다섯 사람 즉 乙巳五賊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인가? 지금 直視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韓半島 침탈을 놓고 日本과 러시아가 다툰 日路戰爭(1904-1905)에서 日本이 이겨 韓國에 亡國의 운명을 덮씌운 것이다. 乙巳五賊 이전에, 日本의 侵略意志에 맞서 나라를 지켜낼 戰爭조차 해 볼 엄두도 못내는 나라라서 나라가 망했다는 것, 올해는 한번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解放이 되고서 60周年이 되었으되, 南北分斷으로 日帝의 침탈이 끼친 해독에서 나라는 절반 밖에 벗어나 있지 못하다. 分斷이 계속되는 한, 日帝로부터 解放은 未完成이라는 것, 올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새기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韓半島侵略戰爭(더 자세하게는 半島에 대한 日露의 경합적 침략전쟁) 속에서 日本이 삼켰던 獨島를 오늘도 日本이 저들 것이라 하는 현상속에 「未完」의 解放이란 實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이 未完의 解放을 完成해야 할 歷史的 責務 속에 있다는 것, 올해는 한 번 더 내 깊은 혼에 다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國交正常化 40周年, 더불어 친구로 지내야 하는 交流와 經濟의 現實이 있다. 日本하고 장사를 해야 먹고사는 현실이 있다. 正常化 40周年의 현실이 도달한 실질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는가?! 지난해의 對日貿易赤字는 244億달러이었다. 1990年부터 2005年까지 15年間의 累積赤字는 1,798億달러였다. 80年代末까지의 累積赤字는 8,9白億달러 가까이였으니까 日本과의 國交正常化 이래 점점 커지면서 쌓이고만 있는 貿易赤字의 累計는 3,000億달러 가까이에 달하고 있다. 이것이 對日修交再開 40年의 成績表다. 우리가 흘리는 땀의 엣센스가 日本으로 더 많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이 技術從屬의 習慣化된 現實을 우리는 直視하고 있는 것일까. 한 마리 새가 되어 높이 날아올라 그 눈으로 歷史를 스켓치한다면, 韓國은 日本에 대해 植民從屬歷史에서 技術從屬의 現實로 이어져 있다. 우리 民族은 참으로 歷史의 平衡運動을 모르는 民族일까.
당한 자의 歷史를 갖는 우리는 올해, 亡國과 解放과 修交再開를 함께 기념하면서, 日本에게 되갚아야 할 歷史의 빚이 있다는 所望을 가슴에 어찌 묻어 두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技術從屬에 無感覺하고서는, 技術從屬을 아파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는 얘기다. 이 땅의 少年이여! 나라를 안아보지 않을 것인가. 지금부터 百年前 우리를 망하게 한 日露戰爭에서 불타오른 그들 내셔날리즘의 熱情 같은 것을 오늘은 우리 것으로 할 歷史的 權利가 우리 모두에게 있고, 더욱 少年들에게 있다. 골목대장 시절의 낡은 鄕愁에 빠져든다고, 世界史에서 倫理的 立脚点을 찾지 못하고 있는 日本에 할 일이 남았을 것 같지는 않다. 월드컵 勝利의 우리 共同體가 자아올린 내셔날리즘은, 日本大使館앞의 단지(斷指) 내셔날리즘으로도 폭발하지만, 잠 안자고 불 밝히는 少年들의 철야 내셔날리즘으로도 터져 오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자들의 遺産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少年이여! 젊은 나라를 안고 비상(飛翔)하라.
顔面 바꾼 日本 日帝가 獨島를 日本에 귀속시킨 100주년을 맞아, 韓國에 와있는 日本大使가 獨島를 日本땅이라 公言하고, 日本 안에서는 "竹島의 날" 조례를 만들어 與論의 불쏘시개에 불을 지피는 상황을 맞아, 現政府는 전례없이 강경한 正面對應을 했다. 그것은 政府의 新韓日독트린 발표와 盧武鉉大統領의 인터넷을 통한 日本問題 所信表明으로 드러났다. 그 主旨는 日本이 '侵略의 過去를 正當化하려' 든다는 것이다. 日本이 유엔의 安保理常任理事國이 되어 世界平和의 指導國이 되어 보겠다는 마당에, 우리정부가 행한 이웃에 대한 指摘은 그동안의 韓日關係로 봐서 異例的이고 심각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日本側의 반응은 韓國政府의 대응과 韓國側 與論의 격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新韓日독트린에는 4月初에 드러난 日本敎科書檢定의 결과가 侵略의 過去史를 긍정하고 正當化하는 것을 저지해 보겠다는 기도가 들어 있었다. 결과는 日本側의 完全無視였다. '獨島는 日本땅'이라는 敎科書가 逆으로 늘어나는 결과로 나타났다. 80年代의 敎科書檢定波動에서 日本政府가 보인 태도와는 너무도 判異하다. 그때는 나름대로의 改善試圖가 있었고, 그들의 右翼與論과의 사이에 끼어, 日本政府는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
日本은 결국 過去史문제와 관련하여 韓國政府와 韓國與論을 향해 顔面을 바꾸고 말았다. 큰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당신들 마음대로 해 보라.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간다'는 태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外交戰爭'의 카드와 스케쥴을 어찌 잡느냐가 아니라, 日本政府가 顔面을 바꿨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國運이 기울어 가던 한말(韓末)이래, 우리가 힘 관계에 대한 감은 아무것도 없이, 日本한테 앙탈만하고 사정한다고 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日本政府의 顔面沒收를 가져온 조건적 상황변화에 어떤 일이 있었나.
첫째로 美日同盟의 强化다. 冷戰終熄이후 日本은 오히려 美日同盟强化의 노선을 택했고, 北核상황하에서 더더욱 軍事的으로 세계국가라 해야 할 美國과의 同盟關係를, 有事立法.憲法의 확대해석.自衛隊의 해외파병등을 통해 압도적으로 강화해 놓았다.
日本은 지금 百年前, 日露戰爭을 벌이기 직전 당시 世界 最强의 英國과 英日同盟(1902)을 맺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있을 것이다. 北核상황하에서 韓美同盟에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韓國을 日本은 제버릇 개 못 준다고 생각하며 흘겨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일어나고 있는 中國일지라도 軍事的으로 삼류를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 計算에 넣어야 할 것이다. 힘 관계에 둔감하여 나라가 망한 한말(韓末)의 역사체험에서 지금 우리가 敎訓을 얻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둘째로 韓國의 日本에 대한 技術從屬의 恒久化다. 昨年의 對日赤字는 244억 달러였는데, 이는 해가 갈수록 불어난 숫자이다. 赤字가 對日技術依存으로 일어난 현상임을 모르는 企業人은 없을 것이다. 韓國의 技術從屬의 恒久化를 확인하는 日本이 兩國 내셔날리즘의 충돌 앞에서, 讓步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같은 東亞圈이라도 日本은 東洋의 보편개념인 덕(德)이나 인(仁)을 체득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이다. 日本이 顔面을 바꾸는 유혹에 빠지게 한 것은 우리라는 것 알아야 한다. 셋째로 日本經濟의 상대적 장기불황이다. 日本은 경제가 불황일 때 내셔날리즘이 고양되는 역사행태를 보였다. 1920年代末, 世界恐慌에 연동한 日本의 경제공황에 대한 역사적 응전(應戰)이 日本 내셔날리즘의 폭발과 15년 전쟁으로 이어진 滿洲侵略이었다고 사가(史家)들은 일치해서 진단하고 있다. 대미(對美)동맹의 强化와 韓國의 技術從屬의 확인이 日本으로 하여금, 장기불황중에 고개 쳐든 내셔날리즘의 열기를 타고, 그들 내셔날리즘에 찬물을 끼얹는 한국정부와는 안면을 바꾸게 한 것이다.
헤어지기 어려운 친구가 되어버린 자의 비위(非違)를 어찌 할 것인가. 고통이 따른다고 피하지 말고, 그 비위를 지적하여 바로잡게 함으로서 장차의 우정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다.
日露戰爭은 韓國侵奪戰爭 日露戰爭의 기본성격이 韓國에 대한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 日露戰爭이 帝國主義侵略戰爭이었지만, 그것은 日本이 러시아를 침략하는 전쟁도 아니었고, 러시아가 日本을 침략하는 전쟁도 아니었다. 戰爭은 仁川 앞바다에 있는 러시아 군함을 日本함대가 격침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하루전에 日本은 仁川에 육군 4개 대대를 상륙시키고, 그중 2개 대대로서 서울을 제압하고 王宮을 점령하여, 高宗皇帝의 의지를 박탈할 태세부터 갖췄다. 韓國政府가 國際法에 있는 「中立」이란 용어를 알았던지, 그 한 달 전에 중립을 선언했었지만, 日本의 武力은 여지없이 이를 짓밟았고, 그 中立을 지켜줄 힘이나 友邦이 韓國에는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宣戰布告는 2월10일에 있었고, 仁川에 韓國作戰을 위해 日本군 1개 사단 1만4천인이 상륙한 것은 2월 16일에서 27일 사이다. 2월23일 日本側은 軍事的 위압하에 韓日議定書란 것을 맺어 韓國全土와 인민을 日本의 전쟁수행체제에 강제로 끌어넣고, 韓國皇帝의 의뢰로 日本이 한국을 위해 러시아와 싸우는 모양을 국제적인 눈앞에 갖추려 들었다. 전쟁은 만주벌로 옮겨갔다. 이듬해인 1905년 3월경에 끝난 만주벌 전투에서 日本은 勝利의 외양은 갖추었으되, 戰力에 한계를 느꼈다. 5월의 東海海戰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한 日本은, 유리한 입장에서 美國을 내세워 對러시아講和협상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1905년 9월5일 조인된 포츠머스講和條約의 주안점은 日本의 韓國支配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이었다. 美國이 카츠라.태프트 협약으로 日本의 韓國에 대한 보호권 설정을 인정한 것은 이해의 7월 29일이었고, 英日同盟개정에서 英國이 日本의 한국지배를 승인한 것은 8월12일이었다. 韓國을 침탈키 위한 두 强盜의 싸움에서 日本이 이긴 것을 老大國 英國과 新興大國 美國은 일찌감치 인정해 준 것이다. 日本閣議가 韓國에 대한 보호권 확립의 실행을 결정한 것은 10월 27일이었고, 伊藤博文(Ito Hirobumi)이 총칼의 위협하에 保護條約의 조인같은 모양을 강행한 것은 11월 17일 자정을 넘어서였다. 强制調印같은 모양이 없었다 해도, 탐을 내는 또 하나의 강도를 꺼꾸러뜨리고 총칼로서 제압해 버린 日本이, 韓國의 主權을 강탈하려는 그 강도적 실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죽도(竹島)는 日本의 侵略戰爭의 産物 요즘 우리 신문이 소개하고 있는 日本의 獨島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日本정부는, 한 日本 어업가가 獨島에 독점적 어로권을 확보할 목적으로 제출한 신청을 받아들여, 1905년 1월 28일 內閣會議에서 獨島를 無主地로 전제, 日本領土에 편입한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日本정부의 無主地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영토편입이 무효라고 비판하는 신용하교수의 주장을 곁들여 놓았다.(조선일보.05.3.16 A4면) 大韓帝國이 1900년 10월 25일에 獨島가 영토임을 관보에 고시하였으므로 신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獨島는 日本이 한국에 대한 침략전쟁인 日露戰爭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强占한 섬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자 한다. 이 관점은 정부가 新韓日독트린에서 '日本政府는 過去 植民地侵奪과정에서 强制편입되었다가 解放으로 회복한 우리 영토에 대한 領有權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 것보다 구체성에서 더욱 진일보하여, 日本의 침략전쟁 행위에 직결되어, 침략전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찍이 朝鮮日報는 1978年 1月 7일자에서 위에서 든 日本어로업자의 수기를 원용하여, '日本이 獨島를 日露戰爭 수행의 전략적 필요로 强占했다.'고 특종으로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日本이 獨島를 필요로 한 당시의 전략상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지금 와서 보면 설득력이 높은 기사로는 보여 지지 않는다.
東海海戰과 獨島 먼저 日本政府의 閣議가 獨島 귀속을 결정했다는 1905년 1월28일 전후의 日露戰爭의 전략상황을 들여다본다. 日本軍 1만4천명, 러시아군 5천명 이상의 戰死가 있은 후 여순(旅順)항을 내려다보는 203高地가 日本軍 손에 최종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4년 12월 5일이었다. 이어서 日本軍은 203高地山頂에 탄착관측소를 설치하고서 高地에 틀어박힌 진지로부터 항구를 향해 공성포를 퍼붓기 시작했다. 목표는 旅順港內에 대피하고 있는 러시아의 제1태평양 함대인 旅順함대였다. 얼마 있다가 5월달에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東海에서 격파하여 日露戰을 승리로 끝낸 토오고(東鄕平八郞) 제독의 연합함대는 이때 旅順外港을 봉쇄하고 있었다. 203高地로부터의 육상포의 지원으로 여순함대를 격멸한 것은 12월 16일 이었다. 토오고 제독은, 10월 중순 발틱해를 떠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印度洋을 건너 日本을 향해 항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를 迎擊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東鄕제독은 함대를 정비하기 위해 九州 서쪽의 사세보(佐世保)기지에 끌어다 놓고, 전황보고를 명목으로 東京의 大本營에 나타난 것은 1904년 12월 30일 이었다. 이때에 日本人들이 史上에 類例없는 天才作戰參謀라고 오늘날도 칭송하는 아끼야마 사네유끼(秋山眞之) 중령도 물론 함께였다. 日露戰爭의 實話 에피소드를 만재하고 있는 日本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龍太郞)의 대하소설 「언덕위의 구름」은 東京에 온 아끼야마의 행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일년전에 결혼한 그에게는 아오야마(靑山)에 신부가 기다리는 새집이 있었다. 東京에 있는 동안 아끼야마는 海軍의 參謀部인 군령부(軍令部)에 매일같이 잠깐 얼굴을 내고는 이내 집에 와서는 군복을 입은 채 벌렁 드러누워, 늘상 볶은 콩을 씹으며 바둑판처럼 구획 지워진 판자천정을 끝없이 응시하며, 作戰構想에 골몰했다.
전사(戰史)는 전하고 있다. 日本의 連合艦隊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濟州道近海에서 시작하여 東海를 거쳐 우라지보스톡까지, 全 東海바다를 緯度, 經度 각10분씩 바둑판으로 細分한 지도책을 작성하고, 그 바둑칸 하나하나에 일련번호를 부쳤다. 敵艦隊를 발견했을 때 하나의 숫자를 대는 것만으로 위치전달이 足했다. (「日露戰爭全史」, 데니스 워너, 페기워너, 妹尾作太男.三谷庸雄역, 時事通信社)
이 아이디어는 日本閣議가 獨島귀속을 결정한 1905年의 1月 한 달을 東京 새집의 바둑판 천정을 바라보며 作戰構想에 빠져 들었던 아끼야마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東海바다를 細分하는 作戰地圖를 만드는 과정에서 日本海軍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獨島의 存在에 눈이 갔을 것이고, 國家의 興亡이 걸린 大海戰이 벌어질 戰場 한복판에 있는 암초인 獨島의 戰略價値에 괄목했을 것이다. 5월 東海海戰에 앞서 獨島에는 망루가 세워졌고, 無線電信基地를 두었다. 한 어업가의 어로작업을 위해 전쟁 한복판에 있는 나라가 이 짓을 했을 것인가. 日本閣議가 漁民의 漁撈를 위해 獨島領有를 결정했다는 1월 하순의 시점은, 육전(陸戰)에서는 滿洲요양(遼陽)의 北西인 흑구대(黑溝臺) 부근에서 러시아군 대병력과 日本軍수개사단이 충돌하여, 사흘 낮밤의 혹한의 풍설 속에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군의 反攻은 저지되었으나(1월27일), 日本軍 일개사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00여명의 사상자와 동상자가 발생했다. 通信施設이 완비되어 滿洲벌판의 戰況은 大本營이 있는 東京으로 즉각 즉각 전달되고 있었다. 冬服이 무진장 아쉬웠고, 火藥이 모자랐고, 전비(戰費)가 딸렸다. 온 정부가 전쟁 뒷바라지에 생그렇게 매달려 있던 것이, 漁撈로 인해 獨島歸屬을 閣議가 결정했다는 1905년 1월 29일 전후의 상황이다.
이 무렵의 日本 閣議가 어떻게 絶海의 孤島에 어로문제를 가지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侵略戰爭을 치르고 있던 정부의 國際眼目을 향한 기만장치를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갯꺼리라 해야 할 것이다.
토오고(東鄕) 제독이 아끼야마 등 막료를 거느리고 東京을 떠난 것은 2월 6일이다. 그는 1905년 문제의 1월 한 달을 꼬박 東京에 머물면서 極東으로 접근하고 있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영격하기 위해 中央에서 손 쓸 일을 챙기려 들었다. 야마모또 콘베이(山本倦岳衛) 해상(海相) 등 海軍수뇌부와 정부요로와 작전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세부준비 등을 모두 끝내려 했을 것이다. 이때 결정된 大作戰原則은 「함대의 전력을 조선해협에 두고 기(機)에 응해 행동할 것」이었다. 日本海軍은 발틱함대 와의 결전이 東海에서 있을 것으로 걸었던 것이다. 우라지보스톡에의 접근은 사하린과 北海道 사이의 소야(宗谷)해협, 北海道와 본주(本州) 사이의 쯔가루(律輕)해협 등 두개의 水路가 더 있었으나 군함 29척, 수송선 40척, 승원 1만 명의 대함대가 통과하기엔 이들 수로는 무리가 있다고 보았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긴 항해에 지친 함대가 지름길인 東海航路를 택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앞의 作戰指針 「함대의 전력을 조선 해협에 두고 .....」가 결정되었을 때 獨島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朝鮮海峽에서 대기하는 日本함대가 맞이하려는 해전은 東海海戰을 두고는 있을 수 없고, 東海海戰이라면 獨島보다 더 안성마춤의 망루와 무선기지로서의 전략지점은 없을 것 아닌가.
총명하고 기략이 풍부하여 뒷날 首相도 하게 되는 해상(海相) 야마모또 콘베이(山本)가 海軍수뇌부의 作戰意志에 맞춰 각의에서 獨島 귀속조치를 그 같은 모양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1월 한 달 東京에 머문 토오고는 東海라는 바둑판에 바둑돌을 두듯이 獨島 强占措置를 확인하고, 떠났을 것이다. 토오고는 수리를 끝낸 연합함대를 끌고, 洛東江河口와 巨濟 사이에 있는 섬인 가덕도(加德島)와 명지 사이의 가덕 수로를 지나 인접한 웅천 鎭海灣에 가서 엎드렸다. 連合艦隊는 5월말의 海戰때까지 석 달 내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함포사격 연습만 했다니까, 거제나 웅천이나 다대포의 우리 어민들은 생업을 닫고 밤낮없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에 떨었을 것이다. 日本 연합함대와 발틱함대가 조우한 곳은 부산과 日本 야마구치(山口)현의 서북 끝을 연결하여 중간지점쯤 된다. 구축함 등을 빼고 주 전력만 비교한다면 전함 숫자에서는 8:4로 발틱함대가 우세했고 순양함 급에서는 20척 대 9척으로 日本이 우세했다. 비슷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火力과 砲擊力에서 연합함대가 압도적이었다. 성능.기술을 계산하여 연합함대의 砲擊力이 17배였다는 분석도 있다(「日淸.日露戰爭」, 海野福壽, 集英社. 東京). 李舜臣艦隊와 日本水軍의 海戰에서 보듯이, 충분히 훈련하여 예기를 기뤄 대기하고 있었던 연합함대에 비해 7개월에 걸친 긴긴 항해에서 大洋의 荒波에 시달린 발틱함대의 수병들은 지쳐 있었다. 발틱함대는 괴멸되었다. 우라지보스톡에 어찌 어찌해서 가 닿은 러시아의 함정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 뿐이었다. 5월 27일 오후 2시 조금 지나 시작된 東海海戰의 최후는 둘째 날인 28일 아침, 문제의 獨島近海에서였다. 발틱함대의 전함 2척을 포함하는 5척의 함정을 연합함대의 기함 등 27척이 원경에서 포위했다. 러시아함대에 백기가 올랐고 나포절차가 진행되었다. 東海海戰은 獨島에서 끝났다 할 수 있다. 獨島가 東海海戰에서 저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었던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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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인들은 오늘날도 明治日本의 榮光의 정점에 日露戰爭史를 두고 있다. 그들은 日露戰爭을 민족 서사시라 하고 있다. 2차대전 패전 이후만 해도 「明治天皇과 日露大戰爭」이란 映畵는 2천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만든 회사는 일거에 財閥이 되었다. 小說家 시바료따로(司馬龍太朗)는 日露戰爭 스토리를 엮은 「언덕위의 구름」을 써서 列島의 地價를 올렸고, 國民作家의 반열에 올랐다. 日露戰爭만큼 日本人들의 내셔날리즘에 불을 지피는 꺼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日本人들의 獨島에 대한 미련이 그들의 日露戰爭 내셔날리즘에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注目해야만 할 것이다. 올해가 勝戰百周年이라서, 日本人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日露戰爭은 韓國侵略戰爭이었고, 大韓帝國의 主權을 강탈한 戰爭이었음을 어찌하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日本人의 속성으로 봐서, 우리가 日露戰爭에 이길만한 나라를 만들지 않고서는 獨島問題는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에서 東亞의 後進國인 日本人들이 어떻게 日露戰爭에서 10배의 국력을 가진 러시아에 이기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지 들여다보겠다. 이로서 亡國 100周年을 기념했으면 한다.
2005年 4月 8日
許文道 前統一院長官 2006-05-09, 오전 09:30 보내드림 |
(崔 會長 提供) |
첫댓글 어느 나라인들 민족주의의 개념이 없을까마는 나라가 어지럽거나 위태로울 때일수록 그리고 야욕에 차 있을 때일수록 그 강도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려해야 할 것은 자칫 그것이 배타성을 불러 온다는 사실이다. 현재 일본의 현실도 우리가 염려 해야 할 대목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배타성을 엉뚱한
곳에 퍼부을까 싶어 걱정이다. 해방 후 에치슨 라인은 북한이 남침을 하는데 빌미를 제공했다. 그 숱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지마는 아무도 후일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염려하거나 문제를 삼았다는 얘기는 없다. 심지어 국회 속기록에도 없다는 것이 알려진 상태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고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심도있게 잘 관찰을 해야 한다. 물론 독도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다. 그러나 앞으로의 문제를 여기에 머물러서 풀려고만 한다면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외교에 서툴다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정부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