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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과 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문제들!
3. 거듭남과 성화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오해!
(2) 성경이 말하는 중생과 성화 그리고 성화의 비결!
2) 야고보가 말한 것이 과연 혼의 구원인가?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서 "영혼"은 '프쉬케'로 혼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거듭날 때 영만 거듭나고 혼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혼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성화가 곧 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한 말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구절을 오해한 것입니다.
●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은 단지 성화가 아니다!
먼저, 성화를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혼의 구원 즉 또 하나의 구원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성화를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말할 뿐 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구원은 단지 혼의 구원을 뜻할 수가 없습니다.
알렉 모티어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서의 이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부정과거)는 '심어진 말씀'이 실제로 일상적 체험에서 구원을 명확한 현실로 만들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해긴 목사님처럼 이 구절의 구원을 성화 즉 현재로 보았지요.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미래로 봅니다. 예를 들어,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는 ... '영혼의 구원'을 제시한다. 구약성경의 용례에 따라 '영혼'은 단순히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하고, 구원은 미래의 일로 간주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판 날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 고든 케디는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영혼의 구원은 영적인 안목으로, 하늘에서 누릴 충만하고 온전한 구원의 큰 날을 내다보고 언급한 것입니다."
또, 댄 매카트니는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의 관점에서 이 구원 또는 구출은 이미 신자에게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미래에 있다."
마지막으로, 피터 데이비스도 이렇게 썼습니다.
"순종하기만 한다면 복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여기서 사람은 몸과 대조되는 실체가 아니라 전인을 의미한다. 신6:5; 욥33:28; 사42:2; 막8:35; 요10:11; 행2:41)는 것은 신약성경의 자명한 진리이다. 구원은 미래적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야고보서의 총체적인 어조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묵시적인 시간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을 중생기키시는(낳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이 그 말씀을 받는다면 그들 속에 심긴 동일한 말씀으로 그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처럼 다수의 학자들이 이 구절의 "구원"을 미래의 구원으로 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의 구원이 현재나 미래으 구원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즉 구원의 서정 전체를 뜻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크레이그 블롬버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심어진 말씀은 계속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 부정과거 부정사인 '구원하다'는 전반적인 것 혹은 사실 확인적인 것으로, 구원의 전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분되지 않는 전체라고 본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종말에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충분히 우리를 유지하고 성숙시킬 수 있다."
존 맥아더는 이것을 더 자세히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한다'는 이 구절의 가르침은 첫째로 우리가 처음에 받은 구원을 가리킨다. 이 때에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진리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의 마음속에 전달되며, 이를 통해 그가 구원의 길을 깨닫고 죄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게 된다(참조. 벧전1:23).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베푸시는 진리의 지속적인 원천이 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하게' 된다. 성령님은 그 말씀의 진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 보호하시며, 이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가족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지키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완전하고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해 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며, 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바울이 다음의 내용을 확증하면서 선포한 것은 바로 이 진리였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느니라.'(롬13:1). 이처럼 성경의 진리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구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 구원이 계속 더 성장하며 번성하게 하고, 마침내는 우리를 온전하고 충만한 영광의 최종적인 상태 가운데로 이끌어 간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칭의). 우리는 지금 그 말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있다(성화).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마침내 영원히 구원받은 상태, 궁극적이며 완전한 구원에 이른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영화)."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을 모두 포함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럼 둘 중 어느 견해가 옳을까요? 저는 주석들과 씨름하며 연구한 후 마지막 견해가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에 보면 "너희 영혼을 구원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18절에 이미 거듭남이 나왔습니다. 수신자들이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구원 즉 중생이 아니라 성화나 영화와 관계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할 바'에 사용된 헬라어는 동부정사입니다. 부정사는 시제와 무관하고 문맥에 의해서 그 의미가 결정됩니다. 때문에 꼭 현재나 미래의 구원을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 "능히 구원할 바"에서 "능히"라는 단어 때문에 "능히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때문에 과거가 아닌 현재나 미래에 "구원할"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어떤 구원이든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고, 과거의 구원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에 의하면 현재나 미래에 대한 구원으로만 보이지만, 그 전에 "심어진"이 나옵니다. "구원할 수 있는"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와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어진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은 단지 성화나 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 이 구절에 나오는 "영혼"은 단지 혼이 아니다!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구절은 절대 혼의 구원에 대해 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미 설명한 대로 "구원"이 단지 성화가 아니라 구원의 서정 전체를 뜻합니다.
둘째, 이 구절에 나오는 "영혼" 역시 단지 혼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뜻합니다. 이에 대해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중의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토마스 맨톤은 이 구절의 "영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 영혼' 너희의 육신과 영혼, 너희의 존재 자체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영혼 구원이란 말로 영혼·육신을 포함한 사람 존재 전체의 구원을 뜻했다. 즉, 중요한 부분이 전체를 대신한 것이다. 롬 13:1의 '각 영혼(개역 성경은 각 사람으로 되어 있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구절에서도 '영혼'(soul)은 '사람'(person)이란 뜻으로 쓰였다. 다음 구절에서도 본 절과 같은 용법이 사용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벧전1:9) ... 이 경우들에 있어서도 영혼은 그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사람을 영혼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육체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또, 더글라스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구약성경의 용례에 따라 '영혼'은 단순히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하고, 구원은 미래의 일로 간주된다."
또, 피터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순종하기만 한다면 복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여기서 사람은 몸과 대조되는 실체가 아니라 전인을 의미한다)."
또, 크레이그 블롬버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영혼'은 이 맥락에서 단지 육체와 분리된 '혼'을 말하기보다는 존재 전체 혹은 생명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댄 매카트니도 이렇게 썼습니다.
"이 단어는 생명이나 전 인격체, 즉 인간의 개인 정체성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심어진 말씀은 그 말씀이 심어진 사람의 전 인격을 구원할 수 있다."
이처럼 이 구절의 "영혼"이 "프쉬케"라고 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전체를 뜻합니다.
또, 이 구절뿐 아니라 5장 20절에서도 "혼"이라는 단어와 함께 "구원"에 대해 말했습니다. "영혼"도 혼을 뜻하는 프쉬케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1장 21절에 나오는 "영혼"과 같은 단어지요. 그러나 혼의 구원 즉 성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더 살펴보면, 야고보서 5장 20절의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에 나오는 "그의 영혼"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진리를 떠난 죄인을 돌아서게 한 사람의 영혼이다'와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된 영혼이다'가 그것입니다. 일부 학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미혹에서 돌아서게 된 자의 영혼을 뜻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합니다.
이 구절은 이단사설에 미혹된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즉, 그대로 두면 멸망할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화입니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1장 21절에서 프쉬케를 사용했으니 혼의 구원인 성화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좀 찾아보았는데 히브리서 10장 39절과 베드로전서 1장 9절에도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이 나오고 헬라어로 "프쉬케" 즉 혼입니다.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지만 두 구절의 "구원" 모두 성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그것이 성화와 관계있는 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사실, 중생은 영, 성화는 혼! 이렇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이 결합되어 영혼으로 존재하고, 단지 영이 아니라 영혼이 거듭납니다. 영혼이 거듭나고 영혼이 자라갑니다. 혼이 아니라 영혼이 자라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1장 21절에 나오는 혼이라는 단어만 보고 그것을 혼의 구원으로 보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3) 바울은 왜 분별보다 변화를 앞세웠는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성화를 혼의 구원으로 규정하고 야고보서 1장 21절과 함께 로마서 12장 2절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런데, 저는 오래도록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장애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행함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된다는 것이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고 읽을 때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가 이 구절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는 오직 새롭게 된 마음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 즉 식별하고 평가하며 순종하기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변화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새로워진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소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우리는 그것에 의해 점차 변화되어 간다."
굉장히 깔끔하지요! 그러나 어이없게도 성경과 순서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이 순서와 달리 분별이 아니라 변화가 먼저입니다. 그러면 왜 변화가 먼저일까요? 저는 '그것이 알고 싶다' 모드가 되어 주요 주석들을 읽으며 열심히 씨름했습니다. 그러나 답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밤에도 그 구절을 생각하고, 새벽에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자, 이튿날 주요 주석이 아니라서 잘 읽지 않던 주석들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거기에서 단서를 얻었습니다.
먼저, 저는 이 구절에 나오는 "변화"가 단지 마음의 변화인가? 아니면 행동의 변화인가? 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슈트워트 올리오트가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일은 단순히 외형적인 어떤 생활 스타일을 채택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정신)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우선 달라져야만 외형도 바뀔 수 있습니다."
또, 브루스 바톤 외 3인도 이렇게 썼습니다.
"신자들은 안에서 밖으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또한 그 변화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시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쓰고 있다."
이를 통해, 저는 이 구절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까지 포함하지만 마음의 변화에서 출발하며 마음의 변화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톰 홀랜드의 『로마서 주석』입니다. 그 책은 제가 오래도록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해결해주었습니다.
오래전, 피터 와그너 박사는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각자의 은사와 부르심을 옳게 분별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3절 때문에 그의 주장은 옳아 보입니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러나 톰 홀랜드는 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일축했습니다.
"바울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묘사한다. 신자 각 개인을 향한 온전한 계획이 있다는 바울의 확신을 의미한다고 일부 사람들은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 해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에서 바울은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다. '소마타 휘몬'("너희 몸")을 드리라는 바울의 권고를 보더라도 명확히 알 수 있다. 분명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한다는 의미이다.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내용은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도 등장한다(살전5:18; 엡5:17; 골3:15). 이 편지들의 대상이 개인이 아닌 교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님의 뜻'이란 분명 집단적 의미를 지닌다."
그 후 톰 홀랜드가 연이어 한 설명들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삶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은 종종 눈에 띄지 않는다. 대준문화, 미디어, 과학, 비신자 가정, 친구 및 동료들을 통해 가치가 확산된다. 그 가치는 소리 없이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또, 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는 표현을 하면서 로마서 1:28의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과 대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이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교회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시각을 재발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마음을 새롭게 할 때,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로마 사회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저에게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브루스 바톤 외 3인이 한 이와 유사한 말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더욱 그리스도처럼 되면, 그들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변하고 있을 때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행하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 늘 쉽지만은 않으며, 모든 상황에 대해 일련의 법이나 규칙들로 그 뜻이 정해지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려고만 한다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할 때라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그 뜻을 알고서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더 어려운 임무도 수행할 수 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시지요!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그런 하나님의 뜻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스스로 분별해야 할 더 까다롭고 모호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당시 권세자들은 교회를 박해하고 악했는데 그들에게 조세를 바쳐야 옳은가 바치지 않아야 옳은가? 또,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상의 제물을 피하기 위해서 채소만 먹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와 같은 것을 분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류의 분별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즉, 장성한 자들만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뜻입니다.
한편, 로마서 12장 2절과 함께 다음 구절도 제게는 하나의 수수께끼였습니다.
히브리서 5:12-14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왜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 장성한 자라고 하지? 어떤 면에서 선악의 분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선악 분별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들입니다. 비유컨대, 그것은 젖과도 같은 것입니다. 힘들게 씹을 필요가 없고 그저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전 절에도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우리가 이런 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참고로, 다른 교회의 설교는 그냥 편히 들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설교는 그냥 듣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젖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을 많이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각을 사용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히5:14). 여기서 "연단"은 헬라어 "귐나조"로 "연습하다, 훈련하다."라는 뜻입니다. 지각을 열심히 사용해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고단한 과정을 통해서만 선악 즉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가 되어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지각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연구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즉,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것이 이 구절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4)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성화의 비결이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변화 즉 성화의 비결입니다. 문제는 해긴 목사님이 "믿음의 말씀"식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읊조리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믿음의 말씀 바로 알기!』라는 책에서 지적한 대로, 해긴 목사님은 모든 성경말씀을 믿음의 말씀으로 오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고 읊조림으로 그대로 믿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성화의 비결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증거로, 해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말씀으로 새로워질 때, 당신의 생각은 변화됩니다. 당신의 생각이 변화될 때, 당신의 행동이 변화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때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면 당신은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나고 성경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그들의 몸과 마음, 혹은 혼에 어떤 일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엡4:23 '오직 너희의 마음(mind)이 새롭게 되어'
성경은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질 때 당신의 삶에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롬12:2).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을 적극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성공과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입에 두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의 문제를 말하고 거기 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거기 거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마귀는 당신의 삶에서 역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은 내 경우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지?'라고 묻기만 한다면 많은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마귀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생각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새로워진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당신은 마귀에 대적하여 강하게 설 수 있습니다. 새로워지지 않은 마음은 마귀의 생각들을 합니다."
"고백: 나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은 새롭게 된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해긴 목사님이 믿음의 말씀을 통해 성경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믿게 된 상태를 마음이 새롭게 된 것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일까요? 즉, 이것이 진짜 성화의 비결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치유의 비결일 수는 있습니다. 또,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비결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즉, 성경이 말하는 진짜 성화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주석들을 모두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해긴 목사님이 말씀한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역사로 마음이 바뀌게 됨을 뜻합니다. 그것을 존 스토트가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바울은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지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의 다른 글들로부터 그것이 성령과 하나님이 말씀을 결합시킴으로써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 우리에게는 성령의 '검'이며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으로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는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그 의미를 밝히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진지하게 결단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이런 뜻이라는 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이 구절과 함께 인용한 야고보서 1장 21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제가 주석들을 모두 읽어보았는데, 특히 더글라스 무가 설명을 잘했습니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으라는 권고는 ... 말씀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려고 애쓰라는 권고이다."
실제로 이 구절이 이런 뜻이라는 것은, 그 단락의 문맥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야고보서 1:21-25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의 말대로, 우리는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렇게 살면서도 참 신자라고 믿는 것은 미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먼저 부정적으로는, 거울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는 것처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설교를 이런 식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안 됩니다. 설교를 들은 후, 들은 것이 기억이 안 나고 남는 것이 없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길가 밭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다음으로 긍정적으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라는 말씀처럼 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자들은 "들여다보고"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는 대로 진리에 끌리고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설교를 초집중해서 듣고 그 의미를 깨닫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말씀대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곧 성화의 비결입니다!
그 증거로, 성경이 어떻게 거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지 상기해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나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한복음 17:17-19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디모데전서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처럼 진리 곧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듣고 있는 이 설교가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 어떻게 듣느냐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 아니신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까? 성령님입니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성령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야고보서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또한, 성령님이 거룩하게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지만 말씀과 상관없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의 불세례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불세례는 성령세례와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거룩이 불세례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세례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거룩해집니다. 방금 전 인용한 에스겔 36장 27절도 그 증거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것은 성령을 우리 속에 두어서 말씀대로 살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똑같은 새 언약을 이와 다르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잘 보시면, 거룩의 키가 되는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라는 말이 빠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8장과 10장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2-3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그래서 성령을 주어 말씀대로 살게 해주겠다는 예언을 예레미야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말로 바꿔서 예언한 것입니다.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 직접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것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을 통해 조금 다르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로마서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이나 소원에 즉각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빌2:13). 창세기에 보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개역성경)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죄의 소원을 따를 때 죄를 짓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을 따라 행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셔서 일어나게 하는 소원, 즉 죄의 소원에 반대되고 우리를 거룩으로 끌고 가는 강렬한 소원, 이런 소원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물론 성령님께서 직접 감동하셔서 그런 소원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는 때는 성령께서 설교 시간에 진리를 예리한 검으로 사용하여 우리의 심령을 찌를 때입니다. 그 결과 도전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강력한 결단과 소원이 일어나게 되는 바로 그때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대표적이고, 주되고, 강력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곧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이쯤에서, 어떤 분들은 "그러나 결심도 해야 되지 않느냐? 그리고 기도도 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말씀에서 나옵니다. 말씀 듣고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또, 기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역시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절감이 될 때 그렇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터져 나오고 절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역시 말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달으면 말씀대로 살려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화의 비결이 뭐냐? 말씀입니다!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