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 반짝하고 등장하는 프리폴 컬렉션. 봄, 여름 옷들이 지겨웠을 때쯤 나타나는 이 따끈따끈한 ‘신상’들 사이에서 〈보그〉가 찾아낸 세 가지 트렌드. 가을이 오기 전 미리 가을을
준비하고 싶다면 주목하시라.
“이 방에 있는 기자들 모두, 새로운 단어를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프리(Pre)’라는 단어는 예쁘지 않습니다.” 지난해 12월 초, 뉴욕 미드타운에 자리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마이클 코어스가 프리폴 컬렉션 프레젠테이션에 모인 패션계의 쟁쟁한 프레스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이 당당한 뉴욕 패션의 왕자가 갑자기 패션 기자들에게 ‘글짓기 수업’이라도 벌였을까, 싶었지만 실상은 이렇다. 패션계의 주기로 따지자면 봄, 여름 컬렉션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쯤인 5월 중순부터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해 8~9월 가을 컬렉션이 본격 출하되기 직전까지 매장을 독차지하는 ‘프리폴(Pre-fall)’ 컬렉션의 명칭에 대해 코어스가 딴지를 건 것. “제게 가장 중요한 시즌은 프리폴입니다. 어느 시즌보다 많은 옷을 판매하는 시즌이죠. 하지만 그 이름은 이상합니다.”
그의 딴지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프리폴’이라는 단어는 제아무리 패션을 사랑한다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기만 하다. 쇼핑을 즐기는 사람에겐 여름 정기 세일이 시작될 때쯤 매장에 도착해 세일에서 제외되는 ‘일부 품목’에 해당되는 옷들로 인식돼온 것이 사실. 게다가 프리폴 컬렉션은 제대로 된 패션쇼 형태를 취한 적도 없다. 대부분 쇼룸에서 현지 에디터들과 바이어들을 모아 둔 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것으로 쇼를 대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폴 컬렉션을 그저 ‘낀 컬렉션’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가지가지다. 우선 프리폴의 옷들은 꽤 다양하다. 뜨거운 여름 날 당장 입어도 좋을 탱크톱부터 남극 세종기지를 덮치는 블리자드도 거뜬히 물리칠 두툼한 코트까지(5월 말부터 12월까지 오랫동안 매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 그리고 쇼에 서는 순간 지구촌 구석구석 노출되는 메인 컬렉션과 달리 어느 정도 신비감까지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좀더 희소성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프리폴은 인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기 위한’ 프리폴 컬렉션에는 ‘입기 좋은’ 옷들이 넘쳐 난다.
이제 프리 폴 컬렉션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궁금증이 생길 만하다. 과연 프리폴 컬렉션에도 트렌드가 있을까? 물론이다! 지난해 12월 초 비잔틴을 주제로 프리폴 시즌의 포문을 열었던 샤넬부터 대부분 디자이너들의 프리폴 컬렉션에는 엄연히 트렌드가 존재했다. 〈보그〉가 ‘팔기 좋고’ ‘입기 좋은’ 프리폴의 트렌드 세 가지를 찾아냈다!
TAKE TUNIC
튜닉? 프리폴만큼 한국 여성들에게 낯선 패션 용어가 있다면 그건 튜닉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정확히 그 형태를 그릴 수는 없었던 튜닉을 ‘위키피디아’ 로 검색한다면 머리가 아파질지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이어지는 튜닉의 역사를 살펴봐야 할 테니까. 간단히 튜닉을 정의한다면, 은근슬쩍 A라인을 지닌, 보통의 톱보다는 조금 더 긴 상의 정도. 즉 바지 허리선 아래로 내려가는 톱이라 할 수 있는 튜닉은 이번 프리폴 컬렉션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미니 드레스를 닮은 튜닉을 바지 위에 겹쳐 입는 방식을 제안한 발렌시아가, 두툼한 니트 튜닉을 선보인 클로에, 터프한 가죽 튜닉을 선보인 캘빈 클라인, 그리고 가벼운 캐시미어 튜닉 스웨터로 실용성을 더한 스텔라 맥카트니 등등. 디자이너들은 저마다 실크 블라우스를 이을 만한 새로운 상의로 튜닉을 밀어붙였다. 크롭 팬츠와 오버사이즈 코트가 그랬듯 튜닉 역시 이번 시즌 새롭고 실용적인 실루엣을 선사하는 필수 아이템. 특히 디자이너들은 레깅스나 팬츠 위에 겹쳐 입는 방법을 제시했다(여기서 튜닉의 길이는 허벅지 중앙 정도). 다만 이 경우 모델 같은 기장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높은 힐을 신는 것이 상책. 다리 길이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캐주얼한 스니커즈와 매치해도 좋다. 무엇보다 튜닉의 유행을 반겨도 좋을 만한 이유? 성숙한 패션이 유행하면서 옷장 뒤로 밀려났던 짧디 짧은 미니 드레스들에게 새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 그건 이번 프리폴 트렌드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2000년대 초 입었을 법한 스키니한 크롭트 팬츠 위에 3~4년 전 즐겨 입던 미니 드레스를 겹쳐 입고, 90년대 후반 막스마라에서 구입했을 법한 풍성한 코트를 매치하는 것! 올가을 가장 세련된 트렌드세터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SOMETHING SHORT
짧은 바지에 주목하라! 올여름을 위해 기껏 용기 내 와이드 롱 팬츠를 구입했더니 웬 변덕이냐고?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통 넓은 70년대풍의 팬츠는 가을에도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나는 팬츠다’ 란 콘테스트가 있다면, 지금의 1위는 당연히 발목에서 뚝 잘라지는 날카롭게 재단된 팬츠들(크롭트 팬츠 혹은 트림 팬츠로 불리기도 한다). 그 변덕의 주인공은 올여름 하늘하늘한 와이드 팬츠 유행을 주도했던 피비 파일로. 그녀는 여성들의 옷장에 꼭 있을 법한 기본 아이템들만을 모아 ‘셀린 클래식’ 이란 이름의 캡슐 라인을 런칭했고, 바로 그 아이템들을 이번 프리폴 컬렉션에 교묘하게 믹스시켜 소개했는데, 그 중 눈에 띈 건 다리 라인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스키니한 크롭트 팬츠! “이건 유럽의 70년대 분위기죠. 남성복을 입는 여성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우아함이 있어요.” 지방시의 리카르토 티시는 짧은 팬츠의 매력을 이렇게 정의했다. 즉, 이 정도 길이의 팬츠라면 남성복의 날렵한 테일러링이 가미돼야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이 어정쩡한 팬츠를 선보인 다른 디자이너들 모두 ‘한’ 테일러링 한다는 소릴 듣는 디자이너들이다.
그럼 오랜만에 만나는 이 크롭트 팬츠들은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2000년대 초 대유행했던 ‘청담동 며느리 룩’ 처럼 트윈 세트에 매치해야 하는 걸까? 천만의 말씀! 이보다는 훨씬 남성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셔츠와 끝이 뾰족한 스틸레토 혹은 파일로가 ‘윙클피커스(Winklepickers, 끝이 뾰족한 남자 구두)’ 라 부르는 미디 힐과 매치하면 아주 쿨한 동시대적 스타일이 완성된다. 가을이 깊어지면 이 크롭트 팬츠는 오버 코트와 멋진 궁합을 자랑할 것이다. 이때엔 컬러풀한 스타킹이나 도톰한 양말로 팬츠 아래의 허전함을 달래면 좋을 듯. 무엇보다 크롭트 팬츠의 매력은 ‘ 어번 드레싱’ , 즉 도회적인 스타일의 끝장을 보는 것. 그래야 멋쟁이 피비 파일로의 멋진 의도를 100% 살리는 셈이다.
OVER AND OVER
“오버 사이즈 오버 코트는 프로포션을 새롭게 만든다.” 프리폴 컬렉션을 곰곰이 살펴본 미국 〈보그〉의 패션 글쟁이, 사라 무어는 과장된 실루엣의 오버 코트를 가을이 오기 전 구입해야 할 넘버 원 아이템으로 꼽았다. 코트와 파카의 나날로 정의될 법한 2011년 가을(유난히 다양한 코트와 파카가 가을 컬렉션에 많이 등장했다)을 미리 준비하기에 프리폴의 다양한 오버 코트만한 아이템이 또 있을까. 그건 지난 몇 시즌간 코트 선택의 열쇠를 ‘컬러’가 쥐고 있었다면(특히 블랙과 카멜!), 이젠 사이즈가 관건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빨간 맥퀸 코트부터 ‘크롬비 코트(영국 전통의 남성복 브랜드 이름을 딴)’란 새로운 애칭까지 지어준 셀린까지. 이번 프리폴의 코트들은 각양각색 디자인을 자랑하지만, ‘오버 사이즈’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이 트렌드의 매력은 현실적인 감각에 있다.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엔 커다란 코트가 그만이기 때문.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파리지엔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현실적인 프리폴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 중 압권은 역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오버 사이즈 코트들. “이렇게 길고 커다란 사이즈의 리얼 룩을 완성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가 제안하는 스타일링 방법은? 아주 스키니한 턱시도 팬츠에 튜닉을 입고, 그 다음 오버 코트를 더하는 룩! 그건 실용 감각 하나는 타고난 뉴욕 프레스들에게도 박수 받을 만한 룩이 될 것이다. 눈에 띄는 볼륨과 어깨 위 균형미를 갖춘 이 코트들은 특히 스키니 팬츠들과 잘 어울릴 것이다. 이건 사실 90년대 헬무트 랭의 작업들에서 발전된 아이디어다. 이 얼마나 시크하고 도회적인 방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