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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又下) 시인의 버킷리스트
오강석
1949년 전북 고창 출생.「시문학」등단. 단편소설집「때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하정(又下停)의 뻐꾸기
“뻐꾸기 울음이 예전 소리가 아니여.”
국내 최고령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이 며칠 전부터 신경 쓰이던 뻐꾸기 얘기를 꺼낸다.
“그기 다 미세먼지 때문인기라요.”
일주일에 세 번 들르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름 원인을 제시한다.
“그려? …”
잠시 귀가 번쩍 열리는 듯 하던 주장이 새겨들으니 아무래도 생뚱맞다. 와중에 뻐꾸기 울어대는 소리를 사나흘 굴리다보니 ‘이제부터가’라는 제목의 시가 되었다.
살만큼 살았으니/슬슬 떠나볼까 하고/신발 신고/바깥세상 나와 보았더니//꽃은 가지마다 피어있고/노란분홍 연분홍/가지각색으로 어우러져 있네//봄볕은 어머니처럼 내리고/건너 산에서는 뻐꾸기가/이제부터이니/더 좀 있어보라 하네
뻐꾸기 울음을 이승에 할 일이 남은 우하는 ‘더 좀 있어보라’는 말로 듣고, 봄철 불청객이 밉고 또 미운 고향이 대구라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풀이했으리라.
‘소리’는 우하(又下)가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이다. 종일 방에만 있으니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을 보내고 나면 남는 건 소리뿐. 새소리, 매미소리, 귀뚜라미소리…. 새소리만 해도 ‘미미미도’ 4음절로 반복되는 홀딱벗고새검은등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봄이 온 걸 알고, 소쩍새 울고 꾀꼬리 노래하면 여름이요. 기러기 울면 가을이고 까마귀 깍깍대면 겨울이다. 그날 우하정 (又下停) 뒷산의 뻐꾸기는 울다 지쳐 목이 쉰 걸까? 우하에게 새 울음을 사람 목소리처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우하(又下)는 고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 동경문화학원에 유학 중 중퇴하고 귀국했다. 26세인 1946년 대동신문 기자로 재직 중에 『예술부락』과 가정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경향신문, 『문예』 등 일간신문과 문예지들에 시를 발표했다. 해방 후 전주에서 삼남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30년쯤 신작 발표가 뜸했었으나 신문사에서 물러나 정읍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재개했다. 그 무렵인 1986년 65세에 첫 시집 『천치의 노래』를 출간했다.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바보, 천치처럼 생각되어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망국적 ‘지역감정 극복’을 내걸고 떨어질 것이 뻔한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언론과 지지자들이 ‘바보 노무현’이라 칭하는 것을 보며『천치의 노래』를 떠올렸다. 시집의 제목도 그러려니와 스스로 수십 년 전부터 ‘언제나 모든 사람의 아래’에 있음을 자처하는 호를 써온 우하(又下)야말로 ‘원조 바보’인 셈이다. 우하는『천치의 노래』후기에 잠시 중단했던 시 창작에 정진하기로 한 각오를 언급하고 있다. ‘여생을 정리하려다보니까 그래도 살 수 있는 길은 이것 외에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는 토로, ‘얼마나 더 살 것인지 그것을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목숨이 있는 한 이제 이 일을 쉰다거나 그만두지 않으려 한다.’는 부분에 이르면 결연한 자세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하(又下)는 미당 사후에 고창의 미당과 자신의 생가 옆에 우하정(又下停)이라는 작은 초가(지금은 지붕을 개량했다.)를 짓고 낙향해 미당지킴이를 자처했다. 미당문학관을 찾는 문인이나 학생들에게 미당의 청년시절 생생한 일화를 들려주는 것 또한 그의 일이다. 우하정에서는 미당 내외와 부모의 묘가 한눈에 보인다. 우하는 매일 아침 툇마루에서 묘소를 이윽히 바라보며 미당에게 전날 미당시문학관을 찾아온 탐방객들과 나눈 대화를 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하의 말을 빌리면 시묘살이(탈상할 때까지 3년간 묘 주변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지키던 풍습) 하는 셈이라고 한다. 탈상한지야 오래 전이지만 우하(又下)의 시묘살이는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하(又下)를 키운 건 8할이 미당
우하(又下)는 어려서부터 8살 위인 미당을 유난히 따랐고 미당은 다른 동생들보다 우하를 더 다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미당은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하고 집에 올 때나 가출했다 돈이 떨어져 집에 돌아올 때도 잊지 않고 우하(又下)의 선물을 사다주었다. 19살이던 미당은 15살 누이와 11살 우하(又下)의 시를 모아 형제시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당의 시적 토양이 할머니의 구전 동화였다면 우하(又下)의 시적 뿌리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하(又下)는 그 시집을 간직하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다. 젊어서는 미당을 넘어서지 못할 ‘벽’이라 느꼈는데 지금은 ‘자산’이라 생각한다는 우하(又下)는 ‘나를 키운 8할은 형님 미당이다’고 말한다.
우하(又下)는 60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미당에게 칭찬을 들었다. 롤모델인 미당의 칭찬을 듣고 시집을 낼 결심을 했던 셈이다. 미당은 우하(又下)의 첫 시집 『천치의 노래』에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란다.’는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한국시인박물관은 우하(又下)의 시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형 서정주 시인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바다」, 「들국화」, 「5월」 등의 시가 있으며, 「산상의 아침」, 「광야에서」 등은 시인만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유한한 세계와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포착해내는 데 주력했으나, 이후 사물과 생명의 영원성에 주목하면서, 현실을 초연한 위치에서 관조, 음미하는 시를 창작했다. 최근에 발간된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2013)는 한결 같이 정감 어리고 따뜻한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시인의 시는 고요하기 그지없고, 도시의 소음이나 거칠고 속화된 삶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으며, 적요와 인내의 삶 그 자체를 형상화함으로써 현대 독자들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 한국시집박물관 〈한국의 시인〉
복권 사는 시인
“시 써가지곤 돈이 안 돼. 그런디 세상엔 시 쓰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것이여.”
우하(又下)는 돈이 필요하다. 자녀들에게 달랄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이나 되는 돈이 왜 필요한 걸까? 주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한다. 그래서 로또복권을 사기로 했다는 것. 벌써 10년도 더 전부터 한 주도 건너지 않고 매주 한 장씩 산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사게 될지 모른다. 당첨 확률은 814만5,060분의 1. 확률 상으로는 168억 원어치를 사야 1등에 당첨될 수 있다고 한다. 추측컨대 우하 생전에 복권에 당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리에 밝은 분이 그쯤 모를 리 없다. 달리 방도가 없는 자신을 위무하는 방편이리라. 주변의 가난한 시인들 맘 편하게 시 쓰게 할 방도가 없는 무력감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연유로 알게 된 가난한 시인들 중에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대상이 자꾸 늘었다. 매주 복권 한 장을 사 나르는 일부터 갖가지 잔심부름을 싫은 내색 없이 처리해주는 조병균 전 질마재마을 축제위원장 차도 바꿔줘야겠고, 미당 생가 옆에서 된장공장 하던 김갑성 사장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 식사하러 가면 입맛에 맞는 반찬을 싸주는 선운사 입구 서해안식당 주인의 은행빚 2천만 원도 갚아주고 싶다. 미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지난 해 작가 수업을 한다고 한국에 들어와 시골 초등학교 원어민 강사로 일하고 있는 미당의 둘째 아들의 아들 원룸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고 귀향한 조상호 시인도 도와줘야 겠고, 한 주가 멀다하고 갖가지 먹거리를 싸들고 찾아오는 군산의 자인 스님, 예산이 부족해 운영이 부실한 미당시문학관과 미당문학회도 지원 대상이다. 숟가락 개수까지 훤한 미당시문학마을 가난뱅이 먼 친척도 늘 마음에 걸린다. 고군분투하는 예총 박종은 지회장과 지역 문인협회의 쪼들리는 살림살이도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작 본인을 위해 쓰겠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우하의 거처는 화장실 하나가 딸린 서너 평 되는 단칸방이다. 삼십 년은 족히 되었을 냉장고, 박물관으로 보내야할 TV, 방 한쪽 구석을 점유하고 있는 낡은 책장 겸 장식장 그리고 쌓여있는 책과 침구들.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겠다. 검소하다기보다는 누추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먼 길 떠나기 전에 주변 사람들 주름 펴진 얼굴 보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기실 그런 일 해야 할 분 들은 따로 있다. 6.13선거일이 가까워지니 우하가 복권을 안 사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리에 귓전이 따갑다.
국민소득 1만 불을 돌파했을 때 참 감격스러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1인당국민소득 3만 불을 공약한 것을 잘 아는 정부는 국민소득 2만 불 시대 12년만에 국민소득 3만 불을 달성해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아무런 감동도 없다. 국민소득 3만 불이 되더라도 문화선진국은 요원하리라는 우려, 우하(又下)가 로또복권 사는 걸 멈출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TV생중계를 보며 평화는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 같고, 통일이 저만치 오고 있는 듯해 감격스럽다가도 뉴스 말미에 물 뿌리기 갑질 얘기가 나오면 찬물을 뒤집어쓴 듯 감동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가구를 항공기 부품으로 속여 들여왔다는 한진그룹 모녀가 혈통을 과시하듯 빼닮은 괴성을 질러대는 녹음을 듣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한진(韓進).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그런 길이 결코 아니겠으나 ‘나아가고 있는 길’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닐까?. 지구상에 그런 문화선진국은 없다.
몇 해 전 서양화가인 서해대 이일청 교수와 우하의 세 번째 시집에 서양화를 삽입하는 문제를 협의하러 우하정에 갈 때 여름방학으로 일시 귀국한 중국 쿤밍대 교환교수 김태삼 유효진 부부가 동행했었다. 방이 너무 좁아 우하정 앞 모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가 시와 그림의 조화도 문제지만 컬러인쇄비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얘기를 했고, 우하는 출판사가 적자를 보면 안 된다는 얘기, ‘돈 안 되는 일만 한다’는 타박을 밥 먹듯 들어야하는 가난한 시인들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다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유 교수의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서다.
“돈 안 되는 일 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에요.”
마지막 버킷리스트
우하정에 정착한 우하는 시 창작에 전념하고자 했으나 다시 찾은 고향 산천이 너무 좋아 난(蘭)이며 산삼도 캐고 수석도 하고 낚시도 즐기느라 시작(詩作)에 정진하지 못했던 듯, 첫 시집 26년 뒤인 90세가 되어서야 90편의 시를 모아 두 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냥 덮어둘 일이지/봄바람에 옷소매 스치듯/지난 잠시의 눈맞춤/그것도 허물이라고 흉을 보나//대숲이 사운거리고/나뭇잎이 살랑거리며/온갖/새들이 재잘거리네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따온 ‘소문’ 전문이다. 이렇다 할 뉴스가 없는 시골 마을이란 게 눈 한 번 맞추어도 바람났다는 소문이 돌기 십상이다. 허물을 덮어주는 따뜻한 시선으로 질마재 주민들의 삶을 다독이며 가벼운 교훈을 전하는 우하(又下停)의 다정한 배려가 읽혀진다.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 되어/도덕암 근처/늙은 신선 찾아 나섰네//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 되어/그도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빈집에 자물쇠만 채워 있었네//돌아서서 오는 길/건너야 할 돌다리도 없는데/어쩌자고 길섶엔 저승꽃만 피었네
우석대 명예교수인 송하선 시인은 이 시집에 수록된 ‘저승꽃’이라는 시를 예시하며 시집 전편에 선미(仙味)가 넘친다고 분석하고, ‘저승꽃’의 ‘늙은 신선’은 아마도 자화상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우하가 흔히 자신을 지칭하던 ‘산송장’을 ‘산신선’으로 환치시킨 것. 우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무릎을 치며 동의할만하다.
시도 시려니와 미당의 친동생이 90세에 시집을 냈다는 것 자체가 뉴스 벨류가 높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영향으로『그냥 덮어 둘 일이지』는 시집으로는 드물게 한때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0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덕분에 전국의 지인들로부터 많은 축하와 격려도 받고, 소싯적에 문학소녀였다는 90세 할머니 팬에게서 수차 격려 전화를 받기도 했으니 이 또한 삶의 작은 기쁨이 되었으리라.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하(又下)가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던 듯하다. 우하(又下)가 제안하면 몇 사람이 어울려 추억담을 나누곤 했다. 함박눈 내리는 날 왕림의 비닐하우스 식당에서 장작난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기, 산벚꽃 필 때 우하정(又下停) 건너 마을 장수강변 주막에서 쭈꾸미 안주에 막걸리잔 기울이기, 한겨울 선운사 앞 풍천 갯벌횟집에서 숭어회에 물메기탕 먹기 등 맛 기행 몇 건이 전부였다. 여건이 맞지 않아 하지 못한 일들도 있다. 전주의 기방에서 거문고 자락에 판소리 듣고 부채춤 보는 건 기방이 다 사라져버렸으니 애초에 불가능 했고, ‘문장자랑 하지 말라’는 섬. 지금은 슬로시티라는 관광 아이템으로 유명해진 청산도는 50분이나 걸린다는 뱃길이 부담스러워 포기했다. 무안의 화산백련지 연꽃축제는 이미 다녀온 적도 있는데다 이동이 불편해 포기해야 했다. 뭔가 미진한 듯해 “혹여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가시고 싶은 곳,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세요?”라고 물어도 “없어. 그런 거.” 손사래다.
우하(又下)의 시 창작은 그 사이에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 무리했는지 미당 출생 100주년이 되는 2016년 초 20여 편을 썼을 무렵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사나흘 사경을 헤매자 우하(又下)의 장남이 서울 큰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내려왔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우하(又下)가 “서울 아파트에서 감옥살이하느니 여기서 죽겠다”고 완강히 거절해 무산되었다. 다행히 차도가 있어서 두어 달 뒤 어렵사리 완치되었다. 독감 완치 후 우하(又下)의 장남 부부가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주변 분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우하(又下)는 돌연 500일 뒤에 성대한 잔치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그날 참석자 전원을 잔치에 초대했다. 세 번째 시집에 수록할 시를 다 쓰려면 500일 쯤 걸릴 듯하니 그때 자축연을 열겠다는 것. 우하(又下)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였다. 우하(又下)는 세 번째 시집에 수록할 시를 다 쓰는 데, 좌중은 500일을 더 사시는 쪽에 무게를 두고 그날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남은 날은 차츰 줄어들었지만 반비례해 늘어가야 할 시 작업은 더딘 눈치였다. 약속 날이 다가오면서 장소는 전주에서 고창으로 바뀌고 초청인사는 50명에서 20명으로 축소되었다. 결국 500일째 되는 날인 2017년 5월 15일 주변 몇 사람이 모여 조촐한 축하연을 열게 되었다. 세 번째 시집에 수록할 시를 다 쓰진 못했지만 500일을 사신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우하(又下)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완성일은 500일 연기되었다.
우하정(又下停)으로 우하를 찾아 뵐 때마다 건강에 대해 물으면 “귀도 잘 안 들리고, 잘 걷지도 못하니 산송장이지. 정신 하나만 멀쩡해.” 10년 전부터 으레 똑같은 대답을 들어왔다. 그런데 두 번째 500일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뒤 거기에 한 마디가 더해졌다. “요즘 시가 통 써지지 않아서 걱정이여.” 우하(又下)는 건강보다 세 번째 시집에 수록할 시를 다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청력은 일상적인 톤으로 대화가 가능하고, 걸음도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수 십 미터 떨어진 문밖에 세워둔 차까지 걸어가 부축 없이 무쏘 차의 조수석에 올라탈 정도는 된다. 몇 평 안 되지만 마당도 직접 관리하신다. 4월 말에는 마당에 핀 영산홍 주변의 잡초를 뽑다가 뱀에 물려 이틀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시가 잘 안 써져서 걱정’인 속에서도 가끔 새로운 시들이 추가되었다.
사랑할 사람도 없는데/나보고 어쩌라고/봄은 또 와서/꽃을 피우려 하는고//중략/아득한 강 저쪽엔/아직도 함박눈이 내리고만 있네//중략
세 번째 시집에 수록 예정인 ‘이른 봄’의 일부이다. 이 시는 우하(又下)가 정신만 말짱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직 ‘이른 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했던 사람과 70여년 곰삭힌 추억은 아득한 강 저쪽, 함박눈 내리는 마을에 얼어붙어 있는데 이승의 감당할 수 없는 봄기운이 차라리 원망스럽다는 푸념이다. “나를 위해 쓴 시여.”라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대저 ‘살아있는 신선’이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아닌가. 어쩌면 이승의 겨울에 그리운 사람이 살고 있는 저승의 ‘이른 봄’을 불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세 번째 시집에 꼭 100편을 수록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우하(又下)의 답이다.
“나는 미당 같은 그릇은 못 되여. 젊어서는 시를 만들었지. 형님처럼 써보려고 억지로 짜 맞추다 잘 안되면 화가 나서 술을 퍼마시기도 했어. 지금은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거여. 90이 넘으면서 부턴 그만한 즐거움이 없어. 꼭 100편을 수록하겠다는 게 아녀. 죽기 전에 시 쓰는 즐거움을 그만큼 누렸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램이지.”
2018년 5월 7일 현재 완성된 시는 50편. 어쩌면 두 번째 500일이 되어도 부족한 시편을 다 채우지 못할지 모른다. 그때는 다시 500일을 연장하면 될 일이다. ‘목숨이 있는 한 이제 이 일을 쉰다거나 그만두지 않으려 한다.’는 우하(又下)의 다짐은 그때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문득, 96세 노시인의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움인 삶이 아름답다. 부디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천천히 이루시라. 그리하여 100수를 누리는 날 100편째 시를 쓴 기쁨을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