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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유래 - 신라인의 성씨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스님 일연의 삼국유사는 모두 신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성씨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모든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사실은 신라 사람들이 가장 늦게 성씨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후세의 역사를 이어온 결과적으로 삼국 중 한반도의 종주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금석문 등 역사적 고증 자료가 전해오고 있으나 사람의 성을 찾아 볼 수 있는 초기의 자료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신라 초기에 모든 성씨가 생겨난 이야기를 찾아보면;
첫째 한국인으로 가장 먼저 성을 가졌다고 전해오는 사람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로 박(瓠)처럼 생긴 알(卵)에서 나와서 박(朴)을 성으로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조에는 ".....진한사람들은 박(瓠, 바가지를 만드는 넝쿨 식물의 열매)을 박(朴)이라고 부르는데 그 아이가 나온 큰 알(卵)이 박(瓠)처럼 생겼으므로 성(姓)을 박(朴)이라고 하였다......(....辰人謂瓠爲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爲姓.....)"고 되어있다.
둘째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가 알천 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은 알평으로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 9년에 설치했고 이름은 급량부다. 고려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이름을 중흥부로 바꾸었다. 파찬, 동산, 피상 등 동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라고 부르는 곳으로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이하 모두 같다)
세 번째는 무산 대수촌으로 촌장은 구(俱, 仇라고도 쓴다)예마로 처음에 이산(개차산 이라고 하기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혹은 탁부 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장복부라고 한다. 박곡촌 등 서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
네 번째는 취산 진지촌(빈지 또는 빈자, 빙지 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이며 처음 화산에 내려왔으니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통선부라 한다. 시파 등 동남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 문창후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문창후(崔侯)의 옛 집임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지금의 금강산 백율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으로 촌장은 지타(祗 혹은 只他라고 한다)로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와 한기부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는데 서성지, 하서지, 내아 등 동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 번째는 명활산 고야촌으로 촌장은 호진으로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라고 하는데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혹은 갈곡이라고 한다) 등 동북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
(辰韓之地古有六村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 峰是爲及梁部李氏祖 (弩禮王九年置名及梁部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改名中興部波 東山村屬焉)二曰突山高墟村長曰蘇伐都利初降于兄山是爲沙梁部(梁讀云道或作 亦云道)鄭氏祖今曰南山部仇梁伐麻等烏道北廻德等南村屬焉(稱今曰者太祖所置也下例知)三曰茂山大樹村長曰俱(一作仇)禮馬初降于伊山(一作皆此山)是爲漸梁(一作 )部又牟梁部孫氏之祖今云長福部朴谷村等西村屬焉四曰 山珍支村(一作賓之又賓子又 之)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是爲本彼部崔氏祖今曰通仙部柴巴等東南村屬焉致遠乃本彼部人也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殆明矣五曰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長曰祗 (一作只他)初降于明活山是爲漢岐部又作韓岐部裵氏祖今云加德部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六曰明活山高耶村長曰虎珍初降金剛山是爲習比部薛氏祖今臨川部勿伊村仍仇 村闕谷(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고 적혀있다.
셋째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이사금조에 의하면;
"유리이사금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들에게 각각 성(姓)을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그 성을 이씨로 하였으며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그 성을 최씨로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량부(모부 라고도 함)로 고치고 그 성을 손씨로 하였으며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그 성을 정씨로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배씨로 하였으며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설씨라고 하였다.
(九年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梁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部), 姓孫. 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祗部, 姓裵. 明活部爲習比部, 姓薛....)"라고 적혀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사람들은 초기부터 성씨 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신라의 금석문이나 그 외의 역사를 고증 할만한 과학적 자료에서는 신라 초기에서 중기까지 사람들 중에서 성씨를 사용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많은 금석문이 전해오고 있는데 신라 진흥왕 때 만든 경남 창녕,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단천 마운령에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와 신라 진흥왕 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대구에 있는 무술오작비와 신라 진평왕 때 만든 경주남산신성비 등에 나오는 사람을 살펴보면 모두 이름만 있고 성을 사용한 사람은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각 비문의 주요 부문을 발췌하여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창녕비. (561년) : 喙居七夫知一尺干沙喙心表夫智及尺干村主麻叱智述干
북한산비.(568년 추정) : 沙喙部○丁次奈末
황초령비.(568년) : 喙部服冬知大阿干沙喙部 知大舍
마운령비.(568년) : 喙部居社夫智伊干沙喙部 力智()干本彼部加良知小舍
무술오작비.(542년) : 冬里村沙乙木一伐稱得所里村也得失利一伐.
신성비.(579-632년경) : 沙喙音古乃大舍.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인들이 비석에 이름과 그 사람의 본관(本貫)이라 할 수 있는 소속 부(部)의 이름, 촌(村)의 이름 등을 적었는데 여기에서;
량부(喙部)는 양부 즉 알천 양산촌을 말하는 것이고,사량부(沙喙部)는 급양부 즉 돌산 고허촌을 말하며, 본피부(本彼部)는 본피부 즉 자산 진지촌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본관의 전신이다. 또 거칠부(居七夫), 심표부(心表夫), 마질(麻叱), 복동(服冬), 영( ), 거사부(居社夫), 영력( 力), 가량(加良) 등은 사람의 이름이다.
또한 지(知), 지(智) 등은 사람에 대한 존칭(요즈음 같으면 씨, 님, 경, 공에 해당)이고,
일척간(一尺干), 급척간(及尺干), 내말(奈末), 대아간(大阿干),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은 중앙부처의 벼슬이름이고 술간(述干), 일벌(一伐) 등은 지방의 벼슬이름이다.
여기에서 만약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말하듯이 서기 32년에 신라 6부에 성을 주었다면 양부(喙部)는 이(李)씨로 사량부(沙喙部)는 최(崔)씨 본피부(本彼部)는 정(鄭)씨라고 적어야 옳다고 보인다.
즉 창영비를 예로 들자면;
"喙居七夫知一尺干沙喙心表夫智及尺干村主麻叱智述干"
(양부의 거칠부님은 일척간이시고 사량부의 심표부님은 급척간이시며 촌주 마질님은 술간이시다)는
"李居七夫知一尺干崔心表夫智及尺干村主麻叱智述干"
(이거칠부님은 일척간이시고 최심표부님은 급척간이시며 촌주 마질님은 술간이시다)라고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과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부(部)를 적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본관(本貫)에 해당하는 부(部)가 있어 성(姓) 대신 사용되고 성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신라에서는 빨라도 신라 진흥왕 이후에 성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헌적으로 중국 역사책에 적힌 신라 사람이 성씨를 사용한 예는 23대 법흥왕을 양서(梁書)에서는 모명진(募名秦)으로 그리고 남사와 통전에는 "성은 모이고 이름은 진이다(姓募名秦)"라고 적어서 신라 왕실의 성씨를 모(募)라고 했으며 북제서는 신라 24대 진흥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적어서 신라 왕실의 성씨에서 비로소 김(金)씨라는 성씨가 나온다.
여기서 법흥왕의 성 모(募)의 한자 뜻은 "모으다" 이지만 여기에서는 "없다(某, 아무개, 누구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 사용한다, 예 : 某氏)", "모른다"라고 해석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며 법흥왕의 성이 "모"라고 보는 학설에는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즉 법흥왕은 "성명(姓名) 모진(募秦)"이 아니라 "성은 없고(모르겠고) 이름은 진(秦)이다"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다.
진흥왕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 왕족의 성 "김"이 나타나지만 "김진흥" 이라는 표현은 성으로 사용 된 것인지 아니면 성으로 사용되려 하는 초기 단계인지 아주 어색하고 어쨌든 신라 진흥왕이 처음 성을 어색한 형태로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 사회가 성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살펴보면 신라는 비록 진흥왕이 처음으로 성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성씨가 신라에 제도로서 정착하여 귀족이나 사대부 등 왕족이 아닌 민간인들이 사용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생각되며 대체로 신라의 성씨는 말기부터 권문세가(權門勢家)등 명문가(名門家)들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 같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일부 지역에 중국의 군대가 주둔을 하는 등 중국인들과 접촉이 잦아지고 또 통일신라 후기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중국의 풍습과 문물을 배워오게 되었으므로 후기에 귀족이나 명문거족들이 비로소 성씨를 사용한 것 같다.
해설 :
김부식(金富軾)
1075 -1151. 고려 인종때 문신, 학자. 사대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역사책. 고려 인종 때(1145년) 왕의 명령으로 김부식이 중국 사마천의 사기를 본 따 옛날 기록과 유적 및 중국의 역사책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고려시대 만든 원본은 이미 없어졌고 조선 태조 때(1393-1394)에 진의귀, 김거두가 다시 발행하고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다시 발행한 것이 전해온다. 이후에 목판본과 인쇄본을 여러 번 발행했다.
1-12권은 신라 본기, 13-22권은 고구려 본기, 23-28권은 백제 본기, 29-31권은 연표, 32-40권은 지류, 41-50권은 열전이다. 중국의 사기를 본받아 사대주의적 내용이 많이 들어있고 신라를 중심으로 작성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스님 일연.
1206-1289. 고려시대 스님. 호는 무극, 목암,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 자는 일연. 경상도 경산 출신. 1214년(고려 고종 1년) 9세 때 해양 무량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에게서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1227년 승과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선사, 대선사에 올랐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열왕 때(1281-1283년 사이에 발행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명한 승려 보각국사 일연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를 모아 연표와 더불어 기이, 흥법,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의 항목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원본은 없어지고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발행한 것이 전해오지만 희귀하다.
저자가 스님이어서 그렇겠지만 불교적 내용이 많고 삼국 외에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 사군, 낙랑, 대방, 말갈, 발해, 2개의 부여, 후백제, 가락국 등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일연 스님은 요즈음 개념에서 소위 재야 역사학자로 이 책은 정사로 인정하기 어려운 전설이나 야사가 많으나 삼국사기가 다루지 않은 옛날 기록을 원형대로 모아서 기록했다는 특색이 있다.
금석문(金石文)
옟날의 비석(碑石), 지석(誌石), 종(鐘), 정(鼎) 등 유물(遺物)이나 바위에 적혀있는 옛날 문자(文字)로 문자에 의한 전래(傳來) 중에서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중국 만주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충남 부여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 적힌 글 등은 한국에서 아주 중요한 금석문이다. 계파에 관계없이 전주최씨와 관계하여 중요하고 오래된 금석문은 문창후 최치원이 적은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비문이고 전주최씨 문성공계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중요한 금석문은 문성공계의 시조 문성공 최아의 5세손 소윤공 최득지의 묘비문이다.
금석문은 당시 사람이 적은 글이므로 후세 사람이 적은 서적이나 문서보다 역사적 고증의 가치가 매우 크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 신라 제24대 왕. 540년에서 576년까지 재위했다.
진평왕(眞平王)
?-632. 신라 제 26대 왕. 576년에서 632년까지 재위했다.
성이 김씨(金氏)이고 휘(諱)가 백정(伯淨, 白淨)이라고 한다. 진흥왕의 손자.
신라 법흥왕(法興王)
?-540. 신라 제23대 왕. 514년에서 540년까지 재위했다.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열었고 시법(諡法)을 제정하고 517년에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했으며 520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公服, 유니폼)을 만드는 등 신라의 국가체계를 정비했다
[출처] 성씨의 유래 - 신라인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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