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코펜하겐의 어느 겨울. 새벽 3시에 요란한 전화벨 소리. 한 여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사람 살려요" 하는 말소리만이 들려왔다. "진정하세요. 어디입니까? 곧 가겠습니다." 그러나 모르겠다는 말만이 계속되었다. 소방단의 에릭은 수화기를 놓지 말 것을 계속 당부하며 말했다. "여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셨죠?" "전화기에 붙어 있었어요." "그럼 그곳 전화번호도 붙어있나 확인해 보세요." "없어요. 아무것도. 빨리 와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에릭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무엇이 보이죠?" "긴 사각 유리창이 보이고 창문 너머의 가로등이 보여요." "방에 불은 켜져 있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에릭은 잠시 생각했다. "집은 시내쪽의 길가에 있고 가로등이 보이니까 3층 이하의 건물 이겠지." 에릭은 전화수화기를 든 채로 다른 전화로 소방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그리고는 그 전화를 계속 들고 있으면 다른 화재가 나더라도 신고를 못받으니 단념하고 전화를 끊게나." 그러나 에릭은 훈련받던 시절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배웠다며 소방서장을 설득하였다. "좋아 해보자. 곧 출동하도록 하지." 에릭은 여인과 소방서장과의 통화를 계속하였고 20대의 소방차량은 즉시 출동하였다.
15분후, 에릭이 급히 말했다. "들립니다. 수화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1번 차량 사이렌소리 끄시오." "그래도 들립니다." 10번 차량에 이르기까지 사이렌 소리를 켰다 껐다 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10번 차량 사이렌소리 끄시오."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서장은 무전기를 통해 명령을 내렸다. "10번 차량 주변이다. 10번 차량은 확성기로 방송하라." "주민 여러분, 생명이 위독한 여인을 구하고자 합니다. 모두 불을 꺼주세요." 주변의 모든 불은 꺼지고 단 한집 바로 잔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 했던 그 여인의 집만이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는 소방대원의 목소리 "여인은 살아있다. 의식은 없지만 맥박은 뛰고 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침착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다.
당신에게 생명의 소중함은 어느 정도입니까?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성경 : 마 20:29-34
제목 : 영안이 열리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마19:33).
우리 인간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형성되어 있다. 이 모든 지체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지체들 중에서도 특히 눈을 가리켜서 몸의 등불이라고 하시고 눈의 소중함을 일러주셨다(마6:22-2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마침 길가에 서 있던 두 소경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고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내용이다.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밝은 세상을 보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육체의 눈을 뜬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적인 눈을 뜬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안이 열리면 어떠한 것을 볼 수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영안이 열리면 성경을 바로 보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무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이지만 구속사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되어있는 성경을 아무나 깨달을 수는 없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나있는 기적들을 과학의 눈, 이성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전들이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로부터 성경에는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고 말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귀중한 생명을 잔인하게 죽였던 살인범들도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주신 다음에 성경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깊이 죄를 뉘우치며, 감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흐뭇한 일들을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된다. 눅24:45의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라는 말씀은 「성경에 의해 영안이 열리지 않고 성경을 보면 깨 닫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얼마나 열심히 보았는가 사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 모든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보기는 하였지만 올바르게 깨닫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성령의 조명을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영안이 열려 진주보다 더 값진 보화를 캐어낼 수 있도록 말씀에 능통한 성도가 되기 바란다. 둘째, 영안이 열리면 주님을 바로 보게 된다. 눅24:13-35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글로바와 클레오파스)는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셨지만 영안이 가리워졌을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5.16절). 그리고 주님의 그 영안을 뜨게 해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았다(눅24:31).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믿는가 주님이 우리 곁에 항상 계심을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육안과 지안도 중요하지만 신령한 세계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영안을 뜨시기 바란다. 우리들 곁에는 늘 주님이 함께 계신다. 영안이 오지 못함으로써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마치 멀리계신 분으로 탄식하며 부르짓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한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셋째, 영안이 열리면 천국을 바라보게 된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땅에서 겪는 모든 자랑은 다 살아지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스데반이 그렇게 살았고(행7:55-56),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면서 살았다. 우리도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다(골3:1). 우리들의 눈이 열려야 세상의 모든 사물을 바라 볼 수 있듯이 영안이 열려야 진리를 볼 수 있다. 영안이 열리면 성경을 깨닫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잠깐 스쳐 가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면서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가 있다. 과연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크게 떠져 있는가 눈을 감은 자들은 내 생각과 세상적인 야심들을 좇으며 산다. 그러나 영안을 뜬 자는 생명과 진리 되시는 주를 위해 충성하며 산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영안이 열리므로「성경을 바로 보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