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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詩 읽기 스크랩 아잔타* 가는 길 / 안영희
동산 추천 0 조회 29 15.01.18 2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잔타* 가는 길 / 안영희

 

 

첼로화 자귀꽃 부겐베리아
그리고 이슬 젖히는 저 이름 모를 꽃들
창 아래서 함께 했음 잠을 깬 다음에야 알고
감동한 하룻밤을 두고, 우리 실은 자동차 홀로
아우랑가바드의 첫 아침을 가를 때,
올리브 숲에서 솟는 인디아의 태양은
차마 마주 할 수 없는 자홍의 만조滿朝
지워지고 있는 서사시 읽고 가라 읽고 가라, 안타까이
시인의 이름을 부르는 이슬람 묘지의 부식하고 있는 빗돌들 흙방
문턱에 목 걸치고 염소젖을 짜는 어미
물끄러미 내다보는 먹포도 빛 눈동자
땋은 머리도 단아한 흑발의 소녀들
밀밭 첫 초록 사열하며 책을 안고 가는
아아, 시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던가요
기원전 2500년 늙은 땅이 이슬 털며
저리 부신 또 하나 후생後生으로 태어나고 있는
이 아침 세상으로

나를 마중하고 계신가요 당신?


* 아잔타는 길이600미터에 30개나 되는 불교 동굴사원으로,

그 벽화와 조각상들은 세계 불교미술의 원류라고 함


 

 

 

**********************************************************

 

1200년만에 발견된 데칸고원의 불가사의

 

엘로라 석굴의 흥망성쇠를 직접 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2002년 3월9일 인도 불교 석굴사원의 백미로 꼽히는

아잔타로 갔다.

말로만 듣고, 사진에서만 보던 아잔타 석굴 아닌가.

가는 도중 내내 ‘아잔타’를 염송(念誦)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잔타에 도착하니 오후6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아잔타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말발굽처럼 흐르는 와고라강(江)을 낀 인디야드리 구릉 중턱에

조성된 아잔타 석굴은 보는 사람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홀했다.


입만 벌리고 그저 감탄만 연발했다. 마침 일몰(日沒)의 태양이

서쪽 하늘에 마지막 잔영(殘影)을 드리우고 있던 참이라

아잔타 석굴의 모습은 더욱 거대하고 성(聖)스럽게 다가왔다.

몇 가닥 남은 햇빛에 비치는 석굴 입구를 전망대에서 보노라니

갑자기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사라지는 듯 했다.

 “아! 잔! 타!”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한 때 무수한 수행자들이 거쳤고, 수많은 구도자들이 자신을

연마했을 아잔타.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아잔타는 지리적으로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州) 중북부에

있는 마을 이름이자, 석굴 이름이다.

어원학적으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안내한, 인도 델리대에서 힌디어를 전공한 박효택씨

설명에 따르면 ‘아(A)’는 ‘없다’는 뜻을 가진 부정접두사이고,

‘잔타(Janta)’는 ‘민중·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

때문에 ‘아잔타’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수한 구도자들이 머물렀을 이곳이 왜 ‘사람이 없다’는

‘아잔타’로 명명됐을까.

1819년 4월28일 마드래스 주둔 영국군 장교 존스미스에 의해

1,200년 만에 다시 발견됐는데, 당시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819년 영국군 장교가 발견


30분 정도 감탄에 빠져있다 깨어났다.

고개를 여전히 석굴 쪽으로 향한 채 우리들은 전망대에서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갔다.

인도인들이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일하다 말고 이방인에게

말을 거는 인도인들을 뒤로 한 채 산길을 걸었다.

약30분 정도 걸으니 우리나라의 정자(亭子) 비슷한 전망대가

보였다. 조금 전 내려온 전망대는 무엇이고, 지금 도착한

전망대는 무엇인지 의아해 박효택씨를 쳐다보았다.

“우리들이 내려온 전망대는 인도 정부가 새로 만든 것이고,

도착한 이곳이 1819년 영국군 장교가 아잔타를 발견한

바로 그 자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당시 호랑이 사냥을 하던 영국군들은 사냥감인 호랑이가

갑자기 사라지자 찾기 시작했고, 전망대 맞은편 언덕에

호랑이가 들어간 큰 구멍을 발견했다.

아잔타석굴 제10굴이었다.

 

 

 

<아잔타 석굴 외벽 불상

조각>

  아잔타를 주시했다.

  전망대에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석굴을 쳐다보았다.

  과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에

  석굴을 조성했을까.

  불교는 언제 이곳에 전파됐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남인도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대개 기원전 2세기 이후의 일.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들이 있지만,

  팔리어 역사서 즉 남전(南傳)엔 아쇼카왕

  (기원전 268-232 재위)이 남인도로 전도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인도에 불교가 전파됐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원전 2세기 경 이후의 것들만 발견되고 있다.


  아마도 부처님 입멸 후 스님들은 교역상인들과 함께

  남인도로 내려가   불교를 전파했을 것이다.

 

남인도에 간 스님들은 처음엔 북·서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돌·벽돌·나무로 비하라(사원)를 건립했으리라.

내려오는 스님들이 점차 많아지고 승단에 귀의하는 신도들이

증가하자, 스님들은 서부 데칸고원을 남북으로 가르는 가츠산맥

구릉에 석굴들을 개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 초부터 기원후 7세기 경까지 900개가 넘는

석굴들이 데칸고원 일대에 조성됐다.

아잔타도 이 때 만들어졌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아잔타 석굴 개착에 드는 비용은 누가 댔을까” 하는 점 등이다.

아잔타 석굴의 규모·구조로 보면 개착하는데 족히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걸렸을 텐데….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굴원의 설계도는 미리 결정돼 보시할

사람에게 제시됐고, 교단은 담당 스님-영사(營事) 비구라 한다 -

선정해 공사 추진과 자금 등을 맡겼다.

하나의 굴원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기간은 - 표준적인 것을

기준으로 - 최소 10년이라고 한다.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 사람 또는 한 단체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겠고,

많은 사람들이 정재(淨財)를 모아 완성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수많은 사람들의 보시로 만들어졌겠지만, 무엇보다 당시

무역상·왕족들의 보시가 석굴개착에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의 불교학자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가 지은 <인도불교〉

(정호영 번역. 민족사 간행)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 인도 정치상황은 대단히 혼란스러웠음에도,

상업과 무역은 반대로 융성했다.

알렉산더왕 이후 계속된 이란계 이민족의 인도 침입·정착으로

세계가 확대되자, 문화의 차이를 보완하는 물자교환이 증가되거나

촉진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교역을 위한 교통로도 정비됐다.

당시 서방세계와의 교통은 서북인도의 탁샤실라(현재 파키스탄

탁실라)를 거점으로 하는 육로도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는

해외교역도 발전했다.


수백년에 걸쳐 거대한 불사 완공


서방세계와의 해외무역은 주문생산·가공·교역술 등도 발전시켰다.

인도 내 길드조직이 정비됐고, 생산품의 품질·가격이 관리됐으며,

노동규칙 역시 확립됐다.

길드와 카스트제도가 결합됐기에 노동자들도 안정적으로 공급됐다.

조선기술과 항해술도 진전돼 인도 서해안 지역은 서방무역으로

활황을 누렸다. 자연히 인도 내륙의 여러 도시들도 융성하게 됐다.

상공업이 신장되자 부를 축적한 왕족·귀족·대상인 계급이 대두됐고,

물자를 가득 실은 대상(隊商)들이 중·서 인도에서 데칸고원 서부의

상업·항구도시로 왕래했다. 스님들도 이들을 따라 서남인도로

내려갔다.


인도와 서방세계의 교역은 7세기 경까지 계속됐다.

기이하게도 서부 데칸 석굴사원의 성립과 발전은 인도 해외무역의

융성·몰락과 거의 때를 같이 했다.

석굴사원 주변에 붙어있는 수많은 봉헌자 명문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는데, 불교 굴원을 개창하고 유지한 사람들이 부(富)를 배경으로한

상인·왕족·귀족이었음을 명문들은 전하고 있다.

농민을 포함한 일반 민중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은 거의 없다.

일본의 불교학자 사쿠라베 하지메(櫻部 建)는 〈원시불교와 부파불교〉

에서 “굴원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중심이 된 기부자들은 남쪽

통상로를 왕복하는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쏟은 정성은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무역상·왕족 지속적으로 보시


생각을 접고 아잔타 석굴로 나아갔다.

존 스미스가 석굴을 발견한 곳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내려와 와고라강을

건넜다. 건기(乾期)라 강바닥엔 물이 없었다. 건너편 아잔타 1굴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벌써 오후7시30분이었다.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 앞에서, 어둠 속에 서서히 감춰지는 아잔타 석굴을

보았다. 29개의 굴. 참으로 대단한 인류의 문화유산 아닌가.

언제쯤 파기 시작했을까. 자연스레 또 ‘굴의 역사’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부처님과 암베드카 박사상>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이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로 가는 도중 만나는 마을에 있는 부처님(왼쪽)과 암베드카 박사상.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현대불교의 부흥자이다.

  인도석굴 개착은 대략 3기로

  구분된다.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를 제1기,

  기원전 1  세기~기원후 3세기를 제2기,

  4세기 이후를 제3기로 나눈다.

  아잔타 석굴도 마찬가지다.

  조성 시기에 따라 아잔타 석굴도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속하는 것들로 중앙의 제8굴~13굴까지의

  6개굴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제9굴과 제13굴은 차이탸굴

  (내부에 스투파가 있는 예배당)이고,

나머지는 비하라굴(僧院窟)로 스님들이 살았던 곳이다.

제2기에 속하는, 4세기에 시작된 굽타왕조 당시 개착된 아잔타 석굴은

제6굴, 제7굴, 제14굴~제20굴까지 9개의 굴. 이 중 제19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탸굴이다. 나머지 제1굴~제5굴, 제21굴~제29굴은 제3기

즉 굽타시대 이후 조성된 석굴들이다.


내일(3월10일)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어둠이 완전히 사방에 깔렸다. 아잔타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계단을 따라 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니 상점들이 연달아 있다.

상점만이 아니고 물건 파는 사람들도 줄지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집요하게 호객행위 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어둠이 쌓인

와고라강 계곡을 보며, 내일 다시 만날 아잔타 석굴을 생각하며,

투어리스트 방갈로에 들어갔다.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1. 아잔타 석굴 ②

 

첫 굴원서 만난 초전법륜 부처님


 

<아잔타 석굴 외벽 조각>

  차이탸굴인 19·26굴 압권


  28굴 위 구릉부터 차례로 돌아 1굴 쪽으로 나아갔다.

  아름다운 아잔타 석굴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느긋하게 구릉 위를 걸었다.

  석굴 뒤 쪽 구릉을 40분 정도 걸어 제1굴 앞에 있는

  매표소에 도착했다.

  1인당 250루피(약 5달러 = 6,000원. 1달러 = 47루피)를

  주고 입장권을 샀다. 인도 돈으로 치면 거금인 셈이다.

  검표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굴원(窟院) 구역에 첫 발을

  내디뎠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발끝에 느껴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1굴로 들어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입구에 차양이 쳐져 있었다.

  연꽃을 들고 있는 유명한 ‘연화수(蓮華手) 보살’

  (파드마파니)과 금강저를 쥐고 있는 ‘집금강(執金剛)

보살’(바즈라파니) 등 벽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란다. 들어가는데 검표원이 “절대로 카메라

후레쉬를 터뜨려서는 안 된다.”며 강한 주의를 줬다. 차양 때문인지 굴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대신 참배객과 관람객들을 위한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아잔타 석굴 여신상>

  시계방향으로 굴 안을 돌았다. 언뜻 보니

  엘로라 석굴과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볼수록 “과연 대단하다” “아잔타는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굴은 그만큼 정교하고 거대하고 웅장했다.

  불교사의 전개 및 개착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영광’이라 할만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잔타 석굴은 조성 시기에

  따라   보통 3기로 나눠진다.

  제1기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속하는

  것들로   중앙의 제8굴~13굴까지의 6개굴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제9굴과 제13굴은 차이탸굴(내부에

  스투파가 있는 예배당)이고, 나머지는 비하라굴

                                                       (僧院窟)로 스님들이 살았다.

4세기에 시작된 굽타왕조(기원후 320 ~ 500) 당시 개착된 제2기 아잔타 석굴은

제6굴, 제7굴, 제14굴~제20굴 등 9개 굴. 이 중 제19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탸굴이다. 나머지 제1굴~제5굴, 제21굴~제29굴은 제3기 즉 굽타시대

이후 조성된 석굴들이다.


아잔타 석굴들은 본래 기원전부터 조성됐지만, 제3기 석굴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굴원(窟院)이 만들어지고 조각과 벽화도 제작됐다.

굽타왕조와 인척관계에 있던, 당시 데칸고원 일대를 지배한 바카타카 왕조의

보호가 굴원 개착에 큰 힘이 됐다.

특히 6세기 이후 석굴 개착 기술이 진전되고, 대승불교가 정착하여 많은

불·보살상이 대두됐다. 동시에 힌두계의 여러 신들도 불교에 도입되는 등

‘불교 판테온’이 확립돼 갔다.

불교 판테온(원개건축)이 확립되자 승원(僧院) 구조도 표준화됐고,

승원 입구나 내부에는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의 벽화·조각이 조성됐다.

아잔타 제1굴은 그런 굴을 대표하는 실례에 해당된다.

 

 

<아잔타 위치도>

  시계방향으로 제1굴을 계속 돌았다.

  사각형으로 배치된 기둥들에 의해

  내실·외실로 구분된 중앙 홀이 보였다.

  넓은 홀의 세 방면엔 승방이 있고,

  정면 벽 중앙에 전실(前室)과 불당(佛堂)이

  자리 잡고 있다.

  홀에서 전실을 거쳐 불당 내부를 바라보았다.

  ‘가르침을 널리 펴는 손 모양’(전법륜인)을 한

  부처님이 그곳에 계셨다.

  대좌 아래쪽에 법륜이 있고, 법륜 주변에

  사슴과   신자가 새겨져 있다.

  사르나트에서 첫 가르침을 펴는 초전법륜

                                                            (初轉法輪) 장면을 조각한 것이 분명했다.


6세기 이후 석굴기술 크게 발전


홀 중앙에 무릎을 꿇고 삼배 드렸다.

부처님의 첫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찌 불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불교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까지 전래될 수 있었겠는가. 초

전법륜은 따라서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아잔타 제1굴에 첫 설법을 펴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불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금줄이 쳐져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서는데, 좌우 벽에 ‘연화수보살’과

‘집금강보살’ 벽화가 보였다. 너무나 선명했다.

조명에 비친 두 보살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했다.


제2굴로 가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훨씬 따가워져 있었다.

동선(動線)을 따라 2굴부터 10굴까지 연이어 돌았다.

들어가는 석굴 마다 벌어지는 것은 입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감탄뿐이었다. “이렇게 성스러운 예술을 인간이 조성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만 들었다.

벽면과 기둥에 그려진 벽화도 눈길을 붙잡았다.

천불동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부처님을 그려놓은 석굴도 있고,

기둥마다 부처님을 묘사해 놓은 석굴도 있었다.

모든 굴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잔타 석굴 벽화>

  11굴, 12굴, 13굴, 14굴, 15굴,

  16굴, 17굴, 18굴을 거쳐 아잔타 제일의

  차이탸굴인 19굴에 들어섰다.

  순간 숨이 막혔다. 화려한 조각의 스투파,

  스투파 전면에 두드러지게 조각된 불입상

  (佛立像), 스투파를 중심으로 주변에 세워진

  기둥들 등 전형적인 차이탸굴이었다.

  기둥 돌을 손으로 만졌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1,400년 전 기둥을 만든 석공의

불심(佛心)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중앙 홀에서 스투파 전면에 두드러진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가사를 두 손으로 잡고, 천진한 미소를 띤 부처님이 거기에

서 있었다. 기둥들을 시계방향으로 돌아 20굴로 향했다.


1400년전 석공의 불심에 감동


감탄은 계속됐다. 21굴 ~ 25굴을 지나 26굴에 들어서는 순간 또 한번

크게 숨이 막혔다. 스투파와 전면에 두드러지게 조각된 불의좌상

(佛倚坐像), 기둥으로 구분된 측랑 벽에 조각된 열반상이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불의좌상의 나발은 살아있는 듯하고, 감겨진 눈은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 미남이었다.

보고 또 보아도 지겹지 않았다. 스투파를 돌아 측랑으로 갔다.

열반상이 그곳에 있었다. 쿠시나가라에서 입적한 부처님을 묘사한

열반상.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오른 손을 머리 밑에 대고, 왼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입적한 부처님을 조각한 세계 최고 걸작의 하나.

무수한 제자들이 입적한 부처님 앞에서 오열하고,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다 존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28굴을 지난 다시 1굴 쪽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에 들어왔는데 태양은 어느 새 서쪽에 가 있었다.

인도 불교 석굴을 대표하는 아잔타.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 속하며, 데칸고원 북서쪽 끝에

자리 잡은 아잔타.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에서 106㎞,

잘가온 역에서 50㎞ 지점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1세기

부터 기원후 7세기 사이에 조성된 인도 불교석굴을 대표하는

석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어둠에 묻혀가는 와고라강을 쳐다보며 아잔타가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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