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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야마구치 6 - KBS 는 징비록을, NHK 는 하나모유(花燃ゆ) 를 방영하다!
해방 70주년에 한국의 KBS 에서는 유성룡의 “징비록” 을 방영했는데 비해..... 일본 NHK
는 “하나모유 (花燃ゆ, 꽃 타오르다)” 를 택했으니, 그 무대인 조슈번(야마구치현)
모리씨의 옛 수도인 동해 바닷가의 야마구치현 하기(秋 추) 시에는.... 언덕에
하기성 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사무라이촌 이 있으며 강 건너에 마쓰모토촌 이 자리합니다.
메이지 유신 과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조선 합병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는 군국주의
일본 에서, 전후 자민당과 보수 우익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신조 총리 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점에서 만나는 인물 이 있으니 요시다 쇼인 입니다!
2013년 8월 13일에 아베 신조 (安倍晋三) 현직 일본 총리가 하기시 마쓰모토촌 에
“쇼인신사 (松陰神社)” 를 전격 참배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쇼인신사 는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을 기리는
사당으로 요시다 쇼인은 1830년 태어나 1859년 29세로 막부에 의해 처형 되었습니다.
요시다 쇼인 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 (征韓論) 을 세우고 대동아공영론 의
창시자로, 다카스키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등 제자들 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로
성장했으니..... 제자의 70% 는 마쓰모토촌과 하기성(秋城) 아래 무사촌에 거주
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를 일본에서는 “천시와 지리 및 인덕” 을 갖추었다고 얘기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한 신분 이라 신분 질서가 무느지는 개화기 에 태어난게 천시 요,
요시다 쇼인의 쇼카 손주쿠 학숙 앞에 살았기 때문에 입학할수 있었으니 지리 요
또 학숙에서 다카스키 신사쿠 를 만났으니 늘 함께 다니며 처신을 배운게 인덕 이라!
요시다 쇼인 은 존왕양이파 로 고향 마을에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라는 학숙을 세워
1년 반 짧은 기간에 무려 90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 이 됩니다.
다다미 8장 의 작은 학숙에서 참의 2명, 총리 3명, 대신 3명이 나왔고 그 계보를 따라
총리 2명이 나오며 전후 3명등 모두 8명의 총리 가 배출되고 4성 장군 이 수없이 탄생합니다!
요시다 쇼인 은 1830년 조슈번 하기의 스기가에서 출생해 녹봉 57석 요시다 가문
에 양자 로 가는데, 6세 때 양부가 사망하니 숙부로 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으니.... 불과 10세 때 번의 교육기관인 명륜관 교단 에 서고
11세 때 번주와 중신 앞에서 유학을 강론 하니 세상에 천재로 명성 이 알려집니다.
21세때 국학자 아이자와 야스시 가 쓴 “신론” 을 읽었는데... 서양은 먼저
통상을 통해 상대국의 동정 을 엿보다가 틈이 보이면 군사적으로
침략 하고.... 그게 불가능하면 기독교를 전파해 민심을 동요 시키니
일본의 정체성인 신도등 국체 확립을 호소 하는 내용이라 큰 감화를 받습니다.
1851년에 참근교대를 가는 번주를 따라 에도(도쿄) 로 상경해 사쿠마 쇼잔 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쇼잔은 서양의 침략에 대비 하기 위해 해군을 강화 해야 한다는 海防(해방) 론자 였으니...
사쿠마 쇼잔은 요시다 쇼인과 메이지유신을 중재한 막부 해군총독 가쓰 가이슈를 제자로 기릅니다
그외에도 메이지 유신 막후 설계자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에다가 나가오카(니가타)
번의 수석 가로 가와이 쓰구노스케와 고바야시 도라사부로 등 제자를 배출
했는데 현재는 개국이 불가피 하니 "서양을 배워 서양에 대적"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쇼인 은 1851년 12월에 번주의 허락도 없이 동북 지방의 미토번(이바라키현 중북부) 에 들러 신론의
저자 야스시 를 만나는데... 탈번한 사실을 조슈번에 자수해 하기에서 처벌받고 근신 합니다.
일본은 270개 번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니 이웃번을 방문 할때는 사전에 번주 허락 을 받아야 했습니다.
1853년 번에서 사면 을 받은 후에 번주 허가를 얻어 10년간 일본을 유람할 때 에도(도쿄) 에서
미국 페리 제독의 구로후네 (흑선, 증기선 군함) 를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습니다.
1854년 1월 미국의 구로후네 7척 이 다시 도쿄 가나가와에 출현 하자 스승 사쿠마
쇼잔의 격려를 받고 밀항 을 시도하나....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미국의 거부로 실패 합니다.
그런데 새벽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냥 가면 되는데 정직 을 생명으로 생각하는
성품 탓인지.... 궂이 에도 봉행소 에 출두하여 자수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처형 당하기 직전에 스승 사쿠마 쇼잔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자.... 에도 막부도
저명 인사 쇼잔을 죽일수는 없으니, 쇼잔은 9년간 유폐생활 하다가 양이파에게 암살 됩니다.
사쿠마 쇼잔 을 암살한 자객 은 강경 양이(攘夷) 파 인 검객 가와카미 겐사이 로
훗날 애니메이션인 “바람의 검심” 의 주인공 히무라 겐신의 모델 이 됩니다.
요시다 쇼인 은 몇달 후 에도 감옥에서 조슈의 하기 노야마옥 으로 이감되었는데
수감 중에 600권의 독서 를 했다니..... 한달에 무려 40권씩 읽은 것이라?
“지사는 불망재구학하고 용사는 불망상기원” 이라!!! ( 뜻을 가진
선비는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사는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
맹자 가 벼슬길에 나가라는 진대에게 공자의 말을 빌려 대꾸한 것으로 이때의 독서로 깨우쳐
요시다 쇼인이 즐겨 인용하니...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이르러서도 야스쿠니 신사 에
쇼인의 동상이 모셔지고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 의 극진한 숭앙을 받는 것이지요?
그는 학문에는 알고 실행하는 것이 사나이의 길 이니 “자신의 일생이 한편의 시” 가 되도록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처럼! 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중세 이후 일본에서 주군을 위해 죽은 무사는 수천명 이 넘지만 모두 번주인 다이묘에
대한 충성 이고 천황(일왕)을 위해 죽은 무사는 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단 한사람 뿐 이라던가요?
쇼인은 노야마 감옥 에서 수인들을 상대로 하이쿠와 서도 및 맹자 를 강의하던 중에
번주 모리 다카치카 는 1855년 12월 15일 주거를 본가로 제한해 석방 합니다.
해서 1856년 3월 부터 외부 제자를 받아들여서는 역성혁명론 탓에 금서 인
맹자 를 강의하며 일군만민론 (군주와 백성이 서로 분리된 적이 없다) 을 주장합니다.
맹자(孟子) 진심 하편 에 “제후위사직이면 즉변치” 라! ( 제후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면 갈아 엎어야 하니, 막부의 쇼군도 일왕(천황)의 신하인 제후 로 보았습니다!)
드디어 1857년 연금이 해제되니 11월 5일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학숙 을
개설하고 훗날 4천왕이라 부린 조카 요시다 도시마로,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에 및 이리에 구이치 를 포함해 90명의 제자 를 배출하는데...
1858년 12월 26일 막부에 대한 반역의견 개진으로 노야마옥에 수감 되니 문이 닫힙니다.
1858년 2월 막부의 다이로인 훗타 마사요시 는 미국과의 통상 협상인 시모다조약 을 쇼군을
거쳐 막부 창설이래 처음으로 천황의 칙허를 요청하나 예상외로 고메이왕(천황)이
거부 합니다. 4월 새 다이로에 오른 이이 나오스케 는 독단으로 조약을 반포하고....
반대파에 대해 교토에서는 마나베 아키카쓰 가 "안세이 대옥" 이라 불리는 숙청을 단행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를 뒤집어 엎는 거사를 결심하는데 막부가 에도(도쿄)에서 우메다 운빙
을 체포하니 요시다 쇼인이 3년 전에 후쿠이현 오바마번을 방문해 운빙을 만난게
드러납니다. 이에 막부가 참고인으로 요시다 쇼인을 소환 하자 그는 난데없이
막부를 타도할 준비 를 했다는 진술을 하고 처형 되니 일부러 죽어 불쏘시개 가 된 것이라?
마치 두꺼비가 새끼 를 낳을 무렵이 되면 일부러 능구렁이를 도발해 스스로 죽어 구렁이
배속에서 새끼 를 낳으면 새끼는 구렁이 살을 파먹고 성장 하는 것이라!
이런 장면은 내가 어려서 진주시 농촌에 살 때 우리 집 마당 구석에서 실제로
본 광경 이라 지금도 눈에 선한데... 박수진은 두꺼비와 구렁이 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옛날에 엄마 두꺼비 새끼를 낳을 때 자기를 먹어줄 구렁이를 찾아갔단다
구렁이 냉큼 먹어주지 않자 앞길을 막고 뺨을 때리며 약을 올렸지
제 몸 죽이지 않고는 자식을 낳을수 없어 구렁이 아가리 속에 몸을 던지는 거란다
두꺼비에, 독 때문에 구렁이도 죽고 주검 속에서 아기 두꺼비가 나와 생명을 이어간다
이때 에도에서 옥바라지하던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 가 스승에게 “ 남자가 죽어야 할
때” 를 물으니.... 10년 후에는 때가 온다고 지금은 살아 남으라고 타이릅니다.
그러면서 유언으로 “초망굴기론 : 막부 및 제번의 무사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신분에 관계없이 풀 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 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라!” 이라....
이 유언을 새겨들은 다카스키 신사쿠 는 4년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군함이 시모노세키시
를 포격하는 위기시에 하급 무사와 "평민들을 모아 기헤이타이 寄兵隊(기병대)" 를
창설하는 것이지요? 1968년 야마구치현(조슈) 출신 사토 에이사쿠 총리 는 쇼카 손주쿠
학숙 마당에 “메이지 유신 태동지지” 기념비를 세웠는데.... 글씨 또한 직접 쓴 것 입니다.
또한 요시다 쇼인은 “사규칠칙” 을 남겼으니.... 충효를 근본 으로 사무라이가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 중위도 애독 했다고 하는데, 입지론으로
시작해 “사이후이” 死而後已 (죽어서야 그만둔다 - 생명이 붙어 있는한 계속한다) 라!
자기는“유신의 씨앗” 이 되려 일부러 죽으면서도 제자에게는 살아야 한다고 말린
요시다 쇼인은 처형전에 5,7,5 조의 하이쿠로 된 절명시(絶命詩) 를 남깁니다.
身はたとひ 武蔵の野辺に 朽ちぬとも 留め置かまし 大和魂
이 몸이야 비록 무사시 들판에 썩어갈지라도, 남아의 혼만은 지지 않으리.
그외에 쇼카 손주쿠 학숙에는 “비이장목장” 이라는 공책이 걸려 있었으니 쇼인이 전국
유람 및 제자들이 외출시 보고들은 얘기들을 기록해 정보를 공유 했다고 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의 맹신자로 신공황후설 믿었으며.....
임나일본부 옛 영토(?) "조선을 취하는 것은 일본 국체의 완성"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고려 시대인 1145년에 김부식 이
쓴 삼국사기 와 1281년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 가 있습니다.
그에비해 일본 고사기 는 712년에 백제계 유민 오노 야스마로 가 지었고,
일본서기 는 덴무왕의 명으로 도네리 친왕등이 680년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서기는 황당무계한 위서 로만 취급해 번역본 조차 내지않고 있으나....
삼국사기가 1200년~ 2백년 후의 기록이라면 일본서기는 300년~당대 의 기록입니다.
한국 : 1145년 김부식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성왕(554)조 :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한국 : 1145년 김부식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 :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
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 : 720년 도네리친왕등이 엮은 일본서기 4권 19 欽明天皇(29대 흠명천황) Ⅲ : 성왕의 죽음
15년(봄 정월 무자 초하루) 백제가 중부의 목리시덕문차, 전부의 시덕 왈좌분옥 등을 축자(후쿠오카)에 보내
내신· 좌백련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간솔 색돈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內臣) 등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미리 군영(軍營) 을 쌓고자 합니다” 라 하였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고
하였다. 이에 내신(內臣) 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
고 대답하였다. 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장군 삼귀와 상부의 나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여름 5월 병술 초하루 무자 내신(內臣) 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의 영(領)인 물부 막기무련을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 관산성 管山城 충북 옥천) 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 물부 막기위사기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 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狛) 이 사라(斯羅) 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했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의 군사들이 와서 돕기를 바랍니다.
비단 2필, 탑등(毾㲪) 1영(領),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城) 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보냅니다.
(백제는 대가야군과 왜군 모노노베와 츠쿠시노등 원병을 합쳐 3만 대군으로 신라 관산성을 공격합니다)
여창(餘昌) 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 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 ) 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아버지 명왕은 전장에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의 말을 먹이는 노예 고도(苦都) 는 명왕을 붙잡고,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목을 치겠습니다"고 하였다. 명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의 머리는
노예의 손으로 자를수 없다" 고 하였다. 고도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에 의하면 맹서한
바를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노예의 손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당시 기록을 절반 이하로 줄여서 적었는데, 우리가 위서(?) 라는 "일본 서기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자세한 이유" 는.... 사건이 일어난 해가 554년이니 일본서기는 불과 166년 후의
기록 이지만, 한국의 삼국사기는 591년 후의 기록이라 당시에 사료가 대부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 초기 기록은 신화이며, 자기나라를 높이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으니 이를 걷어내고 읽어야...)
사서만 그러한가요? 우리 민족은 조선초 까지 우리 글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한자(漢字) 를
쓰고,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니 향찰과 이두 인데..... 시가를 지으니 향가 입니다.
1075년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에 11수, 1281년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14수 도합 25수
인데.... 일본은 759년에 엮은 만요슈(만엽집) 단 한권에만도 무려 4,500수 가 실려 있습니다.
한국 25수에 비해 일본은 속일본기 까지 포함해 5,000여수 인건 역시 한국은 수백년 후에야
책을 엮은 것이고 일본은 200년전 ~ 당대의 것으로, 만엽집 은 시기가 한국 보다 316년 ~
522년 더 빠릅니다! 현존하는 한국의 사서와 시가집이 일본 보다 수백년 늦은 데다가...
그 양도 빈약한 것이 노벨상 수상자 1명대 30명의 비율과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이방인이자 적국으로 원수의 나라 글자인 한자 를 받아들이는데
연나라가 고조선땅 2천리를 빼앗고 고구려도 244년 위나라 관구검 침공과 342년 연나라 모용황
의 침략으로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단기로 달아나니 왕비와 왕모에 국내성 백성의
대부분인 5만명이 포로가 되어 중국땅으로 끌려갔는데, 원수놈들의 한자가 뭐 그리 달가웠겠습니까!
걸핏하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조선인들을 죽이고 포로로 끌고 가는 적국의 글자인 한자는 상나라
사람들이 점을 치던 물건인 갑골문에서 시작된 것인데, 우리가 원수놈들의 유물을 받아들인건
한자는 책으로 전해지니..... 그 속에 음양론의 태극과 8괘에 12간지와 주역 및 사서삼경과 춘추에
사기등 역사와 관료제에 또 종이, 비단, 인쇄술과 달력등 선진문명이 담겨 있으니 불가피했나 봅니다?
쇼카 손주쿠 학숙 방에는 쇼인의 초상화가 놓여있고 그 옆에 “많은 책을 읽지 않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수 없고, 자기 자신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는 요지의 글이 있고
다른 방에는 얼굴 사진이 세줄 로 걸려 있으니 쇼인과 12명의 문하생으로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키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의 얼굴이 맨 위를 차지 합니다.
쇼인의 4대 제자 로 불리는 구사카 겐즈이 는 사쓰마번과 삿초동맹을 성사 시켜
메이지 유신의 토대 를 마련했는데,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후미와 결혼합니다.
해방(종전) 70주년인 2015년에 한국의 KBS 에서는 유성룡의“징비록” 을 방영했는데
비해..... 일본 NHK 에서는 “하나모유 (花燃ゆ, 꽃 타오르다)” 를 택했습니다.
한국은 해방(광복) 70주년 을 맞아 임진왜란 을 조명해 이순신을 띄우고자 했는데
일본은 메이지 유신 주역 들인 여기 "하기시 사람들" 을 불러냈던 것이지요?
하나모유(花燃ゆ) 에서 주인공인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후미 역은 이노우에 마오 가
맡았는데..... 구사카 겐즈이 와 결혼하나 남편이 메이지 유신 직전에 교토에서
막부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 하니 이후 후미는 파란만장한 삶 을 살아낸다는 줄거리 라!
구사카 겐즈이 바로 옆에 걸린 사진의 인물인 기도 다카요시 는 메이지 유신 3걸 이며
그 옆에 보이는 다카스키 신사쿠 는 과감한 결단과 행동으로 메이지유신 핵심 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줄 에 걸린 인물들은 메이지 시대 문무의 핵심이라는 이토 히로부미 와
육군의 교황 야마가타 아리토모, 명성황후 시해의 배후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입니다.
이들 인물 중에 메이지 유신을 이루는 1868년 이전에 죽은 자 로는 이리에 구이치,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요시타 토시마로 가 있고 그 이후 까지
살아 총리 가 된 자로는 이토 히로부미, 아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등입니다.
학숙을 중심으로 조슈번 출신이 참의(정승) 2명, 총리 3명, 대신 3명에 장군은 부지기수라!
일본 원수 7명중 3명, 대장 24명중에 8명, 중장 83명중에 25명, 소장 119명중에
28명이니 260개 번중 하나이고 인구로는 60분지 1 에 불과한 조슈번 에서 차지했으니 27% 라!
역사관을 돌아서서 나오다 보니.... 에마 檜馬(회마) 라고 해서 신사에서 보듯 소원을 적은
나무판 들이 걸려있는걸 보고는 그 뒷쪽에 요시다 쇼인 신사로 향합니다.
여기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를 본따 만든게....
마쓰시다 정경숙으로 경영의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松下幸之助) 가 설립합니다.
70억엔을 들여 1979년에 가나가와현 지가사키(茅ヶ崎) 시에 세운 사설 정치지도자
양성학교 로 2년 동안 가르치며 매달 20만엔의 생활비 까지 지급했는데....
명문대 출신 25∼ 35세를 대상으로 7∼8명의 소수 정예 인재 를 선발해 인간관ㆍ
국가관ㆍ역사관ㆍ일본 전통정신ㆍ정치이념ㆍ경영이념 등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2009년에 일본에서 자민당 으로 부터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가 일어나는데 하토야마
내각 에서 정무 3역 각료 중에서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은 모두 8명 이며....
8ㆍ30 총선에서 당선된 중의원도 초선 의원 8명을 포함해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상, 총무상 하라구치 가즈히로, 노다 요시히코 간사장등 31명 이나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