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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국보 제180호,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2. 18.
국보 제180호 세한도/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당해 살던 때에 그린 그림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책을 전해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그렸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으니 이익만을 쫓는 세상 속에서 이상적의 한결같은 선비정신을 높이 칭송하였다. 일제 때 후지즈카가 소장하다가 손재형이 양도받았고, 그 후 손세기에게 옮아갔다. 손세기의 사후 아들인 손창근이 소장해 왔다. 2020년 2월 손창근이 “귀중한 유물을 저 대신 잘 간직해주세요.”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국가의 소유물이 되었다.
1.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 세한도
1)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세로 23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을 빌려 그린 문인화이다. 긴 화면에 단지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과 그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을 뿐, 여백의 텅 빈 화면을 보노라면 한겨울 추위가 차갑게 느껴져 뼛속까지 시리다. 화면 오른쪽에는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란 관지(款識)에 정희(正喜), 완당(阮堂)이라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용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도 고담(古淡)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한도는 지극히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高拙)한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 간의 끈끈한 사제(師弟)의 정이 흠뻑 배어 있는데, 문인화의 인위적인 기교를 훌훌 털어 버리고, 자못 스케치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붓을 놀려 선비의 맑은 문기(文氣)가 넘쳐흐른다.
2)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으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켰던 것이다.
옛 말에 ‘상갓집 개’라는 말이 있다. 대감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이으나 정작 대감이 죽으면 대문이 쓸쓸하다 하여,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상인심을 빗댄 말이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는데, 제주도로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1844년이며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송백(松栢)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마음을 담은 발문(跋文)을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소나무는 책을 구해준 이상적의 지조를 뜻하고, 잣나무는 금번에 또다시 책을 구해다 준 절개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김정희는 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발문 해석]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금년에는 또 우경(藕耕)과 문편(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데,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사 나에게 얻어 보게 했으니 한 때의 일이 아니다. 세상인심은 도도(滔滔)하여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마음과 힘을 허비하면서 권세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내 바다를 건너 초췌하고 여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서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컬어 태사공[司馬遷]은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함께 갖은 사람이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소원해진다. ’라고 하였다. 그대도 역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일진데, 스스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빠져나와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으니,(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백이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고 날씨가 차가워지기 전에도 송백이요, 차가워 진 후에도 송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특히 날씨가 차가워진 후를 칭송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적에 그대를 위해 잘해 준 것도 없고, 뒤(유배시)에도 덜 생각해 준 것도 없다. 그런 연유로 전(권세가 있을 때)에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는데, 그대는 훗날 성인의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인가. 성인이 특히 칭송하기를 시들지 않는 정조와 굳은 절개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때가 되어야 송백의 정조와 절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洛陽]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을 적엔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같은 어진 사람도 그 빈객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으며, 하비(下邳)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문(榜文)을 붙인 일은 세상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한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 노인 씀
去年 以晩學(1)大雲(2) 二書寄來,今年 又 以藕耕(3)文編(4)寄來此皆 非世之常有購之千万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 歸之海外 蕉萃枯槁之人(5)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 云‘以權利合者 權 利盡而 交疏’(6)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趨超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那. 太史公之言 非那 孔子 曰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7) 松柏是毋四時 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令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亦可見稱於聖人也那.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 貞操 勁節 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 汲(8)鄭(9)之賢 賓客 與之盛衰 如下邳榜門(10) 迫切 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1)만학(晩學):요춘(姚椿)이 지음. 요춘은 자가 춘목(春木), 자수(子壽)이고 호는 만학재(晩學齋)이다.
2)대운(大雲):[大雲山房文集]의 준말로 청나라의 학자며 문인인 운경의 문집이다. 운경(1757~1817)은 자가 자거(子居)이다.
3)우경(藕耕):청나라 장기(張騏)의 아내인 전박(錢璞)의 문집. 호는 연인(蓮因), 우경연관(藕耕硯館)이고 그녀는 화초 그림을 잘 그렸다.
4)문편(文編):명나라 당순지(唐順之)가 편한 책이름. 64권으로 문장정종(文章正宗)으로 불린다.
5)초췌고고(蕉萃枯槁):초췌(마르고 파리한 모양) 고고(1.나무가 마름 2.말라 쇠약해짐 3.생기가 없음 4.몸이 여임)
6)以權利......:太史公 自序에 나옴
7)歲寒然後....:논어 [子罕]편 27장
8)급(汲):급암(汲黯)을 가리키며 사기열전 제 60권에 나온다.
9)정(鄭):정당시(鄭當時)를 가리키며 사기열전 제 60권에 나온다.
급(汲)과 정(鄭)의 인용은 현명한 사람도 권력에 있을 적엔 빈객이 열 갑절 불어나지만 권력이 없는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함.
10)하비방문(下邳榜門):사기열전 60권의 끝부분에 하비(下邳)의 적공(翟公)이 말하길 ‘처음에 내가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문 앞에 가득 찼다. 그러나 벼슬이 떨어지자 대문 밖에다 새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사람이 드물었다. 내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빈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내가 대문에다 이런 글을 써 붙였다. ‘한번 죽었다가 한번 살아나 사귀는 정을 알게 되고, 한 번 가난했다 한번 부유해져 사귀는 태도를 알게 되고, 한번 귀했다 한번 천해지니 사귀는 정이 드러났다’라는 뜻을 인용한 것이다.
3)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로는 안동 김씨의 계속된 세도 때문에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김정희는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더욱 몰두하다 71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묘 앞쪽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히 구부러진 반송이 서 있는데, 혼탁한 세태에 김정희의 예술 정신을 청아하게 일깨우는 듯 하다.
김정희의 묘(충남 예산)/비문에는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 쓰여 있고, 밑 둥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위로 뻗은 소나무는 혼탁한 세상에 추사의 청렴한 예술 정신을 일깨우는 듯하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16명의 명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림을 칭찬하는 찬시(贊詩)를 지어 그림 끝에 붙였고, 그 후 김정희의 문하생이던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그림에 대한 감상문) 등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2.국보를 찾아왔노라
1)이상적이 소장하면서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청조문화동전(淸朝文化東傳)의 연구(硏究)」, 원제는 ‘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들어갔다. 세한도가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신발이 해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양보해 달라고 매달렸다.
2)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요, 대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서화의 감식에도 뛰어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과 비견되는 대단한 안목으로 평가받고, 고서화로는 일제 때에 전형필 다음가는 대수장가로 주목받았다.
손재형/진도의 갑부 아들로 태어나 그림과 서예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수많은 고미술품을 수집했으나 정치에 투신하면서 모두 처분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장인의 예술 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추기는 데는 그 시대, 몇 안 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 문화재 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고서화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하여 어느 날 전형필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간송(전형필의 호)이 골동은 나보다 낫지만 서화는 나만 못할 것이오.”
이런 손재형이 아직 경성대학교에 재직하던 후지즈카를 찾아가 세한도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후지즈카 상, 제가 심혈을 기울여 글도 써 주고, 물론 상당한 대가도 치르겠습니다. 양도해 주시지요?”
서화라면 미전에 입상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손재형이었다. 또 당시 소장하던 상당한 양의 고미술품으로 서도 박물관을 지을 꿈도 꾸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즈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추사 연구로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요. 그런 사람으로 추사의 걸작 한 점이 없다면 누가 나를 인정하겠소. 물러가시오.”
그리고는 1944년, 시국이 어수선한 판국을 틈 타 일본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세한도를 반드시 되찾고 말겠다던 손재형의 집념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 역시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死地)였다.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 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말이 병문안이지 사실은 세한도를 문안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목적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매일 눈만 뜨면 찾아가 인사를 하기를 일주일, 수상히 여긴 후지즈카가 드디어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요?”
기회를 엿보던 손재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무겁게 털어놓았다. 얼굴에는 비장한 의지가 감돌았다.
“세한도를 양보해 주십시오.”
“뭐요? 그 그림은 내가 정당하게 입수한 물건이요.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후지즈카가 일어나 앉았다. 눈빛에는 추호의 양도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재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 그림에는 추사와 제자 사이에 뜨거운 사제의 정이 흐르고, 또 조선 선비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 있어야 할 물건은 아닙니다.”
“나는 추사 선생의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요. 나의 학위논문이 무엇인 줄 아시오?”
후지즈카는 서재에 들러 포갑이 잘된 상자를 꺼내 왔다. 손재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뚜껑이 열리자 그 속에는 약간 색이 바란 책자가 있었다. 책을 꺼낸 후지즈카가 손재형 앞으로 밀자, 제목을 본 손재형은 가슴이 턱하고 막혀 왔다. ‘이조에 있어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었다.
“후지즈카 상, 당신이 아무리 세한도를 아껴도 당신은 결국 일본인이요. 당신만은 세한도를 돈덩이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신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오. 명품에는 그 격에 맞는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요. 세한도의 진짜 주인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요. 이 점을 생각해 주세요.”
“일없소. 동경 사정이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빨리 돌아가기나 하시오.”
손재형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 집을 나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들리고 거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손재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지독한 상황까지도 각오한 그였다.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가 세한도를 양보해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백 여일 가까이,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손재형의 열성에 후지즈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소. 하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을 하겠소.”
긴장한 손재형을 후지즈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거든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 주라고 하리라.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주시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손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동경의 전세는 날이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그 와중에 세한도가 온전히 살아남을 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려왔다.
“후지즈카 상, 기왕에 넘겨주시기로 결심했다면 당장 넘겨주시지요.”
그러자 후지즈카는 단호하고도 매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림없는 말,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물러가시오.”
손재형은 다시 후지즈카의 집을 물러 나왔다. 그러나 승부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마지막 조율을 가다듬은 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후지즈카에게 문전 축객을 당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생각하고,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굳게 닫혔던 후지즈카의 집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세한도를 펼친 채 마지막 인사를 하는 후지즈카의 눈에 회한의 빛이 가득 비쳤다. 손재형 역시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되 말고는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정희의 혼이 배인 명품이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손재형이 얼마의 돈을 주고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만약에 그때 세한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랑스런 국보 한 점을 영원히 잃을 뻔하였다.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그 즉시 오세창에게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배관기를 써 주었다.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 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 왔노라.”
3.바람처럼 옮아간 세한도
그러나. 세상 물건에는 모두 때에 따라 주인이 있는 법이다. 매일같이 쓰다듬고, 닦아주고, 천하의 지인(知人)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고미술품도 세월의 냉혹함은 견디기 어렵다.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찾아온 세한도도 그 후 너무나 어이 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을 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일약 정치가로 활약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 만큼 그 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개성 사람, 이근태(李根泰). 그는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 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여보시오, 이 선생. 이 물건을 맡아 두고 돈을 좀 빌려주시오?”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원님. 그런데 언제 찾아 갈 것입니까?”
“허 허, 잠시 동안만 맡깁시다. 워낙 자금이 쪼들려 그러오.”
“알겠습니다. 의원님.”
이근태는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고 또 들고 온 고서화 모두가 국보급 미술품이라 남의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저당 잡힌 고서화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다.
인왕제색도/겸재가 76세 때에 그린 그림으로, 비 갠 후의 인왕산을 절묘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손재형이 소장했다가 자금이 쪼들리자 결국은 삼성의 이병철에게 옮아갔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웠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소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 180호로 지정 받았다.
또 당시 손재형이 소장해 이근태에게 저당 잡혔던 단원의 ‘군선도’와 김정희의 ‘죽로지실(竹爐之室)’, 일제 때 경성부사(京城府史)에 실렸던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은 새롭게 고미술품을 수집한 삼성 가의 이병철(李秉喆)에게로 넘겨져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다가 최근에는 서울 한남동 소재의 삼성미술관 이움으로 옮아가 전시되고 있다.
4.국가로 기증된 세한도
“귀중한 유물을 저 대신 잘 간직해주세요.”
2020년2월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손창근(92)씨가 유일하게 남긴 말이다. 이외에 기증에 따른 어떤 조건도, 예우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화재계 관계자들은 “문화재를 금전적 가치로 먼저 환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연의 가치만 생각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재청은 손 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손씨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의 영향이 컸다. 개성에서 이름난 인삼 무역상이었던 손세기는 평소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했지만 문화재를 구입하는 데는 아낌이 없었다. 그는 15세기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과 한국 대표적 서화가인 정선·심사정·김득신·김정희의 작품 등 국보급 유물 다수를 사 모았다. 손창근씨는 이런 선친을 따라다니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이후 1960년대 외국인 상사에 근무하던 시절 본격적으로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손성규 교수는 “두 분은 항상 집에서 문화재에 대한 얘기를 나누시곤 했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손세기는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 잡혀 있던 김정희의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를 큰돈을 주고 매입했다. 손창근씨는 김정희 예서의 대표작 ‘잔서완석루’를 구입 할 당시 현금이 부족하자 증권을 팔아 구입하기도 했다. 특히 ‘세한도’는 손씨가 “자식보다 귀하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큰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다. 아들인 손성규 교수도 세한도를 집에서는 딱 1번 봤을 정도였다. 지난 2018년 대를 걸쳐 수집해 온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304점을 박물관에 기증하면서도 ‘세한도’만큼은 끝까지 놓아주지 못했었다.
(참고:①「전통문화」‘86년 3월호. 윤명선 회고담, ②「현대서예의 이해」․정윤락저․서화인 발행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