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탈출기 3장을 보면 모세는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 종살이하던 그분 백성을 구해 ‘약속의 땅’으로 이끌도록 ‘파견’(mission)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조상들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탈출 2,24)하셨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하느님 명을 따르기 위해 파라오와 지난한 협상과 투쟁을 겪어야 했고, 결국 천신만고 끝에 ‘탈출’(ex-hodus)하게 됩니다. 탈출 이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까지는 직선거리로 걸어서 한 달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이집트 백성은 이후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게다가 모세는 요르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바로 앞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신명 34장 참조) 왜 하느님 선택을 받고, 평생 하느님을 위해 죽도록 힘을 다한 모세는 정작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신명기 3,23-29에는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모세가 요르단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또 다른 구절 역시 백성의 불신앙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시편 95,8) 성무일도에 자주 등장하는 이 구절은 광야에 머물던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민수 20장 참조) 과연 모세는 백성들의 불신앙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모세는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히브리 백성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오랜 종살이로 인해 노예근성이 삶에 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처지가 조금 편하면 만족했지만, 반대로 배고프고 힘들면 바로 불평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조금 살만해지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은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한 달이면 도달 가능한 여정인데, 광야에서 40년의 단련할 시간이 필요했고, 노예생활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죽고 사라진 후 새로운 세대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여호 3장 참조)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고, ‘호세아’,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약속의 땅’의 시작 지점이었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약속의 땅’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 하느님 백성’이 되고, 이들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집니다. 새로워져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광야의 히브리 백성처럼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몸을 통해 우리는 매일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2024년 7월 14일(나해) 연중 제15주일 서울주보 5면,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