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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묵상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 주님을 따라서 . 등 )
*** 05:40 ,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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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을 따라서>
주님
따르러
오롯한
마음으로
내딛는
나의 한걸음
그 앞에는
오직
앞서 가시는
주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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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 10. 04. 05:27
-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볼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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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오늘 <복음>에는 대조되는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세 가지 태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는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은 내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는 가지 못하게 하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이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역시, 당신을 진정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제자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를 더 앞세우는 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는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그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엇보다도 ‘앞서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이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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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과 천상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 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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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상상력 사전’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시각적인 언어를 표현의 준거로 삼아 말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주로 청각적인 언어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이며, 셋째는 감각적인 언어를 많이 구사하는 사람이다. 시각파들은 ‘이것 봐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빌려서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여 주고 관찰하며 색깔을 통해 묘사한다. 또, 설명을 할 때는 ‘명백하다. 불분명하다. 투명하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장밋빛 인생’이이라든가 ‘불을 보듯 뻔하다. 새파랗게 질리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청각파들은 ‘들어봐요’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들은 ‘쇠귀에 경 읽기, 경종을 울리다. 나발 불다’처럼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고, ‘가락이 맞는다.’라든가 ‘불협화음, 귀가 솔깃하다. 세상이 떠들썩하다.’같은 말들을 자주 쓴다. 감각파들은 ‘나는 그렇게 느껴, 너도 그렇게 느끼니?’하는 식의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들은 느낌으로 말한다. ‘지긋지긋해, 너무 예뻐서 깨물어 주고 싶어, 썰렁하다, 화끈하다. 열에 받치다. 열이 식다.’갈은 것이 그들이 애용하는 말들이다.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그 사람이 눈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요구했을 때 눈을 들어 위쪽을 보는 사람은 시각파이고,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은 청각파이며, 자기 내부의 느낌에 호소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낮추는 사람은 감각파다.”
무엇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기질을 타고 나는데 다른 것들을 포용하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관계를 맺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토마 사도는 시각파인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예수님께서는 그런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런가 하면 바오로 사도는 청각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 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 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의 다짐을 모아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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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카 모든 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충실히 따른 성인분들 중에 그 첫째 자리가 누구냐고 한다면 아마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이 거론될 것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이러한 질문에 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우리 가슴에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서로 형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화를 보면 많은 부분 새와 동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성인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은 모든 것에 사랑을 주셨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사랑을 체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모든 곳에서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과 합치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모든 것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중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동물은 사료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브리야사바랭-(프랑스 미식가)
지극히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했는데
이것이 명언이 되었습니다.
동물은 사료를 먹습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서 인간에 대한 고찰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언제 만들어 먹을지 고민합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허기를 채우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지성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동물과 달리 먹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지성을 더 나은 곳을 향하게 합니다.
음식도 그렇고 삶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늘나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하느님 계신 그곳이 우리에게는 더 나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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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는 운전해서 낯선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도를 보고서 경로를 미리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조수석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시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확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보지 않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제 보험 가입할 때 지도를 선물로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적의 정보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창기에는 검색 속도가 느려서 그냥 종이 지도 보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편합니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마 그만큼 내비게이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 불안해하지도 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비게이션을 신뢰하는 정도는 될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니라며 자기 편해 보이는 반대편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살겠다면서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첫 자리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장 정확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면서 함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작별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이 정도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을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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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주여, 이제 나의 회상과 고백을 원하시오니 이 마음을 굽어보소서. 그토록 차지던 죽음의 끈끈이에서 빼 주신 내 영혼, 이제 당신께만 붙게 하소서(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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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따름의 여정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이자, 요셉 수도원에 1988년 7월11일 부임하여 그해로부터 2023년 올해로 36회 맞이하는 제 영명축일입니다.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더불어 제 나이를 비교해 봅니다. 성인마다 생몰연대는 다 다릅니다. 산 햇수의 “삶의 양”이 아닌 얼마나 치열하게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았느냐의 “삶의 질”이 성덕의 기준임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44세를 사셨고 현재 저는 성인보다 30세를 더 살고 있습니다.
제가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을 때, 또 모든 이들의 삶을 통해 확인해 보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이들의 삶의 스토리(이야기)와 콘텐츠(내용)입니다. 사람마다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는 다 다르지만 시종여일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을 때 그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도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에 따름의 여정에 충실했을 때 참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애라는 것이며,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가 이의 참 좋은 모범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는 참 풍요롭고 흥미진진하여 끊임없는 영감의 샘이 됩니다. 제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집을 옮길 때 맨처음으로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인이요, 기후위기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시대, 최고로 각광을 받고 있는 성인이 바로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태양의 찬가의 주인공인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때로 저는 유쾌한 상상도 해보곤 합니다. 내 죽었을 때 장례미사 입당 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노래’로, 강론은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그리고 퇴장 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402장 성가를 부탁해두고 싶다는 유쾌한 상상입니다. 성인에 관한 몇가지 일화도 생각납니다.
1.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듯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했고 그가 남긴 말마디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2.그리스의 유명한 작가인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성자 프란치스코 전기 서문에 소개되는 내용입니다.
“나에게 있어 성 프란치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낸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3.얼마나 잘 준비된 죽음인지 깨닫게하는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전에 남긴 유언입니다.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4.성인이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시편141장입니다.
“주여, 이 몸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빨리 구하러 오시옵소서
내 항상 당신께 부르짖을 때마다,
이 목소릴 귀여겨 들어 주소서.”
5. 제 좋아하는 짧은 좌우명시 "산과 강"을 되뇌일 때마다 생각나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성 프란치스코”-
밖으로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성 프란치스코를 사는 것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의 소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제부터 계속이어지는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가 이뤄질 최종 목적지입니다.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파스카 예수님을 한결같이 충실히 따랐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통해 우리는 세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라!”
프란치스코 성인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로부터 배우는 진리가 주님을 향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이들의 삶전체가, 모든 수행이 일편단심 주님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느혜미아도 이에 해당됩니다. 느혜미아는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란 뜻이라 하는데 성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성인들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느혜미아의 주님 사랑은 예루살렘 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페르시아 임금과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느혜미아의 하느님 사랑은 예루살렘 도성의 재건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역시 주님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코의 사랑은 가난에 대한 사랑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나는 가난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고백대로 가난은 성인의 본질적 행로였으며, 성인을 따르는 공동체 형제들에게도 가난한 삶은 필수였습니다.
둘째, 집착하지 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집착에서의 해방이요 자유로운 이탈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는 진리입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의 세 지원자들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는 모르겠고 결국 응답은 우리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곳조차 없다.”-
세상 어느 장소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오직 주님 안에 정주처, 안식처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일체의 사람들로부터, 인간사에서 초연하라는, 사람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장소에 이어 사람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이래야 무관심이 아닌 애착이 없는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겠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과거로부터의 집착에서 결별을 뜻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긴박하고 절박한 절대적 요구인지 드러납니다. 장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과거로부터 이탈하여 애오로지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하라!
참으로 집착에서 자유로울 때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요 형제애의 발로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사랑하며, 세상 모두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자유로, 이웃에 대해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은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사랑의 삼중계명에 이름을 봅니다.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에 이어 자연사랑의 지구사랑이 추가됩니다. 사람 사랑은 “평화의 기도”에서 절정을 이루며, 자연사랑은 “태양의 찬가”에서 절정을 이루니 예수님은 자신을 완벽하게 보완해 준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고맙고 흡족하시겠는지요! 바로 이런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의 훌륭한 추종자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교황님의 기후위기에 직면한 지구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요즘 각광받고 회자되는 생태적 회개도 성 프란치스코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덕분입니다. 여기에다 요즘 회자되는 생태민주주의에 대해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자연 속에 겸손하게 깃들어 살아야 된다는 것, 자연을 어머니 품처럼 느끼면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야 된다는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풀뿌리의 겸손함(humilitas)이 필요해요. 그 풀뿌리를 지탱해주는 흙(humus)이 인간(homo)과 어원이 같아요. 그러니까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한 자세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요 이런 뜻에서 생태민주주의입니다.”
아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에 성 프란치스코의 생태영성, 생태민주주의, 생태적 회개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듯 이웃 형제를, 이웃 자연과 피조물 형제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삼중계명의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주님을 충실히 잘 따르도록 도와 주십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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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셔서
누구에게는 감추시고
누구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뒷부분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라고
표현하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두십니다.
하느님께 다가가기만 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이 말씀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지혜와 슬기를 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와 슬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하느님께 더 청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가난을 선택하고 겸손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가난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가난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가난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겸손입니다.
즉 가난과 겸손이 살아가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살아가는 것이
가난의 삶이고
겸손의 삶인 것입니다.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것처럼,
슬기로운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아서
우리가 부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드러낼 때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부족함,
인간의 나약함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 모습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부족함과 나약함을 지니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에서 오는 자유로움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안식이며
프란치스코가 살려고 했던
복음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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