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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노량마을에서 바라본 남해군 설천면 노량마을 전경. 후송 류의양은 나룻배를 타고 노량해협을 건너 적소인 남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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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글은 유배객의 유일한 존재 증명 수단이었다. 돌아올 기약 없는 길이었기에, 정치적 신원이 막연했기에 글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했다. 유배객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을 유언하듯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 후송(後松) 류의양(柳義養·1718~미상)의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은 이처럼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했다. 남해문견록은 5개월 남짓한 짧은 귀양살이를 담은 기록이지만 풍물과 언어, 민초의 애환과 정리 등 생동하는 남해의 속살을 곡진하게 풀어낸 한 편의 울림 큰 다큐멘터리다. 특히 국문학사상 최초의 한글 산문체 유배기행문이라 더 값지다. 남해는 맑고 푸른 풍광으로 후송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했고, 후송은 남해에 빛나는 인문을 수놓았다.
■충성과 신의가 가져온 풍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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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양이 쓴 '남해문견록' 영인본. |
후송의 유배 사유는 알 수 없다. '승정원일기' 영조 47년(1771년) 2월 17일 기록에 임금이 승전색(사소한 왕명을 출납하는 환관)에게 "류의양을 서인으로 만들어 남해에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정5품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하면서도 '서울과 시골에 집이 없어 동서남북으로 남의 집을 빌어 다닐' 정도로 청렴했던 것을 미루어 비리를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바닷배 건너기 처음이로되 구태여 무섭지는 아니하나 북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집과 조정)이 천 리 밖에 있는지라 뭍의 길에 올 적보다 마음이 다르더라." 후송은 유배령이 떨어진 지 9일 후인 2월 26일 오전, 경상도 하동과 남해 사이 노량해협을 건넌다. 54세의 적잖은 나이였다. '평생에 충성과 신의를 가졌으니 오늘날 풍파를 당하노라'는 옛사람의 글을 외우며 배에 오르는 후송의 모습은 자못 처연하다. 다행히 진도 울둘목(명량해협) 다음으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노량해협의 물결은 당시 잔잔했고, 당도한 남해 노량마을의 언덕에는 푸른 대숲이 울창했다.
지난 1일 찾은 노량해협의 수면은 그때처럼 잔잔했지만, 해협의 중심에는 곧 물밖으로 날아오를 잠룡이 물밑에서 꿈틀대는 것처럼 예사롭지 않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동행한 김성철 전 남해유배문학관장은 "물이 들었다가 빠지는 3~4시간만 물살이 세다"고 말했다. 노량마을에는 후송이 봤다던 넓은 대숲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객선 선착장을 벗어나 충렬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자암(自菴) 김구(金絿·1488~1534)의 적려유허추모비가 세워져 있었고, 그 뒤쪽에 대숲이 일부 남아 있었다. 김 전 관장은 "대나무를 베어내고 수종을 교체하면서 대나무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처자식 버린 한양·송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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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망운산. 금산과 더불어 남해를 대표하는 진산인 이 산은 남해읍을 굽어보고 있다. |
"서울이나 송도 사람들이 장사나 다른 일로 이 섬중에 와서 관비나 촌여자를 얻어 칠팔 년이나 십 년이라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혹 어버이가 있어도 아니 간다 하니 들음에 절통하고, 이런 풍속은 과연 금함 직하더라." 후송은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남해에 눌러앉아 사는 외지 남자가 많은 것을 목격하고 통탄한다. 첩을 얻은 것을 질투했다는 이유로 사복서리 남편에 의해 한양에서 남해로 귀양 와 10년째 동냥으로 연명하며 사는 여인의 사연도 전한다. 후송은 이를 두고 적소 주인집 기둥에 '부화부순(夫和婦順·부부 사이가 화목함)'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효자 이성삼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아버지의 상을 만나 산중에 초막을 지어 삼 년을 지내고…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전답을 사나 반드시 제 형의 이름으로 사는 문서를 하니 이웃 사람들이 말려 가로되 '장래 자식들이 서로 다투어 어지러워지기 쉬우니라' 하자, 성삼이 왈 '형이 가장이니 형의 이름으로 삼이 당연하고 장래 종제 사이에 전토로 싸움의 화근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 전토 있은들 무엇에 쓰리오?' 하더라."
후송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에도 눈을 돌린다. 한겨울에도 오십리(약 20㎞) 이상 되는 먼바다에 나가 전복을 캐는 보자기(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의 고초를 세세하게 전한다. "생복 따는 거동을 본즉 보자기들이 겨울이라도 옷을 벗고 물속에 개구리처럼 뛰어들어 거처 없이 빠져있다가 수식경이 지난 후에 도로 나와 바다 위에 뒤웅박을 대고 엎드려 숨을 겨우 쉬고 즉시 또 들어가 따내어 오니 극히 불쌍하고…."
■남해 사투리와의 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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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에 있는 읍성 잔해. 김성철 전 남해유배문학관장이 읍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후송은 뱀과 지네가 많은 남해의 환경이 못내 불편했다. 해서, 적소의 집주인에게 음식을 할 때 지네가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쓸 것을 당부한다. 그런데 주인은 "경지를 육궁 비질하니 염려 말으소서"라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지(정지)'는 부엌, '육궁'은 매양을 뜻하는 것으로, '요리할 때마다 매번 부엌을 비질한다'는 말이다.
후송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이뿐 아니었다. "'너희'를 '늑의'라 하고, '저희'를 '즉의'라 하고, '계집아이'는 '가산아애'라 하고, '오라비 아내'는 '올케'라 하고, '아직'을 '당사'라 하고, '기러기'는 '글억'이라 하고, '병아리'를 '비가리'라 하고, '옷'은 '볼모'라 하고…." 후송의 해득 불가 단어 열거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랬던 후송도 유배생활이 하루 이틀 쌓여가면서 이런 사투리가 차츰 귀에 익어가고, 현지 주민들과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게 된다.
18세기 근대국어로 쓴 '남해문견록'은 문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국어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근대국어시기를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로 정리한다면, 후송이 살다간 18세기는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완전히 넘어온 시기다. 동국대 장영길(국어국문학) 교수는 '남해문견록의 국어사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모음조화의 붕괴현상은 매우 심각하여 근대국어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서 "남해문견록에 나타난 18세기 남해 방언 자료는 방언사적 관점에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평했다.
후송이 남해로 유배 와 머문 적소는 남해읍성 남문 밖으로, 현재 남해읍 남산동 일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59년(세종 41년)에 쌓은 남해읍성은 석축둘레 2876자(약 872m), 높이 13자(약 4m)에 불과한 작은 성이었다. 현지에 가 보니 읍성은 거의 철거되어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일부 남아 있는 것도 담장이나 주택의 초석으로 전용되어 읍성 잔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김 전 관장은 "읍성을 복원할 수는 없다 해도 남문과 북문 등 주요 지점과 명작을 남긴 유배객들의 적소에 안내판을 세워 유배문학의 역사적 현장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태평성대 꿈으로 다진 우정
후송이 유배에서 풀려난 1771년 7월 13일, 효자 이성삼이 후송을 찾아온다. "이 땅에 노인성이 비치기에 노인이 많아 백 세 넘는 이도 자주 있고… 한성부 호적을 살펴보니 남해노인이 팔도 중 제일이라 하니 노인성 효험이라…." 이성삼은 후송에게 추분까지 기다렸다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노인성을 보고 가서 천수를 누릴 것을 권한다.
"노인성이 비치는 곳을 의논하면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 궁전에 먼저 비치고 장안 팔만 가가호호에 다 비치어 있는 것이어든 어찌 남해 한 섬뿐이리오?" 후송은 이같이 반문하면서 당우(唐虞·요순) 때 농부가 땅을 두드리며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노래인 격양가(擊壤歌)를 부를 만큼 정치를 잘하면 자신뿐 아니라 나라 안 모든 노인이 장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로 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노인들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한양과 남해에서 각자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후송의 유배 시련은 이렇게 가슴 따뜻한 남해 사람들을 만나 만백성이 잘 사는 지상낙원의 꿈으로 승화했다.
# 유배지서 만난 자연의 벗, 절개의 상징 대나무 소재로 수십 편의 주옥같은 詩 남겨
■ '대나무 시인' 겸재 박성원
남해읍 남변리 남해대학교 기숙사 앞에 있는 대숲.
1744년(영조 20년) 남해에 위리안치(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유배객을 그 안에 가두는 것)된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1697~1767)은 '대나무 시인'이었다.
'겨울 눈발에도 당당함은 오직 그대이기에 가능했는데/어쩌다가 눈의 위세에 몸을 굽히게 되었는가/근자 들어 사람들의 강항(强項·올곧아 굽힘이 없음) 정신에 이르지 못하니/지난날 늠름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이 부끄럽구나'. 쌓인 눈에 눌려 가지가 휘어진 대나무의 나약함을 친구나 후배에게 조언하듯 희롱한다.
'내 머리를 누를 수는 있어도 뜻은 움직이기 어려우니/잠시 굽혔어도 결국 펴리니 때가 있는 것일세/잠시 후 눈이 녹으면 푸르게 홀로 서서/그대에게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 노래하리라'. 이에 자신이 대나무가 되어 결코 절개를 꺾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겸재는 대나무를 소재로 자문자답하거나 자책하고 반성하는 시를 많이 썼다. 이런 식으로 적거의 외로움을 달래거나 심신의 나태를 경계한 것이다. 유배를 떠나면서부터 해배되어 돌아올 때까지 16개월간 일기처럼 쓴 시 286수를 모아 묶은 남해 유배기행시집 '남천록(南遷錄)'에는 이 같은 대나무 시가 17수 실려 있다. 대나무를 주요 소재로 삼지 않고 간단히 언급만 한 것까지 합치면 대나무 시는 더 많다.
대나무 시의 백미는 귀향해 쓴 것이다. '절해에서 비바람 서리를 함께 겪었더니/삼 년 유배살이에 가장 정을 붙였었지/뜰에 가득 대숲 모습은 다시 대하기 어려워도/성근 운율은 응당 꿈속에 맑게 들어오리라'. 겸재는 적거 동안 친구가 되어 준 대나무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세상의 만나고 헤어짐을 따져 무엇하리오/나는 본래 무심한데 그대는 정을 남겼구려/마음속 회포가 끝내 서로 맞는다면/천리 밖인들 한 뜰에서 대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그리곤 대나무 입장에 서서 자신에게 화답한다.
겸재는 48세 되던 해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할 당시 영조가 기로소(耆老所·70세 넘은 정이품 이상 관리에 대한 우대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다 유배되었다. 적소는 현재 남해대학교 기숙사가 들어서 있는 남해읍 죽림마을이었다. 당시처럼 무성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기숙사 앞 담벼락 일대에 대숲이 일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