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00
5월24일[부활 제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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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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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keQ2SqSD8 (최진호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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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인생 여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반전에 반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생애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위대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단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거듭 일취월장했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한 산골 소녀 마리아는 용기 있는 응답을 통해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도우미요 협조자로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십자가상 예수님의 안내로 사도들의 어머니로 임명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랜 세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일을 사도들에게 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은 대체 어떻게 생활하셨을까요? 마치 대왕대비 마마처럼? 아니면 영부인처럼?
절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할머니 한 분은 평생 자녀들을 위해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자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건강도 좋지 않고, 허리도 굽고, 무릎 상태도 좋지 않으니, 제발 편히 쉬시라고 목청을 높여도, 할머님은 막무가내입니다. 매일 새벽이면 밭으로 나가십니다. 평생 해오던 그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 해오셨던 바로 그일,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 자질구레한 일을 이제는 사도들을 위해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히 사도들의 어머니로 충실하게 살아가시던 성모님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하늘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발령내셨습니다.
천상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천상에서도 그 역할은 똑같습니다. 아들 예수님, 사도들에게 하셨던 그 일, 우리의 도우미요 협조자, 후원자요 안내자로 살아가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으셔서,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해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저희 살레시안들은 이런 어머니,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오늘 많이 힘드십니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십니까? 다른 그 누구에 앞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마치 어린 자녀가 어머니에게 청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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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하나 됨>
교부 크리소스토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로마 황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그는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습니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넣어라.” 그러자 그 신하가 울상을 하며 대답하기를, “황제님,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황제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별 놈이냐? 빨리 집어넣어라!”
“황제님은 모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거기다 가두어 넣더라도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니까 혼자 두게 하면 그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가 고개를 흔들어 대면서, “황제님, 그건 더욱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도할 기회가 생겼다고 매우 좋아할 것이며,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크리스천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악질죄인도 변화시켜 오히려 상급을 받게 해주는 일입니다.”
황제가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당장!” 신하가 사색이 되어서 다시 말하기를, “아이구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처형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한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안겨주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아이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면서도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 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가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한 인부에게 갈매기들이 왜 죽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인부가 대답하여 주었습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 주게 됩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를 맛있게 받아먹게 되지요.
실은 이런 음식은 갈매기들에게 해로운 음식들이며 좋은 자연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갈매기들이 그렇게 과자나 캔디나 받아먹다 보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자연 음식 먹이가 바닷속에 그렇게 많지만 결국 갈매기들은 이처럼 굶어서 죽는답니다.”
갈매기는 본래 자연의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완전히 속해버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치는 그 안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생활하다가 알렉산드리아 도시로 설교하러 다니셨는데 오래 버티시지 못하고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물고기로만 살려면 사막에서만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토니오 성인은 도시로 자주 나가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삶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돼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기도만 하는 자매에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흡수되어 버리면 세상에 필요한 거룩함을 잊어버리게 되고, 또한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도 그 세상 구원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절대 서로 흡수되어 혼돈상태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수록 그 분별은 더 커집니다. 아기들은 남녀 함께 벌거벗겨 놓아도 서로 창피함을 모르지만 다 큰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다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이 나를 여자로 만들어 주었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남자가 사랑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구별이 더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요즘 명상센터나 여러 종교의 가르침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서로 분별이 없어지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즉 알고 보면 다 내 안의 신성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성당 다니시는 분도 제가 고맙다고 하면 “다 하느님이 하신 거지 제가 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또는 내 안의 영과 성령을 혼동합니다. 내 안의 영이 성령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과 하느님의 영을 엄연히 구분합니다. 다만 하느님의 영의 도움 없는 인간의 영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될 수는 있지만, 나와 하느님의 구별은 그만큼 더 명확해져야 합니다. 성과 인성의 결합은 그 정확한 분별 안에서의 결합입니다. 즉 속해 있지만 속해 있지 않은 결합입니다.
다 하느님이 하신 것이라면 내가 해서 칭찬받거나 벌 받아야 할 책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며 이 세상 사람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옷도 빛나고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곳에 머물려는 제자들을 데리고 이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바로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당신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어떤 거룩함도 줄 수 없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들 안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드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닌 상태, 즉 속하지만 동시에 속하지 않는 본성입니다.
우리가 바로 세상에 대해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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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 중에 버스기사가 순례자들에게 자주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빨리빨리”였습니다. 한국 순례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빨리빨리’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에게 내재되었던 감성은 ‘절망과 좌절’이었습니다. ‘Korea Time’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인은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암표가 성행했고, 새치기도 일상이었습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다보면 질서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외국에 나가도 한국인들은 금세 표시가 날 정도였습니다. 고성방가와 무질서가 외국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문화적으로 취약했고,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서 2부 수업은 물론 3부 수업까지 했습니다.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도 심심치 않게 전해 졌습니다.
어느 날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구호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어 설 수 있다는 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우리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외국 담배, 외국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속 성장의 이면에 공존의 그늘이 있었지만 한국은 더 이상 게으른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더 이상 좌절과 절망을 품은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교통은 쾌적하고, 깨끗하고, 편안합니다. 외국의 버스기사도 ‘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시대를 선도하기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 받은 것을 나누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급하고, 일을 시작하면 바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제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저와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제게 부족한 것들을 많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도 서로만을 바라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라온 환경, 성격,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 자녀의 교육, 앞날에 대한 희망입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때로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들을 풀어갈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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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7,11-19: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켜주셨던 이들을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요한 6,39 참조)이라고 하셨다. 잊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분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래서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12절) 하신다.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이 기쁨은 바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그들이 참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기쁨은 충만해지고 이것이 장차 올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이 현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미워한다. 우리는 새로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15절)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기쁜 소식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셨듯이 제자들도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 라는 기도를 이루어야 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도록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질 것이다. 진리는 한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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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4-19)
여기서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면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구원 사업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박해자들’도 ‘모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잃은 양’인 줄 모르는 ‘잃은 양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에는 끝까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 의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고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너무 늦기 전에 믿고 회개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이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의 삶이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 미움과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라는 말씀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미워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더 큰 미움을 받을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이리 떼 같은 그들이 양들로 변화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이리로 변해버리면, 또는 이리 떼 편으로 넘어가버리면 육신의 목숨은 구하겠지만 영혼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이리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 변화는 양이 더욱더 양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신앙인이 더욱더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안 믿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말은, 양이 양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봉헌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거룩해지다.”라는 말은, “진리를(복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다.”, 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이고, 악에서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1.13)
여기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고 (요한 17,6), 그 이름은 ‘사랑’입니다.(1요한 4,8)
‘우리처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처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신앙인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밖에서, 또는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고,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이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저와 함께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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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주님께서 지상 사명을 마치신 뒤에도, 우리는 세상에 남아 그분의 사명을 계속 이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고별 담화와 고별 기도(요한 13―17장 참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은, 장차 그들도 고난과 박해를 당할 때 앞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확신과 기쁨을 기억하여 그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만 충만히 주어집니다.(15,9-11 참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보호’와 ‘성화’를 청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신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권능으로’ 그들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는 아버지께서 몸소 제자들을 보호하시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하나 됨은 제자들이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증거자이며 그들의 사명이 진실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17,21 참조)
주님께서 제자들의 ‘성화’를 청하신 것은, 속된 존재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올바른 친교를 이룰 수도(레위 11,44; 19,2 참조) 그분의 증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의 관계에 일치하여 사는 길은 오직 “진리”, 곧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악을 피하며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굳건히 세우고, 우리가 구원을 상속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제1독서 참조).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거룩함을 간직하는 이는 늘 그분의 보호와 기쁨 속에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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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말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기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공감은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거나 동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살지 못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뽑아주시어 거룩하게 해 주셨으니 그에 걸맞은 거룩함을 살아야 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꿀단지 뚜껑을 열어두면 자연스럽게 벌들이 모여들 듯이 나의 모습에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하여 빛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됩니다. 그 기도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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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코넬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한 이야기가 있다. 개구리가 지내는데 적정온도는 12도인데 한 마리를 45도가 되는 뜨거운 물에 넣었더니 그 개구리는 순간적으로 뛰어올라 도망을 갔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찬물이 들어 있는 시험관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였더니 30도가 넘어도 큰 저항 없이 놀다가 결국에는 뜨거운 물 속에서 죽고 말았다. 습관은 내가 만들고 결국에는 습관에 끌려다니고 죽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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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젊은 형제님의 불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거의 허드렛일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비싼 학비를 내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토대로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데, 허드렛일만 하니 자기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일본 교토에 ‘일본 전산’이라는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가 있습니다. 연간 매출이 3,000억 엔(한화 3조 원 정도) 이상으로 아주 탄탄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이가 매년 지원합니다. 소위 스펙이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1년 동안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고 합니다. 이 회사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소처럼 아주 간단한 것도 못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철학입니다. 결국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만큼 필요한 사람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사회 안에서의 지위가 성당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존감을 세우는 것은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주님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령대로 행동하는 ‘종’처럼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어야만 진리로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겸손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하나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자기만을 따르라고 하고, 자기 원하는 것만 하는 곳에서 서로 ‘하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도 허드렛일이란 없습니다. 제자의 발을 닦아주시면서까지 주님께서 왜 종처럼 행동하셨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처럼 겸손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춰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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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이치>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그 미워하는 세상에 보내시며 세상에서 빼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악에서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을 왜 세상에 보내실까요? 더욱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실까요?
그것은 미움받으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속하지도 않고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십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미움받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해선 안 되고, 미움받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설마 미움받이가 되라고만 보내시겠습니까? 미움을 받더라도 뭘 하라고 보내시고, 미움을 받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뭘 하라고 보내시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이 뭐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압니다. 우선 세상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역설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도 미워해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그래서 더더욱 제자들을 그 가운데로 파견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을 미워해도 세상은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라는 말씀이고, 미워해도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니 믿음 받아도 사랑을 주라는 것이고, 사랑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세상과 주님 제자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미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치 못해도 제자들은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말씀이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과 달리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그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고, 미움받아도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미움을 받아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받아야 하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줄 수 없는 사람도 없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진 사람이고, 안 받아도 되는 사람은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합니까? 주님의 제자입니까? 받아야만 되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받아도 헉헉대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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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주님,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얼마전 구입한 세권의 한국 위인 평전을 틈틈이 소중히 읽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평전 이름에 붙은 명칭이 마음에 듭니다. 이황 “퇴계평전-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 이이 “율곡평전-나라를 걱정한 철인-”, 정약용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지성-”, 이중 한국 5천년사 최고의 학자를 꼽기로 하면 당연히 다산 정약용일 것입니다.
세분들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 해도 손색이 없는 참으로 진리를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후손의 저희에게 안타까운 점은 한자로 된 이분들의 깊고 아름다운 글들을 직접 읽으며 배울수 없다는 점이겠습니다. 어제 가톨릭 다이제스트 6월호 안표지의 잠언성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입니다.
“질문을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답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대로 사랑이신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딱 드러맞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늘 하느님을 끊임없이 물으며 살 때 언젠가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는 것이며 사실 우리 삶이 이미 그러할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나고 있으며, 이런 ‘만남의 기쁨’이 살게 하는 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도 어제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고별기도로 당대의 당신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를 향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동시에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는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대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모범이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제처럼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별기도중 감동적인 일부 대목을 나눕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기도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누룩, 세상의 빛같은 수도원이자 우리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사 비는 주님이십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들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말씀과 하나됨으로 날로 성화되어 거룩해질 때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일 것입니다. 악(惡) 대한 최적의 처방은 착할 선(善)이 아니라 거룩할 성(聖)이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함의 불길속에서 불태워지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필수적 수행이 사랑, 기도, 말씀 공부와 실천임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새삼 사랑과 기도를 곁들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성독의 선택, 성독의 훈련, 성독의 습관화입니다. 비단 신구약 성서뿐 아니라 성서의 성독의 수행은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관상의 삶도 실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오로는 둘이자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없는 바오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제에 계속이어지는 바오로의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 대한 작별인사는 구구절절 감동이요 살아 있는 교훈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신자들을 사랑했는지 역시 경천애인의 모범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별인사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내가 삼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완전히 진리의 말씀과 하나된, 즉 예수님과 하나된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워 주님으로 가득 채운 무욕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복음 말씀대로 진리로 거룩해진 바오로요 ‘성화의 여정’의 모범적인 분입니다. 마지막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이들 원로들과 혼연일체(渾然一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말그대로 사랑의 눈물, 기도의 눈물, 감사의 눈물, 남자의 눈물입니다. 저도 며칠전 울컥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행사때 마다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그 전문을 나눕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의 비극을 주님 안에 어떻게 승화(昇華)하여 체화(體化)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고별기도와 바오로의 고별인사가 참 감동적이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진 삶,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19,2)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 그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과 통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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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7)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요한17,11ㄷ-19)은 '당신이 직접 뽑으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말씀'입니다. 내일 복음은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먼저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7,11) 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 안에서 하나가 되시고, 온전한 내어줌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달라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17,15.17)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직접 뽑으신 이들, 곧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한 특별사도직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들을 위한 기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저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요즘 세상은 예전보다 더 험난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와 돈과 권력과 명예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우상숭배가 만연합니다. 이런 세상 속으로 사제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의 길'도 험난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목하려고 애쓰는 사제의 길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예닮하려고 애쓰는 사제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기도해 주십시오.
'사제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사제들을 악에서 지켜달라고',
'사제들이 진리 곧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해 달라고', '이 거룩함의 힘인 성령의 힘으로 넘어짐에서 얼른 일어나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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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h16iwuVS3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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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11)
사랑은
사랑을 만나야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이끌고
사랑은 새로운
길이 되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하나되는
일치를
향합니다.
주님께서는
간절하신
사랑으로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길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일치와 완성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구원은 일치이며
그래서 구원은
완성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일치로
완성됩니다.
사랑으로
하나될 때
우리는
하나되어
날아 오를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또한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치는 욕망을
비워내는
참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사랑은 한결같이
존중과 인정으로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지켜나가는 것이
일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여기에서
기도하고
기도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완전히
하나되는
끝까지 사랑하며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운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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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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