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슬픔 / 이진양
귀에 익은 허밍을 듣고서 테라스에 나온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건 양 떼를 잃어버린 소년의 후련함일까
보이지 않는 건 영원할 수 없어 혼자 하는 베개 싸움의 한복판에서 터지는 깃털 터지는 냉담 선명한 인상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로비 직원들의 카드놀이는 겨울 장미로 시들어가고
산책할수록 나는 무너진 계단이었다
턴테이블 선율에 빠져 잔해와 잔상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가끔은 초점 없는 표정을 확대하고 싶어 그걸 걸작이라 우기고 싶어 무명 감독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 숲은 영원히 드넓어지는 감옥이었나
마음은 내가 없는 곳을 걷는 중이다 처음 만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면 뒤섞이는 불안들을 수갑으로 서로를 묶어두었던,
너는 아무렇게나 물들어가고
뒤돌아보면 날 닮은 카메오는 훤히 비치는 유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폐기물 스티커가 너덜거리는 나무 의자처럼 실내를 그리워하며
처음 가는 방향에 중독되는 건 쌓아온 시간이 녹슬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에선 이따금 낡은 운동화 냄새도 난다
― 2021년 10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 계간 <시인수첩> 2021년 가을호 ------------------------------------------------------
* 이진양 시인(본명 이진영) 1993년 경기도 광명 출생. 국민대 연극영화과 졸업. 2021년 <시인수첩> 등단.
*****************************************************************************
<본심 심사평>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
이번 제10회 <시인수첩 신인상> 공모에는 여러 분의 예비시인이 자신들의 시간과 공력을 온전히 바친 가작들을 보내왔다. 이러한 커다란 관심은 이미 시단에 무게감 있는 신인을 다수 배출해온 『시인수첩』의 매체적 위상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볍지 않은 지표로 이번에도 남기리라 생각된다.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아홉 분의 작품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은 문장과 사유의 양면에서 남다른 개성적 성과를 보여준 이진양 씨에게 주목하였고 그의 「수많은 굴뚝의 집」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진양 씨의 작품은 오랜 창작 이력을 암시해주었다. 「수많은 굴뚝의 집」은 가족 서사를 바탕으로 그 안에 담긴 페이소스를 “다르게 망가지는 노래”와 “윤곽만 남은 얼굴”의 이미지로 직조한 선명한 작품이었다.
무료하고 어둑한 이미지와 어법이 교차하면서 수많은 굴뚝들을 지치고 어지럽고 어두워지는 흐름 속에 맞춤하게 배열한 작품이었다. 이어 펼쳐진 작품들도 상상력의 원심을 최대화하여 “패잔병의 호기심”(「변신의 귀재」이나 “빛에 흠뻑 젖은 마음”(「조련」)의 흐름을 격정적으로 노래하거나, “처음 가는 방향에 중독되는”(「산책하는 슬픔」)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내가 잊은 척/아이의 얼굴로/따라 불렀던 노랫말”(「컨트롤러」)을 되새겨주었다. 회상과 상상, 외상과 내상, 어두운 기억과 밝은 환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 신예시인의 미래를 기대해봄 직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진양 씨는 오랜 습작 시간을 남몰래 간직한 젊은 신인이었다.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과 개성적 문장에 공을 들인 점도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시를 한 편 한 편 써가는 기율과 방법에서도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수첩』이 선택한 이번 결과가 우리 시의 미학적 편폭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당선을 마음 깊이 축하드리면서, 더욱 단단한 안목과 기량을 통해 젊은 신인다운 지속 가능성을 구현해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심사위원 : 고두현(시인)⋅유성호(문학평론가, 글) / 계간 <시인수첩> 2021년 가을호
****************************************************************************
<등단 소감>
하루는 내가 전쟁이 끝난 뒤에 남겨진, 반쯤 정신이 되돌아온 돈키호테 같다고 생각했다. 해안가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 창으로 애꿎은 파도를 찌르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따라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를 해치우는. 그러다 문득 혼자 남은 초라함을 절감하고야 마는……. 암만 두리번거려도 환상의 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잘 모르는 아군이 되었으며, 부정해야 할 ‘절대 악’은 그보다 훨씬 전에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낡은 싸움을 계속하는 걸까? 정말 그 일을 사랑하긴 했을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아끼던 손목시계를 잃어버렸다는 거다. 더욱이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지금이 언제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른다. 다만 내 손목에는 새벽 세 시였던 습관만이, 그런 시의 무게가 남아 있다.
당선 연락을 받으면 죽을 만큼 행복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나가야 할까, 내가 뛰어난 시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불쑥불쑥 덮쳐온다. 그래도 그런 불안이 참 소중하다. 기회가 주어진 만큼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답장을 보내야 하는 마음들이 너무 많다. 먼저 들쑥날쑥한 동생을 오래도록 토닥여준 병조 형, 우리 다시 만나서 처음 그날처럼 막걸리 한 잔 마셔요. 또 내 가난의 손을 붙잡고서 젊은 시절을 함께 달려준 대일 형, 그 기억들이 내겐 보석이에요. 조금만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리고 늘 해맑은 웃음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신 서윤후 선생님, 마음속에서 짙은 고마움을 꺼내 봅니다. 막 제대를 하고서 처음 시를 써보는 제게 마음껏 날아보라고 말씀해 주신 김근 선생님과 한겨레 친구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개를 숙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작품을 높게 평가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밖에 지면에 언급하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꼭 찾아가 마음을 표현하겠습니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스물둘이었는데, 등단하고 보니 이십 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이렇게 빠른데 기록해둔 것이 많지 않아 큰일이다. 이제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겠다. 비록 내가 쓰고 있는 시가 영원토록 사랑인지 싸움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순간순간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약을 꿈꾸며. 처음 시작하던 날의 영롱함 손에 꼭 쥐고서.
- 이진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