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세 에피소드, 그리고 에제키엘과 요한이 본 환시
에제 1,2-5.24-28ㄷ; 마태 17,22-27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2024.8.12.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 1장입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남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끌려간 바빌론에서 예언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바빌론 신전에 새겨진 신화적 동물의 상이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믿어온 신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섬겨온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이 환시를 통해서 에제키엘과 같이 끌려온 유배자들은 비록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에 붙잡혀 있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성전이 아니라 드높은 하늘에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서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에제키엘이 보기에도 바빌론 신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마저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우상 숭배에 물들었었고 이것이 주님의 진노를 사서 성전은 파괴되고 왕국은 멸망 당했으며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되는 포로 신세가 된 것이었습니다. 비록 바빌론 신전에 새겨진 신화적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바빌론 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환시로 보고 동족에게 전하는 에제키엘의 메시지는 장차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참된 예배를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의 영광이 온 누리에 빛날 것임을 예고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후 재건되어 사제 사독의 후예들인 사두가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의 운영을 위해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율법에 의해 하루치 임금에 해당되는 반 스타테르를 성전세로 납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두가이의 징세원들이 성전세를 내라고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시려고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벌이가 없었던 예수님 일행은 호수에서 잡힌 물고기가 입에 물고 있던 스타테르 동전 한 닢으로 납부했습니다. 이 동전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몫의 성전세를 내시자 나머지 제자들은 이 일로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서열로 확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제자들 안의 서열 다툼을 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벌인 이 매우 엉뚱한 논쟁에 대하여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높다고 대답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마태오는 성전세를 두고 일어난 일에 앞서 수난과 부활 예고를 배치하고, 그에 이어 겸손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치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소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서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전이라는 장소의 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수난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삶 전체로 확대됩니다.
비록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어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을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삶에서야말로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관심을 갖는 서열에 목을 매는 그런 삶은 그저 지나가는 햇빛이요 심지어 그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생활과 활동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는 바로 그 삶에서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비록 비천한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하느님 나라를 보증하는 영광스런 희망일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빌론 신전에서 보았던 네 짐승의 형상은 훗날 사도 요한이 그리스 파트모스섬 동굴에서 보았던 네 생물의 형상으로 바뀝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네 복음의 형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묵시 4,7) 신앙을 박해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강대국들을 상징하는 짐승의 형상들도 요한은 환시로 보았는데, 이들은 어린양에 의해서 멸망당할 뿐입니다.(묵시 13,1.7.12.15; 14,9).
우상을 드러내고자 했던 바빌론 신전의 네 마리 짐승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 영광의 형상으로 보았던 에제키엘의 환시를 잇는 요한의 환시에 담긴 뜻은 이러합니다. 사자는 날쌔기가 짐승 중에 으뜸인데, 처음으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기록해 놓은 마르코 복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거의 모든 생애를 길에서 보내시며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매우 역동적인 메시아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황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봉헌 제물로 삼았던 귀한 동물인데, 마르코 복음에 생략되어 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상하게 전해준 마태오 복음을 상징합니다. 산상설교, 파견설교, 비유설교, 공동체설교 그리고 종말설교 등 예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전해 준 마태오 복음은 이 가르침에 따라 사는 믿는 이들이 더 이상은 황소 같은 동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귀한 제물로 봉헌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얼굴이 사람 같아 보이는 형상은 루카 복음을 상징하는데,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이를 청원하는 믿는 이들의 기도를 유난히 강조해 놓았습니다. 이 자비와 기도가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마르코와 마태오가 각각 ‘하느님 나라’와 ‘하늘 나라’로 소개한 예수님 설교의 대주제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메시아의 사명으로 더욱 사회적으로 소개한 내용입니다. 날아가는 독수리의 형상은 요한 복음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높은 창공에서 지상의 먹잇감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눈으로 먹잇감을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수직 강하하여 낚아채는 움직임이 일품인데, 요한 복음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을 지상 생애로 국한하여 소개한데 비해서 우주 창조의 스케일로 확대하여 그분의 신성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시고, 그 신성을 일곱 가지 기적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러한 안목과 통찰이 과연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를 연상시킵니다.
십자가로 부활을 증거하는 삶이 바로 이 네 복음의 상징으로 그 숨은 섭리를 드러냅니다. 이 삶은 세상에서는 비록 비천하게 보이나 천상에서는 매우 역동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사자와 같습니다. 또 이 삶은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귀하디 귀한 봉헌 제물입니다. 또한 이 삶은 의인을 부르시어 죄 많은 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자비인가 하면 응답하는 의인들의 기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무엇보다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기적입니다. 십자가로 부활하는 삶이 이토록 귀한 섭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저 별것 아닌 에피소드로 보이는 성전세 납부 사건이 예언자 에제키엘의 안목과 사도 요한의 통찰을 거치면 이러한 섭리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