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山 정원규님의『법화경 강설(불광출판사), 초판 1쇄』, 이건 아니다(05)
“舍利弗 若我弟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
此非佛弟子 非阿羅漢 非辟支佛
又舍利弗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阿羅漢 是最後身 究竟涅槃
便不復志求阿褥多羅三藐三菩提 當知此輩 皆是增上慢人
所以者何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不信此法 無有是處
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方便品 第 2)
●이 경문에 대한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사리불이여, 만일 나의 제자로서 스스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얻었노라고 칭하는
이들이 부처님 여래가 보살들만을 교화하는 줄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도 아니며 아라한도 아니고 벽지불도 아니니라.
그리고 사리불이여, 이 모든 비구와 비구니가 스스로 이미 아라한을 얻고 최후의 몸이 되어
궁극의 열반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다시 뜻을 내어 무상정등각을 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리들은 모든 증상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어떤 비구가 진실로 아라한을 얻고도 이 일승의 묘법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부처님 열반 후에 부처님이 안 계신 경우는 제외하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부처님
열반 후에는 같은 경전을 수지 독송하고 뜻을 아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만약
다른 부처님을 만난다하더라도 이 법에서만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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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경문 1 : 諸佛如來但敎化菩薩事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문제의 경문 <但敎化菩薩>은 여기 다시 등장하여 문제를 일으킨다.
<모든 부처여래는 오로지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보살이 되게 한다.>로 번역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시중의 모든 번역서에는 여기서도 <모든 부처여래는 오직 보살만을
교화한다.>로 되어 있다.
이처럼 엉터리로 번역하고, 영문으로 번역까지 하여 서양불자들에게서 조롱 받고 있는
일본의 법화경 대가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을 그대로 베껴 자기 이름표를 달고
에헴! 하시는 조선 땅의 대가들께서는 아직도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것 같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오역의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경문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법화경의 취지와 핵심을 뒤집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을 써나가면서 살펴볼 것이다.
★문제의 경문 2 : 是人難得
다른 경문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문은 그 논리구조가 매우 탄탄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1) 내 제자들 가운데 자칭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최후신에 이르러 구경열반에 도달했다고
주절대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이들 모두 건방에 찌든 사람일
뿐이다.
2)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 있는 어떤 비구가 아라한과를 성취하고서도 일승법을
믿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라한과를 성취한 비구라면
틀림없이 일불승을 믿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3) 그런데 그것은 부처가 면전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부처가 세상을 떠나시고 면전에
계시지 않으면 경우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除佛滅度後 現前無佛).
4) 왜 경우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멸도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면,
이 경을 수지독송하고 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 경을 깨닫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여기서 문제가 되는 문장이 <是人難得>이다. 이 번역해설서의 저자 정원규님을 포함한
시중의 모든 번역자, 해설자는 이 문장을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당연히 오역이다.
정확한 번역은 <그 사람은 아욕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이다.
부처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그래서 이어지는 경문은 말한다.
<다른 부처를 만나 일승법에 대한 설법을 듣게 되면, 곧 바로 완벽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다시 말해, 일승법을 깨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이것은 앞에서도 계속 부처님이 강조하고 계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불교경전을 수지하는 사람, 독송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는 사람은 만나기가 어렵다.
왜 그런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게 이유다.
그래서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라는 경문으로 부처님의 직접 가르침을 강조하게
된다.
6) 그런데 다른 번역서와는 달리 정원규님의 번역에서 독특한 것은 <若遇餘佛>을
가정문(다른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이 아니라 양보문(다른 부처를 만난다 하더라도)으로
봤다는 점이다.
<독보적 착각>이라 해야 하나?
●이 경문에 대한 나성거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사리불이여,
나의 제자 중에는 스스로 <나는 아라한이다, 나는 벽지불이다>
라고 말하면서 오로지 보살이 되도록 가르침을 펼치는 부처의
불사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처의 제자가 아닙니다. 아라한도 아니요, 벽지불도 아닙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회의 비구나 비구니 중에는 스스로 <나는 아라한과(果)를
깨쳤다, 나는 최후신(最後身)에 이르러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성취했다>라고 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더
이상 힘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자만심으로 가득 찬 교만한 자임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아라한과에 이른 비구나 비구니라면 이 일승법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멸도한 후, 한 분의 부처님도 면전에 계시지 않으면
경우가 다릅니다. 왜 그런가.
부처가 멸도한 후에는 이런 가르침들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불승을
깨닫기는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처님들을 만나 뵐 기회가 있다면, 일불승에 대한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방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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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