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두루마리, 예언자와 아나빔
에제 2,8-3,4; 마태 18,1-14 /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2024.8.13
오늘 독서의 말씀을 살펴보면, 에제키엘이 받은 예언자 소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반항하며 죄악을 저질렀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장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펼치실 미래를 전망으로 합니다.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반항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2,8) 지나간 역사에 대해 ‘비탄과 탄식과 한숨’(에제 2,10)이 서려 있는 이 말씀을 듣고 난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먼저 하느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먹도록 하신 것이고, 그런 다음에 그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에제 3,1) 그 자신이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며 깨달아야 하는 소명이 ‘말씀의 두루마리’라는 표현 속에 매우 감각적이고도 인상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가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고 전하는 예언자 직무입니다.
두루마리는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그 옛날에 양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쓰기 좋게 다듬어서 그 위에 문자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사람이 먹을 수는 없지만, 에제키엘은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문자, 즉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매우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에게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 먹어야 할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옛날 에제키엘 시대와 달리 듣고 보고 읽어야 할 정보가 넘쳐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인들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 특히 성경도 그냥 흘러 넘치는 정보의 하나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일 미사에서 들려오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정보화 시대에 넘쳐나는 흔한 정보들과 다릅니다. 하루살이 정보들, 며칠만 지나도 잊혀지고 또 잊혀져도 아무 상관 없는 정보들과 하느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씀을 전하는 역할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알아 듣고 받아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으로서 말씀을 새롭게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러니까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항의 집안’ 처럼 굴지 말고 말씀을 먼저 깨닫고 전하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천의 요체는 겸손이요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 그리고 자비를 행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이들은 세상에서 흔히 무시당하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인가 하면,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과 그들을 소통하게 하고 계실 만큼 그 작은 이들은 하느님의 귀한 존재, 즉 VIP(very important person)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권세가 있거나 재산이 많거나 학력이 높거나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사람들 가운데 으뜸을 VIP로 부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대통령 부부를 이렇게 부르는데, 대개는 곡학아세하는 간신배들이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고, 이를 이용해서 떡고물을 얻어 먹으려는 심보가 읽힙니다. 어지간히 한심한 행태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권세가 없고 재산도 없으며 학력도 높지 않고 사회적 지위조차 없는 ‘작은 이들’이 귀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을 믿고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아나빔’이라면 더욱 귀한 존재,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에서 이러한 섭리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서열 다툼을 벌이다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늘 나라에서조차도 세상에서처럼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이 작은 이들을 무시하거나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를 깨우쳐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양이라는 짐승은 다리가 짧아서 넘어지면 혼자 힘으로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새끼를 밴 어미 양이나 어린 양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번 넘어지면 무리를 쫓아가지 못해서 낙오되기 일쑤입니다. 이를 알게 된 양치기는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나운 맹수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고 삯꾼들에게 잡혀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도 남은 양떼는 양치기가 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낯선 음색을 내는 삯꾼들의 음성을 듣고는 결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양치기는 이 아흔아홉 마리를 떠나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안심하고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물론 교회에서도 다수결의 원칙이 무슨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도 같은 소수의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심지어 불쌍한 시선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가난한 이들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가르치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원리는 ‘다수를 위한 우선적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중산층이라고 분류되는 이들은 자신들이 가난하지 않은 듯이 생각하고 처신합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자기 집도 없고 자가용도 없으며 매일 먹고 살기가 힘든 계층, 즉 극빈층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사정이 나은 차상위(次上位) 계층도 있지요. 하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 자기가 사는 집 한 채가 고작인 사람들, 게다가 자가용 한 대가 재산의 거의 전부인 중산층도 성경에서 보는 관점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요아킴과 안나, 요셉과 마리아, 집과 배를 소유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따라 나선 어부 제자들 등 아나빔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소작농보다는 형편이 나은 자영농이라고 해도 죄다 가난한 이들, 하느님께 대한 신심으로 경건하고 얼마 안 되는 가진 것으로 나누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의 아나빔들이었고, 이들이 예언자들과 소통하며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고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이해 드렸으며, 초대교회의 주축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중산층화되었다고 말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상류층을 바라볼 뿐 하류층을 외면하는 혐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중산층의 경제적 개념을 버리고 성서적 개념을 취하여 그야말로 집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가난한 이들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자비와 봉사를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세우는 이들인 것이요, 그 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이들입니다. 교우 여러분에게 이러한 삶이 꿀처럼 달기를 기도합니다. 시 119편을 인용한 오늘 미사의 화답송을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