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 최석균
뒤란 감잎을 쓸자 흙투성이가 된 그늘이 딸려 나온다 달아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떨림이 있던 자리 반경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이 뒹굴기 마련 밟힐수록 단단히 박히는 씨앗부터 물러터진 흔적의 꼭지까지 한 그루 감나무의 기록이 수북하다 감잎 그늘을 비질하는 걸음 위로 무지개가 뜬다 촉촉한 계단을 디디고 가면 풋감 담가둔 항아리가 열리고 감꽃이 필 거라는 예감 별을 품다가 천둥을 새긴 파란 그늘에서 마른 울음을 흘리다가 홀연 정신을 놓은 주홍 그늘까지 빗자루가 쓸지 못한 그늘을 바람이 쓸어 담아 가지가지 끝에 매단다 뒤란엔 숨죽인 그늘의 역사가 살고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 ㅡ시집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한국문연, 2024) ---------------------------
* 최석균 시인 1963년 경남 합천 출생. 경남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4년 《시사사》 등단. 시집 『배롱나무 근처』 『수담』 『유리창 한 장의 햇살』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2020년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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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균 시인의 신작 시집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현대시 기획선)를 소개합니다. 최석균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2004년 <시사사>로 등단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꾸준히 시를 써 온 그는 저에게 문학을 가르쳐준 은사님이기도 합니다. 졸업 후 문단에서 그분을 다시 만났을 때 항상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제가 지금까지 시를 쓸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경남문인협회, 창원문인협회, 곰솔문학회, 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2020년 제16회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 「배롱나무 근처」 「手談」 「유리창 한 장의 햇살」이 있습니다. . 최석균 시인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보낸 한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명의 시인이 출간한 여러 권의 시집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외형상 완결된 각각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이 보낸 일련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매끄럽게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어떤 시집의 도입부는 같은 시인이 출판한 이전 시집의 종결부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데, 최석균의 이번 시집과 지난 시집이 그렇습니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유리창 한 장의 햇살』(천년의시작, 2019)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낙화」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낙화」는 세 번째 시집을 닫는 시편이면서, 네 번째 시집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의 예고편처럼 기능하는 작품입니다. . 그의 시 「낙화」에서 화자는 삶은 축제가 아니며 너와 나는 곧 흩어질 것이고 환희의 불꽃은 이내 꺼질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는 꽃의 ‘떨어짐’에 주목하기보다는 떨어진 꽃잎들이 만들어 내는 꽃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편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 최석균 시인은 시적 화자를 통해서 어떤 관계가 종료된 후 함께했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사랑의 “떨림이 있던 자리”를 나뒹구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을 발견하는 사람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에 서로를 향한 원망이 왜 없겠냐 마는 그는 “감잎 그늘”에서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만을 음미합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감나무가 보낸 어느 한 시절의 흔적이 가득한 그늘, 그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는 사실을... 최석균 시인의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과 역경 속에서도 감꽃은 분명 다시 핀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 권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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