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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제갈량과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겠다. 한 사람의 성장과 성취는 가정과 사회의 영향 외에도 교우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신중하고 성실하게 벗과 사귀었다. 그는 벗의 부귀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자 애를 썼다. 제갈량은 양양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의 면모는 친구와 친척들로 나눌 수가 있다.
1. 친구와 스승
가. 최주평(崔州平)
지금의 하북성 려현(蠡縣)의 남쪽인 박릉(博陵) 출신으로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면수(沔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면수는 단계(檀溪)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 단계의 북쪽에는 서원직과 최주평의 옛 집터가 있다. 습착지(習鑿齒)1)는 항비(恒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인을 찾아 뵐 때마다 단계를 바라보면서 최주평과 서원직의 우정을 생각합니다. 차마 떨치고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주저하다가 하루 종일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최주평은 서원직과 유달리 가깝게 지냈다. 최주평의 아버지 최열(崔烈)은 한영제가 서원에서 관직을 팔아먹을 때 5백만전을 주고 사도 벼슬을 샀다고 한다. 중평 4년인 AD187년에 태위로 임명되었다가 8개월만에 면직되었으며, 한헌제 초평 3년인 AD192년에 동탁의 부하 이각(李傕)이 장안을 공격할 때 죽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최주평은 양양으로 피신을 했다.
나. 서서(徐庶)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인 영천(潁川) 출신으로 자를 원직(元直)이라 불렀다. 최주평과 달리 그는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위략(魏略)》에는 서서는 원래 이름이 복(福)이었으며,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임협들과 어울려 칼싸움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느라고 살인을 저질러 다른 지방으로 떠돌아 다녔다. 처음에는 학문을 등한시하다가 3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여 마침내 문리에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초평 4년인 AD194년에 같은 군 출신인 석도(石韜)와 함께 형주로 와서 제갈량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다. 석도(石韜)
서서와 동향인으로 자를 광원(廣元)이라 불렀다. 서서와 함께 양양에 와서 제갈량을 만나 함께 공부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갈량을 관중과 악의에 비한다고 비웃을 때에도 서서와 함께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했다.
라. 맹공위(孟公威)
지금의 하남성 평여현(平輿縣)의 북쪽인 여남(汝南) 출신으로 역시 AD194년 무렵 양양으로 피난을 왔다. 최주평, 서원직, 석광원, 제갈량과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당시 20세 전후의 재기발랄한 청년이었던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함께 공부를 했다. 그러나 독서를 하는 방법에서 나머지 세 친구는 정독을 하면서 자세히 알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그저 대략만 보면서 대의를 파악하는데 그쳤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하면서 큰소리를 치는 제갈량을 비웃을 때마다 벗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명을 했다. 그러나 제갈량의 결점에 대해서는 수시로 지적을 하기도 했다. 특히 서서는 제갈량을 유비에게 추천하여 크게 쓰이게 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갈 때마다 도중에서 이들과 만나는 장면이 있다.
AD208년 조조의 대군이 형주를 침략한 후 이들은 각자 흩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제갈량은 오래도록 이들과의 지난 우정을 잊지 못했다. 서서와 석광원은 위문제 조비(曹丕)의 황초(黃初) 년간인 AD220~226년 사이에 위에서 관직생활을 했다. 석광원은 군수를 역임하고 전농교위가 되었으며, 서원직은 중랑장, 어사중승이 되었다. 나중에 북벌을 할 때 제갈량은 이들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친구인 그들의 관직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 위에는 정말 유능한 선비들이 많다고 한탄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서원직이 죽고 난 후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인 팽성(彭城)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수경주 획수(獲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성안에는 한나라의 사도(司徒) 원안(袁安)과 위나라의 중랑장(中郞將) 서서를 비롯한 여러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맹공위는 제갈량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도 나중에 위에 출사하여 양주자사(凉州刺史)가 되었으며, 뛰어난 업적으로 관직이 정동장군(征東將軍0에 이르렀다. 위명제 조예(曹睿)의 태화(太和) 년간인 AD227~232년에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여 사마의와 대치를 할 때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갈량은 두기(杜夔)에게 답서를 전달하게 하면서 맹공위에 대한 안부를 극진하게 물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맹건은 자를 공위라 불렀다. 젊은 시절 제갈량과 함께 공부를 했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을 했을 때 司馬宣王(사마의)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杜子緖(두기)에게 맹공위의 안부를 물었다.”
마. 마량(馬良)
양양 의성(宜城) 출신으로 자를 계상(季常)이라 불렀다.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제갈량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제갈량과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마량은 모두 5형제였다. 모두 재능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마량의 미간에 흰색의 털이 있었으므로 그의 고향에서는 마씨의 5형제 가운데 백미(白眉)가 가장 뛰어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켜 백미라고 한다. 마씨 형제는 모두 촉한에 출사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주인공 마속은 마량의 동생으로 자를 유상(幼常)이라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제갈량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유비는 그가 공허한 말을 자주한다고 경계했다. 그렇게 보면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인재를 파악하는 능력에서는 유비를 따르지 못한 것 같다. 마씨 형제와 제갈량의 친분은 융중에서 시작되었다.
바. 스승 사마휘(司馬徽)
서원직, 석광원과 함께 영천 출신으로 자를 덕조(德操)라 불렀다. 고문경학에 통달했던 그는 영천에 살다가 형주로 피난을 했다. 양양에서 학생들을 모아 강학을 시작하자 제갈량, 서원직 등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사람들을 관대하고 두텁게 대하여 비교하거나 계산을 하지 않았다.
이웃 사람이 돼지를 잃어버리고서는 사마휘의 돼지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자 즉시 자기 돼지를 이웃 사람에게 주었다.
얼마 후 잃어버린 돼지를 도로 찾은 그 사람이 사마휘를 찾아와 몇 번이나 사과하며 돼지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마휘는 돼지를 길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사마휘는 사람을 비쳐보는 물처럼 맑고 아름다운 거울과 같은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능력뿐만 아니라 품성과 미래의 모습까지 알아내는 그를 두고 당시의 사람들은 ‘수경선생(水鏡先生)’이라고 불렀다.
그는 방통의 재능을 칭찬하여 남방의 선비들 가운데 으뜸이라 했다.
그의 사람됨은 제갈량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제갈량은 일반적인 가르침 외에도 사마휘의 고상한 인품과 멋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마휘는 제갈량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지만, 여남(汝南)의 풍구(酆玖)를 스승으로 소개하여 《병법진도(兵法陳圖)》와 같은 책을 공부하도록 했다. 제갈량의 팔진도는 이 때 구상된 것이다. 《제갈량집(諸葛亮集)》에서 인용한 《선감(仙鑑)》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풍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나라를 훔치려는 도둑이고 손권은 천명을 훔치려고 하지만, 저는 난세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면서 오로지 뜻을 기르고 도를 즐기려고 합니다.”
제갈량의 말을 들은 풍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그대와 같은 기량을 지닌 사람이 백성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자의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옳은 길이다.”
풍구에게서 공부를 마친 제갈량이 돌아와 풍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하자 사마휘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그는 제일류의 인물이로다.”
물론 이 이야기는 후세인들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갈량에 대한 사마휘의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제갈량이 조조를 ‘나라를 훔치려는 도둑(國賊)’으로, 손권을 ‘천명을 훔치려는 도둑(竊命)’으로 여겼던 것이 당시 형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도 있다. 훗날 사마휘가 신야에 있던 유비에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 ‘와룡(臥龍)’을 추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2. 친인척들
가. 방덕공(龐德公)
양양출신으로 현산(峴山)의 남쪽에 살면서 관청이나 성안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다. 현산은 양양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으로 거리는 가까웠지만 그는 일체 양양성에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은일거사(隱逸之士)’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현산에 살기도 했지만 양양성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어량주(魚梁洲)에 살기도 했다. 《수경주 면수(沔水)》에는 면수 가운데에 있는 어량주에 방덕공이 살던 곳이 있었다고 했다. 방덕공은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았다. 사마휘는 그를 형님을 존중하면서 정중하게 ‘방공(龐公)’이라 불렀다. 방덕공은 제갈량이 대단히 존경했던 선배였다. 게다가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은 제갈량의 둘째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제갈량과 방덕공은 사돈지간으로 인척이 되었다.
제갈량은 방덕공의 집으로 누이를 찾아갈 때마다 방공을 만나 뵙고 가르침을 청했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자 방덕공은 제갈량이 보통 청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는 한편, 제갈량에게 ‘와룡(臥龍)’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자 스승이자 친구로 지냈다. 제갈량에 대한 방덕공의 이해가 나날이 깊어가자 와룡이라는 아호가 방덕공의 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나. 방통(龐統)
양양 출신으로 자를 사원(士元)이라 불렀으며 방덕공의 조카였다. 제갈량의 둘째 누이가 방공의 며느리가 되었으므로 제갈량과 방통도 인척지간이 되었다. 진수는 《삼국지 촉지 방통전》에서 그를 경학에 뛰어났으며, 모략을 꾸미는 측면에서는 형초(荊楚)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못했지만, 숙부인 방덕공만은 그의 기량을 깊이 믿고 있었다. 18세가 되던 해에 방공은 그에게 사마휘를 찾아가라고 했다. 여러 차례 방통과 대화를 나눈 사마휘는 마침내 그의 자질을 인정하고 찬탄을 하면서 방공의 안목을 재삼 인정했다.
사마휘가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방통의 명성도 점차 높아져 사람들은 그를 ‘봉추(鳳雛)’라고 불렀다. 봉황의 새끼라는 뜻을 가진 방통의 아호는 제갈량의 아호인 ‘복룡(伏龍)’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제갈량과 방통은 친척으로서 뿐만 아니라 좋은 벗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나란히 유비의 참모가 되어 촉한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다. 황승언(黃承彦)
양양 출신으로 제갈량의 장인이다. 양양에서 유명한 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장인은 사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행여 그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 함부로 평가를 하지 않았다. 사서에도 역시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일이 한 가지가 있다. 황승언은 형주목 유표와 동서지간이었지만, 유표를 찾아가 출사를 하지는 않았다. 제갈량도 마찬가지로 융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장인에게 어떠한 청탁도 하지 않았다. 장인과 사위는 정치적으로 유표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 유기(劉琦)
제갈량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의 산동성 미산현(微山縣) 서북쪽인 산양군 고평현 출신으로 형주목 유표의 맏아들이다. 제갈량과 유기는 이전부터 집안끼리 잘 알던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유표의 둘째 아들인 유종의 생모 채부인은 제갈량의 처이모였다. 채부인은 자신의 소생인 유종을 아끼느라고 유기를 경원시했다. 유기는 후사를 잇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제갈량을 찾아가 몇 번이나 자기가 살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남의 집안문제에 개입을 하기가 싫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어느 날 유기는 제갈량을 꽃밭에서 꽃이나 감상하자고 불러서 높은 누각에 올라가 술을 마시다가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유기는 다시 정색을 하고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은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땅으로 내려가지도 못하네. 자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귀로만 들어갈 뿐이네. 이래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인가?”
도저히 피할 수가 없게 된 제갈량은 유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은 신생(申生)은 안에 있다가 위험에 빠졌고, 중이(重耳)는 밖에 있어서 안정하게 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는가?2)”
유기는 깜짝 놀라서 제갈량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곧바로 강하태수(江夏太守)를 자청하여 양양에서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화를 피한 유기는 나중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도망칠 때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유약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유기도 상당한 지략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제갈량은 큰매부 괴기(蒯祺)와도 당연히 친밀하게 지냈을 것이다. 중려(中廬)의 괴씨(蒯氏)는 형주의 거족이었다. 유표는 괴량(蒯良)과 괴월(蒯越)의 도움으로 형주에서 자신의 통치기반을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괴씨집안의 교류에 대해서는 사서에 이렇다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마. 아내 황씨
제갈량의 두 누이가 시집을 간 후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그가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당시에 제갈량은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친구들 사이에 ‘복룡’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면남(沔南)의 명사 황승언은 양양의 세가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깊이와 호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총명하고 다양한 재능을 지닌 딸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딸은 용모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황승언은 딸이 자라게 되자 조바심이 났다. 당시는 문벌을 중요시하던 때였으므로 혼인은 당연히 집안끼리 어울리지 않으면 이루어지기가 힘들었다. 황승언은 일찍부터 제갈량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그가 낭야군의 세족인데다가 기량마저 보통의 청년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므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망설이던 그는 어느 날 직접 제갈량을 만나서 의중을 떠보았다.
“군이 아내를 고른다면 몸은 누추하고 머리는 노란색이며 얼굴은 검지만 재능이 있는 여자를 배필로 맞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상치도 않게 제갈량이 수락을 했다. 황승언의 딸과 제갈량은 이렇게 쉽게 결혼을 했다.
황승언이 자기 딸을 머리카락은 노랗고 얼굴은 검으며 곰보라고 한 말이 겸손하게 한 말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제갈량의 아내가 못생겼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실이다. 황승언은 형주의 명사였고, 제갈량은 재기가 넘치는 청년이었으므로 이들의 결혼은 금방 양양 일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공명이 마누라 고르는 것은 배우지 말아야 한다.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얻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제갈량이 아내를 골랐던 기준은 무엇일까? 그가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특별히 추녀를 좋아했을 리는 없다. 만약에 재덕과 미모만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는 미모보다는 재덕을 선택했을 것이다. 황승언이 자기 딸을 소개하면서 몸은 비록 추하지만 재능이 있다면 배필로 삼겠느냐고 물었던 것은 황승언이 이 청년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확실히 그의 딸이 대단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제갈량은 천하를 바로 잡을 뜻을 품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내를 고를 때 재덕을 겸비하여 내조를 할 수 있으며, 남편을 도와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서 자기 일을 도울 사람인가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또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그가 결혼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연계시켰을 것이라는 점이다. 황승언은 형주의 유명한 대가세족이었으므로, 그를 장인으로 삼는다면, 외지에서 형주로 온 청년에게는 두 명의 누이가 명문가인 방씨와 괴씨에게 시집을 간 것 외에도, 황씨라는 또 다른 직접적인 배경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황승언은 형주의 또 다른 명문가인 채풍(蔡諷)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므로, 제갈량은 유표의 수하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채모(蔡瑁)와도 친척이 될 수가 있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형주의 실력자인 유표를 비롯한 명문가들과 친척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분석이 제갈량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문벌을 중시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황씨부인의 재덕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북송의 범중엄(范仲淹)이 쓴 《계해우형기(桂海虞衡記)》에 나오는 양양지방의 민간에 유포된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이 융중에 있을 때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가 황씨부인의 얼굴을 보더니 얼굴에 무엇인가를 씌워 주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몰래 숨어서 보니 나무로 만든 사람들이 밀을 갈아서 황씨부인에게 바치고 그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황씨 부인은 그 기술을 응용하여 목우(木牛)와 유마(流馬)를 만드는 법을 남편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황씨부인이 나무로 만든 기계로 밀을 갈아서 밀가루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제갈량이 그 원리를 연구하여 목우와 유마를 만들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황씨부인의 총명함과 내조를 잘 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갈량이 촉한에 출사를 한 이후에 청렴하게 지내면서 항상 전쟁터에 나가 있었지만, 황씨부인은 근면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집안을 잘 다스려 남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제갈량은 나중에 유선에게 올린 표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는 날까지 집안에 옷감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할 것이며, 밖에서는 재물을 얻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사실을 알아보니 과연 그가 말한 대로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후세에 칭송을 받는 것은 그가 이룬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생토록 지킨 청렴과 충성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거기에는 황씨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내조를 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새인 제갈량은 유비라는 보잘 것 없는 숲을 왜 선택했을까? 제갈량이 융중에서 지낸 10년 동안 중원의 형세는 크게 변했다. 대소 군벌들이 치열한 전쟁을 펼친 결과 대부분의 약소세력들은 강대한 세력으로 편입되고 황하의 중하류 지역을 차지한 원소와 조조의 양대 세력이 각축전을 펼치게 되었다. 중원은 이제 마지막 남은 이 두 세력의 승자가 차지하게 될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