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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음악은 모름지기 혼자서 듣는 것이다 정윤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주간경향> 2015년 10월 28일
누군가와 같이 들으면, 그가 이 음악에 집중하는지 신경 쓰느라 불편하다. 정성껏 고른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 사람이 제대로 듣고나 있나 하고 슬쩍슬쩍 훔쳐보는 일도 고역이다. 그래서 혼자서 듣는다.
요즘 ‘혼밥’이니 ‘혼술’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세태의 풍속을 말한다. 나는 술을 즐기지 못하여 혼술은 해본 적 없지만, 자주 혼밥을 먹는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저렴한 분식집에서 혼밥을 먹는다. 그럴 때마다 외롭다기보다는 아주 편안하고 고즈넉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럿이 먹으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건만, 혼자서 밥을 먹는 일도 세간의 감상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것만은 결코 아니다.
서울 대학로에는 ‘독일주택(獨一酒宅)’이라는, 재미있게 작명을 한 집이 있는데 ‘홀로 한 잔의 술을 마신다’는 뜻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1인 가구 급증의 시대에 이러한 풍경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혼자 오는 사람을 위한 단독 테이블은 기본이고, 옆 사람들과 적절히 차단된 상태에서 영화를 보거나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곳도 많다. 강동구 길동의 ‘히토기라쿠’는 혼자 온 사람을 위한 테이블이 전체 좌석의 절반을 넘는다. 서울대 인근의 ‘쿠시야(串家)’처럼 단체손님은 아예 받지 않고, 혼자 오는 사람들을 정중히 환대하는 곳도 있다. 청담동, 서교동, 연남동, 대학로 등의 새로운 풍속도다. *히토기라쿠는 일본어로 ひときらく라고 씁니다. 히토는 사람 人을 말합니다. 기라쿠는 気楽 즉, 편안함을 말합니다. 홀가분하거나 무사태평하다라는 뜻입니다. 혼자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쿠시야(串家)는 일본 꼬치구이 체인점인 쿠시야모노카다리(串家物語)의 이름을 빌어 온 것 같습니다. 쿠시의 한자표기 꿸 천(串)의 모양을 보시면 상상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쿠시야는 꼬치집이란 뜻이겠지요? ...구포의 註釋달기
△음악적 풍경을 지닌 서산간척지
‘혼밥’ ‘혼술’ 이어 혼자 듣는 음악 ‘혼음’ 이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시선도 있다. 10월 6일 방송된 KBS 뉴스에서 박광식 의학전문기자는 “1인 가구 500만 시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넓은 관계를 맺곤 있지만, 정작 밥 먹고 술 마실 땐 다른 사람과 함께하길 부담스러워”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곧장 우울장애로 연결한다. “우리나라 성인 6.6%가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데, 1인 가구일 경우엔 14.5%까지 늘어나 두 배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러한 우울장애의 현상이 혼술, 혼밥이라는 리포트다. 이를 조금 과장한다면, 지금 어디선가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학적인 염려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인간의 외적 행위는 아주 복합한 개인적·사회적 요소가 뒤엉킨 선택이다.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는 겉모습만 보고 ‘현대인의 고독’을 추출하거나 심지어 ‘우울장애’로 직결하는 건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퇴근 후 특별한 사안도 없는데, 우르르 몰려가서 회식을 한다. 시뻘건 불판에 고기를 걸치고는 위생불량의 물수건으로 줄줄 흐르는 목덜미의 땀을 닦아가며 연신 잔을 돌린다. 포식 후, 배를 두드리며 나와서 노래방으로 간다. ‘비 내리는 호남선’으로 분위기를 띄우면 요란하게 탬버린을 흔들거나 넥타이까지 풀어 이마에 맨다. 그렇게 집단의식을 치른 후 터벅터벅 귀가하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이 또한 ‘강요된 집단문화’라고 피상적으로 힐난해서는 곤란하지만, 거꾸로 말하여 혼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고 해서 세상에 부적응하여 우울장애가 있다는 식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어차피 1인 가구 급증은 대세다. 1990년 9.0%에 불과했던 1인 가구는 2013년 25.9%로 증가했고, 뚜렷한 증가추세의 그래프를 보이고 있다. 그 중 절반이 20~40대다.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의하여 ‘솔로이코노미’ 또는 ‘싱글슈머(Single+Consumer)’ 등의 신조어도 나왔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가구, 식음료, 의류, 가전, 문화 콘텐츠 등의 시장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의 인기는 이런 세태의 급속한 변화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니 혼술이나 혼밥은 현대의 고독한 세태나 우울의 단면이 아니라,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사회적 인구 재구성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술을 즐기지 못하여 혼술을 한 일은 없지만 혼밥은 자주 먹는다. 매일 한 끼는 혼밥이다. 혼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혼밥을 먹을 때도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자기에게 집중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서 먹을 필요가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거대한 푸드 코트 같은 곳에서는 자리 오래 차지한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으니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그밖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도 무방하다. 멀리서 누군가를 보면서 저기 또 한 명의 우울한 도시인이 있다, 하고 일그러진 시선을 던질 수도 있겠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누구의 방해나 참견이나 권유나 재촉도 없이 자기만을 위한 절대적인 시간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실로 거룩한 식사다. 이 표현은 시인 황지우의 것이다. 詩 ‘거룩한 식사’에서 황지우는,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라고 썼다.
거룩한 식사 황 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그리고, 나는 혼음을 한다. 아차차,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混淫이 아니다. 여럿이 모여서 野合을 한다는 게 아니라, 혼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혼술 대신 혼음을 하기 위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일을 마치면 작업실로 돌아간다. 일을 위하여, 관계를 위하여, 또 상대방을 존중하여, 더러는 그런 시간은 실로 거룩하여, 나 역시 여러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술자리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은 달아오른다. 아, 빨리 작업실로 가야 할 텐데. 가서, 혼음, 그러니까 음악을 들어야 하는데.
고속도로 갓길에서 ‘위험천만한 혼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랬다. 혼자서 음악을 듣기 위하여 나는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다. 비좁은 다락방에서, 때로는 쥐들이 제풀로 놀라서 뛰어다니는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삼중당문고를 읽으며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다가 잠에 빠졌다가, 바로 밑의 부엌에서 올라오는 연탄가스에 취해 할머니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흘려 넣어준 김칫국물을 마시고 깨어난 적도 있었다. 혼음을 위하여 그곳에 있었다.
19살 때 집을 나와서 29살 때 결혼을 하기까지, 천국(옥탑방)과 지옥(반지하)을 오가며 살았는데, 돈 한 푼 없어 친구에게 얹혀 살거나 세들어 사는 선배 방에 기어들어가서 살면서도 그 방의 레이아웃은 내가 짰다. 어떻게 하면 최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가, 그게 레이아웃의 핵심이었으므로 정작 방세를 내고 있는 친구나 선배의 옷장이나 책상은 뒷전이었다. 스피커의 위치부터 잡는 게 최우선의 과제였다. 선배는 책상 밑으로 발을 넣어서 겨우 잠을 잤다. 내가 밤이 늦도록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늦게 들어온 친구여, 그리고 억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간신히 잠을 청하던 선배여, 이렇게 음악에 관하여 몇 줄이라도 쓰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 모두가 당신들의 후의 덕분이다. 대신 당신들이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몇 시간이고 그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 또한 밤거리를 헤매거나 심야 만화방에서 쭈그리고 있던 일도 아울러 기억해 달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혼음을 위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허를 따고는 선배 차를 빌려서 충남의 바닷가로 줄달음을 친 것도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이 필생을 걸고 공사를 했던 서산의 거대한 매립지, 길을 잃고는 그 안으로 잘못 들어가서 그 거대한 매립지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새벽이 올 때까지 낡은 차 안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어찌 잊을 것인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클래식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시벨리우스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마저 듣기 위하여 위험천만한 갓길에 한참이나 서 있던 기억 또한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잊을 수가 없다.
음악을 들으시려면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Beethoven Piano Sonata No. 31 14th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June 18,
2011
혼음은 아름답다. 음악은 모름지기 혼자서 듣는 것이다. 누군가와 같이 들으면 그가 이 음악에 집중하는지 신경 쓰느라 불편하다. 정성껏 고른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 사람이 제대로 듣고나 있나 하고 슬쩍슬쩍 훔쳐보는 일도 고역이다. 그래서 혼자서 듣는다.
익명은 도시의 운명이다. 익명이 보장되기에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익명의 힘으로 지탱한다. 도처에 익명의 섬들이 있기에 도시 속의 개인은 간신히 숨을 쉬며 살아간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찾으라, 혼밥과 혼술의 장소를. 그 곳에,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 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혼음의 거처도 구하라. 오직 당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당신만의 거처를!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Pianist Sarah Chang (사라 장) Jaap van Zweden conducting the Radio Filharmonisch Orkest (RFO)
시벨리우스(Jean Sibelius)는 1865년 태어나 1957년에 타계한 핀란드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핀란드에서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시벨리우스하면 떠오르는 불후의 명곡은 교향시 ‘핀란디아’입니다. 이 곡은 다분히 ‘정치적인 음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핀란드는 13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1809년부터 1917년까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공국(公國)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식민지 지배와 맞서 핀란드에서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된 곡이 ‘핀란디아’인데, 핀란드 국민들의 애국적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음악이었던 셈입니다. 시벨리우스의 또 하나의 걸작은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입니다. 시벨리우스가 38세였던 1903년에 작곡한 곡입니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곡 하나뿐입니다.
이 곡은 청중도 좋아하지만,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는 곡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넘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가슴 아릿한 서정(抒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이 곡이 표현하는 '깊은 슬픔'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곡의 3악장 때문입니다. 3악장은 바이올린의 기교가 매우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이른바 비르투오소(virtuoso,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풍의 악장입니다. 연주자의 입장에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만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연주기량을 마음껏 펼쳐내면서 알레그로 템포로 달려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벨리우스의 모든 곡들은 핀란드의 하늘과
바람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는 듯한 개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핀란드의 설화(說話)에서 건져 올린 듯한 繪畫나 神話와 같은 요소들을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어쩌면 핀란드는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난을 겪었던 우리 한반도의 역사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는
애국적 열정과 가슴 저미는 서정이 시벨리우스 음악을 좋아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