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김중혁, 주사위를 던지다.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김중혁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을 떠올리다보면, 무언가 재밌는 것을 공상하는 듯한 표정과 머리 위로 수많은 생각풍선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번엔 뭘 하고 놀까?, 를 궁리하는 듯한.
옛 산스크리트어에 릴라lila라는 것이 있다. 논다는 뜻이다. 창조와 파괴, 그리고 재창조가 이어지는 놀이, 우주를 열고 닫는 놀이, 성스러운 놀이. 자유롭고도 심오한 릴라는 기쁘게 즐기는 것인 동시에 신이라는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이며 (……) 릴라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놀이’는 삶을 새롭게 창조한다. 삶을 즐거움으로 채우고, 우리의 일에 추진력을 제공하고, 나아가 다른 삶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상상력은 곧 생산력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해나가길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 ‘놀이’이다.
우리가 표현해야 하는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이 창조할 권리, 자기를 실현하고 채울 권리가 있다면, 이 권리를 가장 잘 행사하고 있는 작가가 ‘김중혁’이 아닐까.
제가 ‘독학소년’이었다는 건 기억해요. 지금도 그렇고요. (……) 저는 독학이 제 스타일에 맞다는 걸 깨달았어요. (……) 독학으로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베껴보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저는 감각을 갈고 다듬었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나만의 감각이 아닌가 싶어요. 이 시대를 가장 현명하게 즐기는 방법은 내 감각으로 새로운 시대를 접하는 것이 아닐까요. _2010, 김중혁
‘독학’으로 터득한 자신만의 감각으로 이 시대와 함께 노는 작가, 김중혁이 또 한번 게임판을 벌였다. 등단 십일 년, 네번째 소설-두번째 장편소설 『미스터 모노레일』은 ‘놀이’하는 소설가 김중혁의 일체형 맞춤소설이다. 사람 김중혁과 소설가 김중혁, 게임과 현실, 그리고 작품이 꼭 하나를 이루는 『미스터 모노레일』, 이번엔 ‘주사위놀이’이다.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는 땅에 닿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변화에 내맡겨진다. 주사위를 구속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러나 또한 주사위는 어떻게든 땅에 떨어져 하나의 숫자가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 우연과 필연의 놀이, 주사위. 이 주사위 놀이가 흥미로운 것은, 매번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다. 매번 ‘생성’이 반복되고 ‘차이’나는 반복이다.
다시, 주사위는 던져졌다.
순간의 선택이 모든 것을 확정했고, 그 선택은 운명까지 결정하고 말았다.
혹시 이것은 게임이 아닐까. 주사위를 던져서 이곳에 오게 된 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꿈이나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진다. 공중에서 무수히 방향을 달리하던 주사위는 땅에 떨어지는 순간 각각 하나씩의 숫자를 내보이고, 그 숫자만큼 말은 이동한다. 그곳은 함정이나 구덩이일 수도, 또 생각지 못한 행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다시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은 또다시 이동한다.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이란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주사위를 던지고, 모노는 던져진 주사위의 숫자만큼 이동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주사위를 던져주는 거라면, 모노는 온전히 그 주사위에 자신을 의지하고 싶었다.(167~168쪽)
어느 날 아침,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모노는 눈을 뜨자마자 <헬로, 모노레일>이라는 게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게임의 룰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노는 지도를 펼친 다음 유럽의 모든 도시 위에다―도시 위를 날아다니는, 붕 떠 있는―가상의 모노레일을 하루 만에 건설했고, 곧바로 혼자만의 모험을 떠났다. 블루, 화이트, 레드, 블랙, 핑크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 <헬로, 모노레일> 게임의 시작이다.
김중혁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게, 『미스터 모노레일』의 주인공들은 학교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대한민국 상위 *%가 아니다. 한없이 머뭇거리고 수줍은 소심한 일반인들, 하지만 각자가 모두 제 삶의 주인공인 우리들이다.
보드게임 <헬로, 모노레일>을 만든 모노와 그의 ‘친구들’은 예기치 않게,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어떤 사건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자신이 만든 게임의 말이 된 듯, 누군가 던져놓은 주사위가 보여주는 숫자만큼 사건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함정을 만나고, 해결하고, 그리고 종착역을 향해 다가간다.
주사위를 던져서 로마에 오게 된 것은 아닐까. 다시 주사위를 던지면 곧바로 다음 도시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모노는 주머니 속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모노는 주사위를 꺼내서 던져보았다. 3과 4가 나왔다. 7이면, 암스테르담으로 갈 수 있었다.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2와 3, 다섯 칸 앞으로 전진하면 덴마크의 코펜하겐이었다. 그렇게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로마는 현실이었다. 꿈도 게임도 아니었다.(89쪽)
브뤼셀 역으로 걸어가면서 고우창은 자신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오랜만에 주사위 5와 5가 나와서 게임을 역전시키는가 싶으면 앞서 달리는 캐릭터들은 6과 6이 나와서 멀찌감치 달아나고, 제대로 된 미션카드로 상대방을 엿먹였나 싶으면 폭설카드나 파업카드로 역습을 당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는 캐릭터가 바로 고우창이었다. 한 번도 게임을 주도해본 적이 없었다. 늘 2등이었고 3등이었지만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뒤쫓기만 하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짜증이 났다. 멋지게 1등으로 도착하여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자신을 보고 싶었다.(239쪽)
그러니까, 한번 더!
다시 한번, 주사위는 우연과 필연의 게임이다. 결코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 상관 없다. 김중혁과 그의 소설은,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너의 운명이니 그대로 순응하고 받아들이라 하지 않는다. 주사위는 이제 한번 던져졌을 뿐이다. 내 안에는 무언가를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면 다시 한번 더, 를 선택하면 된다. 다시 원점. 이제는 내가 던질 차례다. 말은 다시 이동한다. 그러니까 한번 더!. 주사위는 공평한 거니까.
어쩌면 이것은 삶을 긍정하는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슴은 안다. 이것은 또한 내 안의 어떤 목소리에 온 맘과 온 맘을 내맡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든 내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으니까.
제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이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까지는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살아낸다는 결론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결론이기도 하고요. _김중혁
반짝반짝 빛나는……
등단 십일 년, 두 권의 소설집, 그리고 이제 두번째 장편소설 『미스터 모노레일』. 작가 김중혁은 어느새 자기만의 고유한 브랜드를 가진 듯하다. 기발한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유머, 따뜻한 감성이 한 덩어리를 이루는 이른바 ‘김중혁표’ 소설들은 농담인 듯 아닌 듯, 진담인 듯 아닌 듯,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진심’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상대방에 대한 배려, 창작물에 대한 예의, 얼굴 보면서 대화할 때 느끼는 감동, 손을 맞잡고 체온으로 느끼는 서로의 감정, 그런 걸 잊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_2010, 김중혁
주사위 게임의 기본 법칙은,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사위 게임에서 이기려면 진정으로 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로버트 그레이브스
모노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 지고 싶다는 마음. 그런 게 가능할까. 모노는 그런 게 가능하지 않더라도 그런 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모노는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게 좋았다.(65쪽)
모노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무서울 게 없다는 뜻인지,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갯짓이었다. 모노가 통로에 서서 지부장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두들 잠에서 깨어났다. 다른 승객들도 통로를 기웃거렸다. 모노의 뒤에 루카와 레드와 고우창과 고우인이 늘어섰다. 등 뒤에 누가 서 있다는 걸, 그들이 모두 자기 편이라는 걸, 모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기분이 좋았다.(336쪽)
그의 아이디어와 재치들은 한순간 반짝, 하고 사라지는 밤하늘의 별빛이 아니라, 오래도록 한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보석과도 같이 소설 곳곳에 박혀 있다. 거기에, 때때로, 구석구석, 빙긋이 미소짓게 만드는 따뜻하고 착한 마음은 예기치 못한 선물이다. 소설 속 문장처럼, 문득, 세상 어딘가에 내 편이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어줄 것 같은.
해서, 그의 소설은 유쾌하게 깔깔깔, 소리내어 웃게 하다가 곧이어 가슴을 어루만지고 등을 쓸어내려준다.
놀이하듯 진심을 그리는 그의 두번째 장편소설 『미스터 모노레일』. 김중혁이 새로운 주사위를 던졌다. 이 세상이라는, 그리고 소설이라는 게임판 위에. 그가 던진 저 주사위는, 이제 우리가 받아들 차례다!
첫댓글 김중혁 지음 / 출판사 문학동네 | 201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