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한 치도 어김없이 흘러 저물어가는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기해년(己亥年) 한 해를 보내고 새로 맞이할 경자년(庚子年)을 생각하며, 문득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에 담긴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십간십이지에서 천간(天干)을 일컫는 십간(十干)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입니다. 지지(地支)를 일컫는 십이지(十二支)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로 ‘띠’와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의 지지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해 부르는 말로 쥐띠·소띠·범(호랑이)띠·토끼띠·용띠·뱀띠·말띠·양띠·잔나비(원숭이)띠·닭띠·개띠·돼지띠로 구분이 됩니다.
십간과 십이지가 조합을 이루어 만들어지는 육십간지는 갑자(甲子)로 시작해 을축(乙丑), 병인(丙寅), 정묘(丁卯) 순으로 이어져 육십 번째 계해(癸亥)로 마감되고, 천간의 ‘갑(甲)’과 지지의 ‘자(子)’가 만나는 갑자해로 다시 시작됩니다. 그래서 육십간지를 지내고 맞이하는 예순한 번째 해를 환갑(還甲)이라고 부르며 축하 잔치를 벌여온 것이 우리네 관습 중 하나였습니다.
육십간지 중 서른여섯 번째 해인 기해년의 '기(己)'는 황색으로 ‘황금 돼지의 해’로 불렸고, 서른일곱 번째로 맞이하는 경자년(庚子年)은 '경(庚)'이 흰색을 상징해 '하얀 쥐의 해'입니다.
8‧15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들의 명칭은 제주 4‧3 항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7‧4 남북공동성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서 보는 것처럼 간지보다 사건이 발생한 날을 중심으로 명명되어 오고 있지만,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에는 간지 명칭이 많이 쓰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조정의 신하들[朝臣]이나 선비들[士類]들이 서로 싸우며 반대파에게 화(禍)를 입힌 4대사화(四大士禍)를 들 수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사화로 기록되고 있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무오년인 1498년(연산군 4년) 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로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갑자년인 1504년(연산군 10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폭정과 황음에 빠져있던 연산군이 대신과 삼사를 숙청해 대규모의 옥사와 극형 그리고 재산몰수 처벌까지 병행한 사화입니다. 기묘년인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선비들이 숙청된 사건입니다. 을사년인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들 간의 싸움으로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반목으로 발생해 소윤이 승리하고 대윤이 숙청당한 사화입니다.
을묘왜란(乙卯倭亂)은 을묘년인 1555년(명종 10년)에 왜구들이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달량포(達粱浦)로 60여 척의 배를 몰고 쳐들어온 사건을 일컫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년)에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일컫습니다.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이 결렬되어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에 일본이 2차로 일으킨 왜란은 정유년에 다시 침입했다고 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릅니다.
정묘년인 1627년(인조 5년)에는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인 청(淸)나라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병자년인 1636년(인조 1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다시 침입해 정묘호란보다 더 심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병자호란은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갑신년인 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이 개화사상을 기반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입니다. 을미년인 1895년(고종 32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일본이 세력 강화를 위해 명성황후 민비 시해를 저지른 정변을 일컫습니다.
삼일절로 불리는 ‘기미독립선언’은 기미년인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독립선언서의 공포를 알리는 기념일입니다.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이란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속설로 당대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 동방삭이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갑자년(甲子年)을 삼천 번 넘기며 장수했다는 설화로 인간의 장수 욕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류 사회에 육십간지를 훌쩍 넘게 장수하는 ‘100세 시대’가 열리며, 모든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주요 소망 중 하나인 ‘수명 연장의 꿈’이 조금씩 현실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백만 시간을 넘게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수명 백만장자’(longevity millionaire)‘라는 말도 있는데, 백만 시간을 날짜로 계산해보면 114년이 조금 넘는 시간으로 거의 두 번의 환갑에 이르는 시간입니다.
흐르는 세월은 우리를 삶 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 속으로 밀고 갑니다. 육십간지를 한 번(60년) 보내고 십이 년이란 세월이 흘러 맞이하는 나의 띠 해인 경자년에는 ‘100세 인생’을 희망으로 간직하며 건실하게 살고픈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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