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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월각산과 도갑산을 이어탄' 뒤 내려선 무위사를 따로 올린다. 지난 2016년 ☞ 무위사 답사기
☞ 월각산(456m,강진)과 도갑산을 산행한 뒤 내려오니 비탐구간이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준비부족이었던 것.
'대월리사무소'에서 출발하여 두 산을 오른 뒤 성전저수지를 거쳐 무위사로 내려와 '무위사 답사'를 따로 올리게 되었다.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
그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무위사로 고쳤다는 내용이 '무위사 사적기'에 나온다.
산행일시: 2016년 6월 16일
도갑산에서 성전저수지를 거쳐 내려오니 나와 계곡을 따라 무위사가 경계를 긋고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 무위사의 상단부에서 먼저 맞배지붕의 천불전을 본다.
돌담과 접시꽃이 곱게 어우러진 무위사. 돌담은 그랭이 공법(?).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보물 제507호)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월출산 산신각과 미륵전이 나란히 서 있다.
월출산 산신각과...
미륵전의 편액.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받침돌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안내판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柱心包)식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자료>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후불벽 앞면의 아미타삼존불벽화(보물 제1313호)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 2불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벽화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단청이 되지 않은 극락보전의 정면에 당간지주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에 넓직한 판돌 하나가 놓여있다.
정면에 무딘 세월을 맨땅에 누워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돌보며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 길이130㎝ 너비98㎝ 높이 9㎝의 직사각형의 배례석이다.
중앙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이 양각으로 하나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자방에는 연씨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 음각으로 태(선)를 두르고 직사각형의 측면과 정면에 안상(眼象)을 새기지 않은 대신 모서리를 두께의 절반쯤 깎아 들어내 한층 멋을 내었다.
무위사 3층석탑(문화재자료 제76호)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 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고 있으며 각 면에는 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 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 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고려초기로 보인다.
안내판
보제루(普濟樓)를 지나...
돌아보니 건축연대가 일천한 보제루가 시선을 막아섰다.
보제루 현판
무위사중건공적비를 지나...
일주문을 벗어난다.
월출산 무위사 일주문. 일주문에서 극락보전까지 한 줄로 배열하는 건 다른 사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위사 안내문
무위사는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들이 있었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게 우선 좋았다.
무위(無爲)란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함을 말한다.
무위사는 높은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찰임에 틀림없어 뵌다.
알바한 일행을 기다리며 한참이나 무위사에 머물렀다. ☞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 무위사
산 마을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자리, 손님얼굴 대하니
곧 나로 하여금 짙었던 온갖 시름 사라지게 하네
남풍 부는 사월에 지루한 비 내리고
오래된 절간에선 쓸쓸하게 종이 울리네.
소나무는 본래부터 줄이 없는 데에도 곡조 잘 연주하고
새들은 무슨 생각 있기에 숲을 둘러 좇는고
아마도 경포대 앞에서의 저녁 때
산과 들의 나물 안주 술을 마실 만하네
<조선말기의 문인이요 시인이었던 조승하가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을 배경으로 읊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