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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문항
중앙아시아 5국은 1917년 레닌의 볼세비키혁명으로 소련에 귀속되었다가 1991련 소련의 붕괴로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오래 전 김지하시인이 쓴 "예감"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증앙아시아의 문화문명탐방기였는데 거기에 언급되는 타슈켄트, 사마르칸트,알마티, 비슈켁 등 이국적인 지명이 머리에 남으며 이 도시들은 어떤 모습일까 내내 궁금했었다.
2019년 6월에 증앙아시아 5국 중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하고 5년만에 우즈베키스탄 탐방길에 오른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우즈베키스탄은 어떤 모습일까.
키르기스스탄이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에 방점이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은 실크토드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실크로드, 혹은 비단길이라 일컬어지는 고대에서부터 중세까지의 동서문명교역로의 명칭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1877년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연구하던 중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던 것에서 착안해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로 이름 붙인 것이 계기가 됐다. 중국어로는 쓰처우즈루(絲綢之路)라고 부른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중국 서안에는 낙타를 몰고 실크로드를 떠나는 대상(隊商, 캐러밴)의 긴 조각상이 있다.
기원전 130년 전한시대부터 1453년까지(연도는 융통성이 있을 것이다) 문명의 교역로로 활용되었다는 실크로드, 16세기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고단했지만 비단 같지는 않았을 비단길은 그역사적 소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들어서 중국의 시진핑정부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실크로드의 국가들에 SOC 건설을 지원하고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 서안에서 시작하여 타클라마칸사막 가장자리를 지나고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까지 6,4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
이제 천산(톈산)북로와 천산(톈산!) 남로가 만나고 문명교류의 역사가 남아있는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 탐방길에 나서보자.
단어의 명칭은 아랍어 표기, 영어표기가 혼용되고 있어 편한 표기를 선택했다.
●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중앙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은 고대 동서교역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드넖은 사막과 초원으로 이루어진 땅을 가지고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위치해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 7세기 페르시아, 13세기 징기스칸, 14세기 티무르 등 정복자들에 의해 차례로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 파괴와 재건을 통하여 다채롭고 화려한 문화와 문명이 싹텄고 많은 인종의 교류로 130개 민족이 섞여 살지만 우즈벡인이 약 84%로 절대적이다.
동서문명교류의 지정학적 특성때문에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국가에게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 종교 또한 배화교(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이 스쳐갔겠지만 7세기 페르시아에서 유입된 이슬람교가 뿌리를 내리고 유적 또한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다.
현재도 남아있는 실크로드의 흔적과 중앙아시아 전통 건축기법인 돔을 비롯한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신학, 철학, 천문학, 수학, 음악이 발전한 중세를 지난 우즈베키스탄은 구소련의 속국이었다가 구소련 붕괴와 함께 1991년 9월 독립한 공화국이다.
구소련의 지배시절 형성된 정치, 사회, 문화의 유산을 어떻게 정리하고 새로운 민족국가로 나아갈지에 그들의 미래가 그려질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90%에 달하고 그 중 대부분이 온건성향의 수니파가 차지하는데 종교는 자유이며 고려인이 17만 5천에 달해 한민족 분포 6위의 국가이다.
1937년 스탈린의 극동지역 고려인 강제이주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 동포는 1989년 고르바초프, 1993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고려인 박해에 대한 사과와 1996년에 대우자동차가 우즈벡에 자동차공장을 세웠을 때 고려인들은 얼마나 뿌듯하고 명예회복의 느낌을 받았을까.
대우자동차는 지금은 시보레로 브랜드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즈벡인들은 대우가 확보했던 목화사업권과 더불어 대우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다.
도로에는 대우차 모델이었던 마티즈, 스파크, 라세티, 다마스, 라보가 많이 보이고 있다.
이제 부하라,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순서로 기록해 보자.
1) 부하라(Bukhara) (2024. 5. 7~8)
타슈켄트에 저녁에 도착하여 잠만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고속열차편으로 첫번 째 탐방지 부하라로 향한다.
타슈켄트에서 약 600km, 3시간 50분걸려 실크로드의 길목 부하라에 닿았다.
부하라로 가는 차창 밖 풍경은 산이 보이지 않고 초목으로 덮힌 평원이다.
부하라에 가까워질수록 초목은 줄어들고 사막의 모습을 띠는데 모래 듄(dune)이라기보다는 풀이 얕게 덮여있는 평지다.
열차선로는 진정한 의미의 고속철인 것 같지는 않고 선로간 간극으로 인한 진동과 소음이 느껴지는데 170km/h 정도의 속도를 넘지는 않는 것 같다.
운행중 빵과 커피가 제공되었다.
부하라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문화적 의미를 짐작케 한다.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라 한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라는 명칭에 맞게 서역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부하라는 또한 인도로 가는 교역로의 기점 역할도 하여 인도의 향신료 교역이 연결됨으로써 비단길(silk road)과 더불어 향신료길(spice road)이란 단어도 생기게 되었다.
사진은 아름다운 모습은 각도를 달리 하여 추가로 게재하였다.
중앙아시아 저녁 하늘에 노을이 지고
중국 서안에서 실크로드를 떠나는 낙타 대상의 긴 조각. 오래 전 서안에서 찍었다.
부하라로 가는 초원
사막도 연결된다
● 대상(隊商)들의 숙소 라비 하우스(Lyabi Khauz) 앞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 앞에는 550년 된 뽕나무 고사목이 있다.
오디는 흑색, 적색, 백색이 있다고 한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도 실크가 생산되지만 실크로드의 교역품 실크는 주로 중국산이었다..
타키라 불리는 재래시장은 낙타가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구가 높다.
대상들의 숙소 라비하우스 앞의 550년 된 뽕나무 고사목
● 칼란 미나렛(첨탑) : 1127년에 세운 중앙이시아 최대의 이슬람 첨탑이다. 기단부 지름 9m, 높이 47m로서 사막에서 도시를 초인할 수 있는 랜드마크의 역할도 했다.
낙타 200~300마리를 이끌고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던 대상들에게 이 첨탑의 야간 등대불은 무엇보다 큰 안도와 휴식의 등불이었으리라.
정복자 징기스칸이 부하라를 점령하고 칼란 미나렛 앞에서 첨탑의 꼭대기를 올려다 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의 투구가 벗겨져 떨어지는 바람에 불안을 느낀 징기스칸이 이 첨탑을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아마도 첨탑의 아름다움에 파괴를 유보하지 않았을까.
칼란 미나렛
● 유태인 마을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들은 사이좋게 지냈다. 유태인들은 대개 떠나고 현지인들이 숙소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유태인 마을 가게의 오래 된 벽화
유태인 마을 가게의 오래 된 벽화
● 시토라이 모히하사(달과 별 정원이라는 뜻) 여름별궁
부하라의 마지막 왕 알림칸이 지은 여름 별궁이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이슬람 장인과 러시아 건축가가 지었기 때문에 러시아 건축과 이슬람 건축이 어우러졌다.
예부터 길러온 공작새가 있다.
궁내에는 일본과 중국의 커다란 도자기가 있는데 먼 길을 어떻게 운반했을지~
여름 별궁 내부
여름 별궁의 일본 도자기
여름 별궁의 중국 도자기
자수를 놓는 우즈벡 여인
부하라 왕이 잠시 되어 본다
●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태된 건축물이다.이스마일 샤마니는 9~10세기 부하라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르시아 출신 인물이다.
이슬람 최고의 종교학자인 이맘 부하리, 이슬람 및 유럽 의학의 기초를 닦은 이븐 시나, 대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 콰리즈미 등이 이 시기에 부하라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알 콰리즈미는 그의 이름에서 오늘날 알고리즘이 생겼다.
지금부터 1,100년 이전에도 이미 학문은 그 수준을 높여가고 있었다.
인도의 고대 천문학도 그 수준이 21세기 우주여행의 공식에 부합한다고 하지 않는가.
영묘는 진흙벽돌을 1,300°C까지 구워 쌓았고 벽돌사이에는 석회로 마감을 했다.
내부의 천장은 무늬가 아름답고 지하에는 무덤이 있다고 한다.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벽돌공간으로 통풍효과를 낸 건축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의 내부
영묘의 아름다운 천장
● 아르크성
왕궁이자 요새로 16~20m 높이의 성벽에 둘러 쌓여 있으며 부하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한쪽 끝은 아직 복원이 진행중이다.성내에는 박물관이 있다.
아르크성도 벽돌로 축성을 했으며 바위가 많지 않은 지형이라 건축물들은 벽돌로 지어졌다.
한낮의 기온은 40°C까지 올라가는데 내륙도시인 부하라는 5~9월이 건기로 습도가 낮아 그렇게 더운 줄은 모르겠고 땀도 나지 않는 것 같다.
저녁에는 식사를 하며 민속공연을 봤다.
부하라에는 불교가 번창했었다가 8세기 이슬람으로 바뀌었는데 불교 유적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450km 서쪽의 히바에는 불교 유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르크성
아르크성에서 조망한 칼란 미나렛
다양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접시들
에미르 알림칸 마드라사
2) 사마르칸트(Samarkand, 2024. 5. 8~9)
● 구르 아미르(지배자의 묘라는 뜻)
아무르 티무르의 영묘.
손자 무하마드 술탄, 아들 사로흐, 손자 울루그벡, 티무르의 스승이 함께 묻혀 있다
아무르 티무르는 지중해, 서아시아, 인도,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14~15세기 건설했다.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민을 한 데 묶고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우기 위해 대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를 영웅시하고 있다
저녁에는 민속공연을 봤다.
구르 아미르
구르 아미르 광장
구르 아미르
구르 아미르 미나렛
푸른색 타일의 아라베스크 문양
구르 아미르 천장
구르 아미르 발굴 사진
구르 아미르 5개의 관
우즈벡 민속공연
● 울루그벡천문대
아무르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벡은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9세에 즉위하였는데 15세기 사마르칸트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 자신 천문학자로 천문대를 짓고 항성시 1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추측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정밀기기로 계산되어진 365일 6시간 9분 9.6초에서 오차는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망원경도 없는 당시의 기술로 이루어낸 놀라움이다. 이 천문대는 공동묘지 언덕에서 1908년 러시아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 천체관측의 시설이 드러나게 되었다.
종교가 과학에 우선했던 당시 이슬람 지도자들의 사주에 의해 울루그벡은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고 만다.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울루그벡의 천문표는 조선왕조 세종 때 회회력(이슬람 역법)으로 알려져 장영실 등에 의해 "칠정산내외편"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어 조선의 역법을 발전시켰다.
티무르제국 르네상스를 이끈 울루그벡 동상
●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박물관,
7세기 소그드족 바르후만왕을 알현하는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삽수(소매 안으로 손을 맞잡음)한 고구려 사신 으로 보이는 2명의 모습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유물의 벽체를 그대로 뜯어서 박물관에 전시한 진품이다.
벽화에는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묘사되어 있어 7세기 소그드족의 사마르칸트가 실크로드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2021년 한국의 동북아재단에서 박물관을 재단장하였다.
박물관 인근 언덕의 발굴현장은 복구되지 않고 파헤쳐진 상태로 있다.
7세기 사마르칸트 소그드족의 벽화
오른쪽 2명이 조우관을 쓰고 삽수한 모습의 고구려 사신으로 보인다
박물관 옆 복구되지 않은 발굴현장
● 비비하눔 모스크
아무르 티무르가 절세미녀 왕비를 위해 지은 우즈베키스탄 최대 사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1/3만 남은 폐허를 복원했는데 건물 하나는 겉만 복원하고 내부는 복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하며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돔의 아름다운 푸른색은 사마르칸트 블루라 불린다.
이슬람 사원의 푸른색 돔은 1220년 징기스칸에 의해 파괴된 도시를 티무르라는 영웅이 나타나 14~15세기 도시를 재건하였으며 그가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라는한계에서 바다색인 푸른색을 좋아하여 이슬람사원의 돔을 비롯하여 벽체에 푸른색 타일을 많이 썼다.
이슬람사원(모스크)의 돔의 색깔은 청옥색, 혹은 코발트블루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3,000년 이상 채굴되고 있는 라피스라즐리(Lapis Lazuli)라는 광물질을 갈아 만든 페르시아 안료를 쓴다고 한다.
비비하눔 모스크
복원되지 않은 비비하눔 모스크 내부
복원된 비비하눔 모스크 천장
● 벡가이드 집에서 점심식사
벡가이드는 한국에서 공부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채 우즈벡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는데 거의 완벽하게 농담을 섞어 한국어를 구사하는 순박한 성격이다.
점심식사를 벡가이드집에서 우즈벡 가정식 볶음밥으로 하게 되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책꽂이에는 우리말 사전과 "실크로드와 경주"라는 책이 눈에 띈다.
식사하고 나오는 현관에는 어느새 우리가 벗어놓은 신발이 가지런하게 바깥 방향을 향하여 정돈되어 있다.
벡가이드 집에서의 점심 상차림
벡가이드의 책장. 거의가 한글책이다
나올 때를 대비해 신발을 정리한 벡가이드
● 레기스탄 광장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뜻으로 옛날에는 모래로 덮힌 땅이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 최대의 광장으로 14~15세기 울루그벡 마드라사, 16~17세기 세르다르 마드라사, 틸야 카리 모스크가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틸야 카리 모스크는 황금돔이 입혀졌었다고 하는데 내부 천장의 장식은 호화롭고 찬란하다.
마드라사의 1층은 지역 상인을 위한 가게가 들어서 있고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레기스탄광장 야경
타일로 조형미를 낸 건축 외벽
푸른색을 많이 썼다
3) 타슈켄트(Tashkent, Toshkent, 석국(石國) (2024. 5. 9~11)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로 1930년 사마르칸트에서 수도 이전하였으며 인구 240만에 고도 460n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타슈는 돌, 켄트는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석국(石國)이라 불렀다 하는데 돌을 지명에 붙인 이유는 몽골 등에서 가져온 원석을 보석으로 가공하여 서역으로 수출했기 때문이라 한다.
● 지진기념비
1966년 4월 26일 5!시 23분 타슈켄트를 강타한 진도 7.5의 강진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다시 재건한 기념으로 남녀가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으로 진원지에 세워진 기념비이다.
지진기념비라는 표기보다 지진추념비가 어떨지.
구글지도에는 Monument of Courage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지진에 좌절하지 읺고 용기를 내어 재건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소련 치하에서 발표한 공식 사망자는 11명이라는데 누가 이를 믿을 수 있을까
지진이 발생한 1966년 4월 26일 5시 23분을 가리키는 지진기념비
● 하자티 이맘광장
사원과 코란박물관이 있는 넓은 광장이다.
코란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은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7세기 오스만 코란이 보관되어 있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슴가죽에 코란이 쓰여졌다는데 실내는 조명이 어둡다.
이 코란은 이란에서 아무르 티무르가 타슈켄트로 가져왔다가 제정러시아에 의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1924년 다시 타슈켄트로 돌아왔다.
1924년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였다.
코란을 섬기는 무슬림은 아래의 사항을 지킨다 한다.
○ 유일신은 알라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자이다
○ 하루 5번 기도하라
○ 라마단 기간 한달동안 아침, 점심을 거르고 저녁만 먹어라.
○ 이익이 나면 2.5%를 기부하라.
● 초르수 바자르(시장)
커다란 돔형 지붕을 얹은 재래시장이다. 온갖 물품이 매대에 가득 차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초르수 바자르 내부
다양한 과일과 견과, 건과가 푸짐한 매대
지진복구협력을 기념하는 인민친선우호광장, 붉은 광장으로 불리다가 독립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광장, 동상이 있는 아무르 티무르광장, 로마노프궁, 브로드웨이를 거치며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독립광장 저 멀리에는 구소련에서 독립하고 지구위의 새나라가 된 기념탑에 아기의 얼굴이 형상화되어 있다.
아무르 티무르 동상
멀리 지구에 새로 태어난 독립국 의미의 아기 그림이 새겨진 타워가 보인다.
● 로미노프궁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꼴라이 2세의 삼촌인 니꼴라이 콘스탄치노비치 로마노프공이 1880년대말 추방당해 살았던 집이다.
가장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로마 비잔틴양식의 건물이다.
로마노프궁
● 아무르 티무르박물관
몽골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할 정도의 대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제국(1370~1506)의 초대 왕 아무르 티무르(Amir Tenur)의 박물관이다.
부근에는 티무르광장에 아무르 티무르의 동상을 비롯해 대제국을 건설했던 아무르 티무르의 영웅화가 계속될 듯하다.
박물관에는 14~15세기사마르칸트 시장에 갓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조선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다.
아무르 티무르 박물관
아무르 티무르가 코란을 펴놓고 어전회의 하는 그림
아무르 티무르의 가계도
타지마할을 건축한 인도의 무굴제국도 후손이다. 타지마할의 돔은 우즈벡 모스크의 돔과 닮았다
아무르 티무르 박물관의 그림. 사마르칸트 시장에 갓 쓰고 흰 도포 입은 조선 상인이 왼쪽에 보인다
동서교역의 역사가 배어있는 실크로드의 중심지 우즈베키스탄을 탐방하며 생각해 본다.
인간의 몸이 장기의 상호 긴밀한 유기적 작용에 의하여 그 신비한 기능이 유지되듯 우리가 사는 지구도 지역간의 긴밀한 문화 문명의 교류로 그 다양성을 키우고 발전해 왔다.
청옥색 돔과 패턴을 특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아라베스크 타일 문양, 곳곳에 존재하는 신학교 마드라사, 오랜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는 동안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명멸하며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이르렀다.
때로는 침략과 정복에 의해, 때로는 민간의 교류에 의해, 오늘날처럼 교통과 통신이 불비한 상황에서도 그 유기적 생명력은 유지되어 후세의 우리들에게 인류유산상태로 살아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신라시대 왕릉에서도
서역의 유리가 출토되었다 하지 않는가.
우즈벡인들은 표정이 부드럽고 이방인에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끊임 없는 침략과 지배속에서 형성된 낙천적 품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린 소녀의 "안녕하세요?"
길 가는 여학생들의 "사랑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말로 인사하는 그들의 친근성에서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도 느껴진다.
실크로드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봤지만 보지 못한 유산도 많을 것이고, 그래서 미완의 탐방으로 남겨두려 하며 카자흐스탄 여행후기는 2편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