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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일본인의 보따리에서 나온, 맹호도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1. 29.
일본인의 보따리에서 나온 맹호도/배경 없는 구도에 담채로 호랑이를 그렸는데, 기량 있는 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玄齋)라는 낙관이 있으나 생몰년에 차이를 보여 영조 때의 대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국립중앙발물관 소장
1.맹호도
맹호도(猛虎圖), 이 그림은 길이가 96.0센티미터, 폭이 55.1센티미터로 호랑이가 뒷다리와 허리를 바짝 올려서 힘과 소리를 감춘 채 방향을 정면으로 막 돌린 자세이다. 배경 없는 구도에 담채로 그렸으나 호랑이의 찰나적 동작이 실감나게 포착되어 기량 있는 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7언 절구의 발문(跋文)과 ‘갑오남지일(甲午南至日)’이란 간기(干紀)를 써넣어 그림을 그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빨갛고 네모난 현재(玄齋)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데,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맹스럽게 으르렁거리니 어찌 맞설 수 있는가
동해의 늙은 황공의 마음엔 시름이 인다.
요즈음 드세게 횡포스런 자들
이 호랑이와 똑같은 줄 누가 아리오
獰猛磨牙孰敢逢 愁生東海老黃公
于今跋扈橫行者 誰識人中此類同
2.유 노우, 냐옹 냐옹
최근에 민화가 재평가되면서 까치와 호랑이 그림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런 탓으로 많은 사람들은 호랑이 그림이 민화의 주류 인양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호랑이 그림은 도화원의 화가에 의해 조선 초부터 그려진 영모화의 한 소재였다. 또한 악귀를 물리치는 그림으로 용과 함께 매년 새해 벽두에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전칭(傳稱)으로 전래된 이상좌(李上佐)의 우중맹호도(雨中猛虎圖)는 원나라 초의 선승 화가 법상(法常)과 연관을 보이고, 16세기의 고운(高雲, 1495~?)도 호랑이 그림을 주로 그렸다. 또 18세기에는 정홍래(鄭弘來), 김득신(金得臣), 이의랑(李義良)이 호랑이 그림을 그렸고, 호암미술관(리움) 소장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강세황(姜世晃)이 소나무를 그리고, 김홍도(金弘道)가 호랑이를 그린 합작품으로 유명하다.
1946년 미군정 하의 서울. 파란 가을이 서대문에 있는 엄창익(嚴昌翊)의 골동 가게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이다. 나이가 지긋한 미국인이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굿모닝, 메이 아이 헬프 유?”
눈인사를 받은 미국인은 주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전시된 고미술품만 이것저것을 둘러보았다. 엄창익은 그 사람이 무엇을 보나 유심히 관찰하였다. 이윽고 미국인이 호랑이 그림 앞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창익은 ‘이크, 이제야 주인이 나타났군.’하면서 한 발짝 다가가 서툰 영어로 소리쳤다.
“오, 넘버 원. 타이거?”
그러자 그 미국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츠 캩. 빅 캩. 유 노우 냐웅 냐웅!”
“오, 노. 이츠 타이거.”
“오, 노. 냐옹 냐옹.”
고양이 소리까지 내면서 고양이라고 우기던 그 미국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엄창익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며칠 전의 일이다. 친구와 함께 가게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상사 계급장을 단 미군 헌병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소매를 잡아끌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미군은 손짓 발짓을 다해 가며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보디 랭귀지로 미루어 보아 ‘골동품이 산처럼 가득히 쌓여 있으니 자기와 함께 가 보자.’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든 두 사람은 미군의 지프를 타고 남대문 시장 건너편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일본인 사이토쿠 타로(齊藤久太郞)가 경영하던 요릿집, 금천대회관(金千代會館)이었다. 해방 후 사이토쿠가 일본으로 떠나 버리자 미군들이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간 엄창익과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쫓겨 가는 일본인의 짐에서 미군이 압수한 고미술품들이 지하실 가득히 쌓여 있었다. 미군은 잘 포장된 고리짝 하나를 풀어헤치더니 다짜고짜 설명을 요구하였다.
8.15 해방과 더불어 남한에는 미군정이 시작되고, 미군정은 ‘본토로 철수하는 일본인은 일체의 동산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다’라고 선포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 앞에 고리짝 2개까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을 허용한다.’ 라고 하더니, 곧 ‘륙색(rucksack) 1개’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러자 패전국의 포로가 된 일본인들은 헌납 증서와 함께 고미술품을 모조리 덕수궁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일부는 몰래 숨겨 가지고 떠나기도 하였다. 세화인회(世話人會)라는 단체는 일본인의 보따리를 일본까지 날라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부산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한 화물은 기차가 대전에 정착하면 미군에 의해 다시 끌어 내려져 서울로 반송되었다. 그 양이 하루에도 수천 개가 넘었다. 미군은 이 화물을 조선 운수(주) 창고와 미곡 창고에 수만 개씩 쌓아 두고, 일부는 물자 영단(物資營團)으로 넘겨 일반인에게도 불하하였다. 당시 문교부는 미군정에게서 일본인 보따리에서 나오는 고미술품은 덕수궁으로 옮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자 수천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품이 덕수궁 내 석조전으로 옮겨졌고, 박물관 직원들에 의해 번호표가 붙여져 지하실에 쌓여졌다. 또 혹시 있을 줄 모르는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고미술품 더미를 갑바천으로 꽁꽁 동여매 놓았다. 안타깝게도 이 유물들은 그 후 15년간이나 습기 찬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다가 자유당 말기에 들어서 겨우 정리되었다. 유물 중에서 특히 서화류의 훼손이 극심했다고 전한다.
미군이 가리키는 보따리를 풀었더니, 희귀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모노를 비롯하여 각종 패물과 장신구들이 금빛으로 빛났다. 엄창익은 몸을 꼬아 가면서 내용물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미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 왔다.
“탱큐, 탱큐.”
“유어 웰컴.”
마침내 헤어지는 악수를 나누자, 미군은 두 사람을 그냥 보내기가 안쓰러웠던지 손가락 한 개를 꼿꼿이 세워 엄창익의 코앞에 들이댔다.
“애니씽, 이프 유 원트.”
엄창익은 그 말이 아무거나 한 개를 골라잡으라는 뜻으로 대뜸 알아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할 지 우물쭈물하였다. 눈치를 챈 미군이 서화 뭉치에서 제일로 긴 족자를 하나 쓱 뽑아 올렸다.
“오케이?”
미처 무슨 그림인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얼떨결에 족자를 건네 받은 엄창익은 겸연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탱큐.”
미군은 두 사람을 다시 가게까지 태워다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엄창익은 친구에게 근사한 점심을 사고는 돌려보냈다.
‘어젯밤 커다란 돼지가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횡재를 하였다. 조심스럽게 족자를 펼치자, 안에서는 호랑이 한 마리가 의기 등등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벽창호나 다름없던 엄창익이었다. 그림 윗부분에 해서로 써 놓은 발문조차 읽어 볼 관심이 없었다.
“이게 뭐야. 고작 호랑이 그림이잖아. 호랑이는 민화에 나오는 짐승이니, 그럼 이 그림은 민화잖아.”
엄창익은 기분이 팍 상했다. 당시 민화라면 양반 집의 다락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거나, 아니면 미닫이문에 발라져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는 싸구려 그림으로 취급당했다. 은근히 점심을 산 본전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엄창익은 가게에 들르는 사람마다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을 부탁하였다.
“일본인의 보따리에서 나왔으니 이 그림은 일본 그림이야. 알겠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아예 일본 그림으로 취급해 버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맹호도가 희대의 보물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일본 그림으로 단정 내린 엄창익은 맹호도 아래에 ’삼천 원‘이란 가격표를 매달아 가게 한복판에 걸어 두었다. 미국인이 호랑이 그림을 좋아하니 그들에게 팔기 위함이다. 삼천 원이라면 당시 일본 그림으로 대단히 비싼 값에 속했다. 그렇지만 돼지꿈을 생각할 때에 어쩐 일인지 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만 되풀이되었다. 미국인이 여러 사람 다녀갔지만 모두 힐긋힐긋 쳐다 만 볼 뿐 그림에는 도무지 흥미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고양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살쾡이라고까지 말했다.
“호랑이 눈이 어떻게 고양이 눈 같아.”
“제기랄, 내가 그렸나. 어느 왜놈이 그린 그림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엄창익은 화가 나서 계속 투덜댔다.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거들자, 나중에는 그림마저 보기 싫어져서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누가 호랑이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잡혀 먹히기가 일쑤지. 그러니까 사촌 격인 고양이를 보고 호랑이를 흉내 내 그린 거야.”
그런데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횡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서화를 잘 알던 최병한(崔丙漢)이 어느 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 선생, 어쩌자고 저 그림을 저렇게 걸어 놓았소?”
“글쎄요. 모두들 고양이 같다며 사 가질 않아요.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팔려고 해요.”“
최병한에게까지 무시를 당한 것 같아 엄창익은 기분이 상했다.
“참, 딱하군요. 저 그림이 어떤 그림인 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요?”
“그야 일본 그림이죠. 일본인 보따리에서 나왔거든요. 그것도 모르고 장사하는 줄 아시오?”
엄창익은 그때까지 맹호도 때문에 받은 무안을 일순간에 앙갚음할 기회라 여기고 최병한에게 핀잔을 주었다.
“참 답답하네요. 우리 그림이 일본인 보따리에 들어 가 있으면 일본 그림이 되어요? 엄 선생, 저 그림을 미국인에게 못 팔아먹은 것이 천만다행이요. 오늘 한 턱 단단히 내야겠소.”
최병한의 당당한 태도에 엄창익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가 대단한 물건이라는 예감이 머리를 스쳐 갔다. 골동상은 자기가 소장한 물건을 누가 칭찬해 주는 소리를 가장 듣기 좋아한다. ‘남의 물건은 그렇고 그런 물건이고, 내 물건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보물이다.’ 란 믿음이 골동상 신조의 1장 1절이다. 기분이 좋아진 엄창익이 안경 너머로 최병한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내지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시오?”
“저 그림은 영조 때의 대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그림이요. 이제야 아시겠소?”
골동 가게에 둘러앉아 심사정이 어떠니, 김홍도가 어쩌니 하고 서로 잘난 체하며 입방아를 찧어 대기가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정작 심사정의 그림을 앞에 놓고는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심사정, 그는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畵)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선비 화가였다.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호는 현재(玄齋)․ 묵선(墨禪)을 썼다. 포도를 잘 그린 정주(廷冑)의 아들로 사대부 출신이었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 중에서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러나 18세기 화단에 유행하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보다는 전통적인 중국화에 관심을 많이 두었던 인물이다.
“저 그림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 14권에 게재된 현재 그림 중 대작이요. 자, 한 턱 내겠소, 못 내겠소?”
이야기를 듣던 엄창익의 입이 한 자나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후딱 팔아 치워버렸다면 어쩔 뻔 했나 싶어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정 못 믿겠으면 고적도감을 펴 보구려. 저 그림은 일제 때 후암동에 살던 모리 게이스케(森啓助)가 소장했던 물건이요. 삼천 원이 아니라 삼만 원에도 누가 살지 모르는 물건이란 말이오.”
눈 깜짝할 사이에 근사한 기와집 한 채가 생겼다. 엄창익은 자기가 꾼 돼지꿈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슬쩍 최병한을 추켜세웠다.
“이 나라에서 그림 보는 데는 최 선생 따를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나도 뭔가 고양이에게서 느끼지 못하던 위엄을 그림에서 느꼈소.”
엄창익은 그 즉시 그림에 붙은 ‘삼천 원’짜리 가격표를 떼 내어 내동댕이치고는 족자를 둘둘 말았다.
“내가 만 원 줄 테니 양도하시오?”
“허허, 그 얘기랑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엄창익은 종전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로 싱글벙글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3.심사정의 그림이 아닐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이다. 일제 때 남산에 있던 민속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白敎)가 엄창익의 가게를 들렸다. 그는 아우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와 더불어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일본인이다.
아사카와 노리다카. 그는 시간만 나면 등산 모자에 운동화를 신고서 전국에 있는 도요지를 찾아 다녔고, 인부를 사 흙을 파내고는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그리고는 파편들을 정리하여 우리 도자사 연구에 공헌하고,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의 고문을 지내면서 수천 점의 파편 자료를 기증한 뒤 귀국한 인물이다.
“이 그림을 본 적이 계십니까?”
엄창익은 조용하고 겸손한 아사카와를 바라보며 금고에서 그림을 꺼내 보였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아사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발짝 다가와 섰다.
“이 그림이 어떻게? 이 그림은 모리 군이 매우 아끼던 현재의 호랑이 그림입니다. 저도 이 그림은 잘 압니다. 좋은 그림을 입수했네요.”
“많은 사람들이 양도해 달라고 해요.”
엄창익은 기분이 좋아져 일본말로 이야기하였다.
“그것도 좋지만, 가급적이면 이런 훌륭한 그림은 박물관에 팔아서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실로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는 아사카와다운 말이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는 돈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움직였다. 아사카와가 엄창익의 가게를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이다. 엄창익은 덕수궁박물관을 찾아가 1만 5천 원을 받고 이 천하의 명품을 팔았다. 당시 시가로는 3만 원을 훨씬 상회했으나, 아사카와의 말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이 그림은 1970년 대 초 ‘한국명화 근대 오백 년 전’에 출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의 표지로까지 장식되었다.
18세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오랫동안 심사정의 그림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연대에 문제가 생겼다. 갑오년이라 함은 서기 1714년 혹은 1774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심사정의 나이가 10세 미만이거나 아니면 사후가 된다. 만약 이 그림이 심사정의 그림이라면 낙관과 발문은 후대에 찍고 쓴 것이라 추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심사정의 그림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필자 미상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에는 18세기 경의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호랑이의 동작 포착과 묘사력, 그리고 화면 구성에서 흠잡을 데 없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어 기량 있는 화가의 작품인 것만은 확실하다.
(참고:①이영섭씨가 「월간 문화재」에 기고한 글 ‘문화재계 비화’. ②「조선후기의 회화의 사실정신」이태호․학고재, ③「도록」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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