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신작명철학을 나누어 드립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함.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우리나라 고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는 그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지도에 나타나는 대마도의 모습을 통해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의 실체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아울러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 이 문제를 좀더 현실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사입력 2008-07-17 18:18
|
| |
▲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해동필도봉화산악' 지도 | |
최근의 상황에서 고지도에 대마도가 나오니까 무조건 우리나라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것도 올바른 해석의 태도는 아니지만 그동안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땅이라는 우리의 의식에서 벗어나 대마도에 대한 새로운 영토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독도가 한국땅임을 증명하는 여러 고지도가 나와 있다. 이에 비해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고지도는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예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0년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은 우리나라 전도 인본(印本)으로 간행된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첫머리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독도에 대한 인식이 확실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지도의 맨 오른편 끝에는 대마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도에 일본의 한 섬을 굳이 표시할 리가 없듯이 당시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인식하고 지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
▲ 17세기 김수홍이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 | |
이와 함께 1673년(현종 14) 김수홍이 목각본으로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에도 대마도가 등장한다. 이 지도 또한 울릉도의 윗 부분에 우산도라는 지명으로 독도를 기록하고 있어 독도에 대한 영유권과 함께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이 명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정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집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지도(與地圖)'로 불리는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의 '아국총도'는 1789년(정조13)에서 1793년(정조 17)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제1첩에 세계지도인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비롯하여 '아국총도'와 동아시아지도, 연행로도, 일본, 유구, 관방지도가 실려 있다.
'아국총도'는 400여 개에 달하는 섬들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도서해안의 섬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이기도 하다. 이 지도에도 강원도 지역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그려져 있으며, 대마도 또한 중요한 비중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지도에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가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미상의'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는 산맥과 하천, 섬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의 바다쪽은 바다의 물결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독특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바다에 대한 느낌이 더욱 실감이 나게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에도 대마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 18세기 초 공재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도에는 대마도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
이와 함께 현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국여지도'도 또한 당시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해준다. 공재 윤두서(1688~1715)는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화가로 '동국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이다. 공재는 '일본여도'도 그려 그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동국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실제보다도 아주 크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의 크기가 실제보다 크게 그려지고 있으나 '동국여지도'에도 과장되리 만큼 크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도'를 보면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750년대 영조의 명에 의해 '해동지도(海東地圖)'로 불리는 방대한 지도첩이 제작되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8첩으로 되어 있는 해동지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330여 장의 전국 8도의 군현지도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각 군현의 연혁, 산천, 고적, 인구, 토산 등의 이름이 적혀 있어 지리지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도서해안의 섬들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를 좌우에 나란히 그리고 있어 대마도에 대한 인식과 비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대마도는 이외에도 1557년(명종12)경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국보제248호), 영조36년(1765)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순조 22년(1822)에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근세로 이어지는 한말에 와서도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에는 한반도의 영토 범위를 간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 독도까지로 표시하고 있다.
대마도 정벌과 대마도의 독립성
| |
▲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조선전도' | |
우리 역사에서 대마도가 가장 크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 관련 기록은 다른 시대에도 있었다.
1389년(공양왕 1) 2월에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으며, 또한 13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 김사형이 오도병마처치사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1419년(세종 1) 6월에 다시 대대적인 대마도 정벌이 시행되었다.
조선 초기 우리나라의 대일정책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 원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세종실록> 원년 7월17일 기록에는 대마도 정벌 후 도주에게 보낸 교유문에서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다”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대마도가 옛날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대마고토의식(對馬故土意識)을 엿볼 수 있으며, 대마도가 일본 본주(本州)와는 다르다고 하는 의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마도에 대한 여러 역사적 근거자료나 상황을 놓고 볼 때 대마도는 일본과 우리나라로부터 아주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종우 교수가 쓴 <중세 대일교섭사>에서는 대마도는 고려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진봉선 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적 위치에 있었으며, 막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독자적이었으며, 막부의 사신 호행(護行)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 26년(1444) 일기도 초무관 강권선은 대마도에 대해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日, 대마도 한국령 주장때 위기의식 느껴"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지난 1948년 이승만 당시 한국 대통령이 대마도(일본명 쓰시마)에 대해 한국의 영유권을 주장했을 당시 일본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적인 대응책을 검토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됐다고 NHK방송이 3일 보도했다.
대마도의 영유권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과 1949년 한국령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그동안 알려져 왔다고 NHK는 전했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49년에 걸쳐 대마도에 관한 다양한 문서를 담은 책자에 따르면 '국경 쓰시마의 방위와 개발에 관한 건'이라는 극비문서에 "만약 유엔이 승인하면 일본영토에서 제외된다"는 등으로 언급돼 있는 등 외무성 담당자가 한국령 주장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한 흔적이 있다고 NHK는 밝혔다.
NHK에 따르면 도쿄(東京) 간다(神田) 고서점가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당시 일본 정부가 대마도의 한국령 주장에 매우 위기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당시의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자료"로 평가했다.
lhk@yna.co.kr
|
첫댓글 증거를 들이 되도 안통하고 우기기만 하는 저 누마넘들을 어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