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른다.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오르는 계단 길. 주위로 임시수도 기념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공사
계단을 오르다 보니 옛 흑백사진이북
크고 작은 만장이 펄럭이고 있고 큰 스피커목소리
단호하고 확고한 어투의 모습인데,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국회는 정부가 하는 일에 적극 협력해야 하오. 이렇게 반대를 일삼는 시간에도 북한괴뢰도당은 우리 대한민국을 공산화 하려고 날뛰고 있소. 우리가 살 길은 북진통일 뿐이오. 이 사람이 여러분의 고향을 되찾아 주겠소이다."
군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을 것이고, 들고 있던 이 대통령의 사진액자와 대형 태극기를 온통 흔들어댔을 것이다. 이 장면은 임시수도 시절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는 헌법발췌개헌안 통과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자유당에 의해 사주된 관제데모 중의 하나.
건국헌법에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미 국회의 신임을 잃어버린 이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게 된다. 하여 국회의 완강한 반대를, 보수단체를 사주하여 국회불신임 관제데모로 맞선 것이다. 1952년 6월 14일의 일이다.
임시수도 기념관에 앞에 선다. 일제강점기 조선침략을 위한 경남도지사 사택으로 지어졌다가, 피난정부 시절 대통령관저로 사용됐던 기구한 운명
현관 앞 정원.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나무의 감이 빠알가니 보기 좋다. 마치 파란 하늘에 붉은 등불 몇 개 걸어둔 모습이다. 온갖 새들 다 모여들어 잘 익은 감을 쪼아 먹고 있다. 그 옆으로 모과나무, 향나무 등 연륜이 묻어나는 노목들. 가지마다 세월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옹이들이 가슴 한편으로 아프게 맺힌다.
현관 앞 현판을 바라본다. 사빈당(思빈堂), '나라를 생각하는 집.' 이곳에 들르면 항상 대한민국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장소다. 독립운동가 먼구름 한형석 선생의 글씨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응접실. 이 대통령이 인촌 김성수 부통령 등 정부 인사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던 곳이다. 주요 정치 인사들과 정치일정을 논의, 결정하고 외국 주요 인사들의 예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이 관저를 숙소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대통령의 정치행위 연장의 장소로 활용했다. 특히 일본식으로 잘 조성된 후원에서 많은 인사들과 환담을 나눴는데, 그 후원은 아직도 이 대통령이 아꼈던 마음새를 아는지 고요하고도 편안하다. "재재재" 새소리만 스치듯 낮게 들려온다.
서재에는 이 대통령 밀랍인형이 책상 앞에 안치되어 있다. 가끔씩 진짜 사람으로 착각하여 놀래는 방문객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기념관의 허락을 얻고 이 대통령 앞에 앉는다. 그리고 이 대통령에게 묻는다. 가상인터뷰다. "이곳 생활은 어떠십니까?" "좋을 수야 있나? 서울을 두고 피난 온 처지에… 마음고생이 심해." "서울을 지키겠다고 대국민방송을 하고난 4시간 후에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적의 치하에서 공포전세버스를 탈취
임시수도 기념관을 나와 다시 계단 길을 내려가기 몇 분. 동아대학진주
부산은 2차에 걸쳐 임시수도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후퇴를 거듭한 정부는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 대구로, 8월 18일 부산으로 정부를 옮긴다. 이후 정부청사는 경남도청(현 동아대 박물관)으로, 사회부·문교부 등은 부산시청(현 롯데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정부는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한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된다. 2차 임시수도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정부가 서울로 완전히 귀환하는 1953년 8월 15일까지 지속된다. 국회는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1951년 6월 도청 내의 무덕전으로 이전하고, 9월 16일 마지막으로 환도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에 의한 부정부패와 독직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를 배경으로 요지경 같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방위군 사건'과 '중석불 사건'.
정부는 1·4후퇴 직전 적 치하에서 청년들이 북한인민군에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정들을 부산으로 집단 남하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이 식량 등 군수물자를 착복, 5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중석불 사건은 정부가 중석(텅스텐)을 외국에 수출하여 획득한 달러(중석불)로 비료
한 치 앞의 국운도 모른 채 부산 임시수도는 그렇게 천일을 보냈다. 현대정치사에 깊게 얼룩진 정치사건에서부터 긴박했던 정부의 전시대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치비화를 남겼던 임시수도 부산. 그 격동과 질곡의 시절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임시수도기념거리를 걷는 자의 발걸음은 무겁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 위에는 언제나 적요하지만 외롭지 않고 명징하지만 가볍지 않은 교훈이 아로새겨져 있다. cowej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