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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시는 주님!
저 같은 경우 10년 가량 병치레를 했었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고 끔찍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연못 가에 누워있는 환자 장장 38년 세월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스로 일어나지조차 못해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뇌졸중이나 중풍이었겠죠. 점점 병이 깊어가면서 사지가 마비됨으로 인해 나중에는 한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나 치료약이 전무했던 당시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형선고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점점 깊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디다보니 어언 서른여덟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옆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은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이 다하는 멀지 않은 어느 순간 세상 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 효과가 좋기로 유명한 벳자타 연못가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루하루 세월을 죽여가며 그렇게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무의미한 죽음의 삶에서 의미로 충만한 생명의 삶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어쩌면 천둥처럼, 그리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경직되고 마비된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부드럽게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세월 의지처였던 들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희망이나 기약도 없이 누워있었던 세월이 3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아 사망을 빼고 나면 대체로 50세 정도가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그는 평생토록 들것 위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툴툴 털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옛날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처럼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 교회, 점점 사지에 힘이 빠지고 마비증세가 두드러지는 오늘 우리 수도회의 모습,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나 자신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라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아직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며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굳센 신앙입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강렬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치유를 받고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앉은뱅이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긴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리도 큰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까요?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출하여 길을 헤매는 거지 아이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씻겨주고 저희 옷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당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거의 양자로 삼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이 세상은 그렇게 따듯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로부터도 분명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도 사랑해주지 않는 자기를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가 사랑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학교 간 동안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을 갔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찾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보지 못하면 자기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해주려는 사람도 거부하고 밀쳐냅니다. 그렇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게 그 사랑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의 조각을 맛봐야 합니다. 만약 성당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큰 차이가 없다면 미사에 나오는 것만으로 하느님 사랑을 절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가 새끼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와 격리하여 실험하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원숭이는 자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다른 원숭이들을 극도로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원숭이를 넣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어미와 몇 달을 살며 세상이 온통 사랑으로 여겨지는 원숭이를 같은 우리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망 다니다가 그 원숭이가 털을 골라주자 자신도 미안한지 치유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른 원숭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유를 먹고 밥을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단단한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해서 더 딱딱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성당 다니던 한 자매가 스토커에게 쫓겨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매에게 어떤 사람도 신경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옷을 만들어 입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자기를 전기로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증이 생긴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성체 성혈은 너무 멉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보아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성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그 성사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장 발장도 주교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야 다시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습니다. 외적인 선교 이전에 사랑의 친교가 가득한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주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셨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고,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니체).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5,7)
우리는
환난의 파도에 휩쓸리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네.
이 고독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의 못 속에
넣어 주실 분은
세상에
단 한분뿐이심을.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치유를 받은 사람은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하신
지상명령을 받들어 이제는 세상 한가운데서
당당히 서 있어야 합니다.
벳자타라고 불리는 연못에서
치유 받은 이를 축하해주고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주면 되는데...
안식일이냐 아니냐 따지는 게
우리의 구원과 은총에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교회 공동체에서만이라도
따뜻한 위로와 위안이 먼저인데
왜 우리는 서로 못 마땅해 할까요?
그것은 유다인처럼 전통과 관습에 매여있거나
근본주의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고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 덩어리가 가로막고 있어 나도 모르게
속 좁고 찌질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매사에 원리원칙만 따지고
자기 기준과 잣대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더 나아가 단죄하고
건설적인 대안도 없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오늘 복음의 유다인처럼
속 좁고 찌질한 사람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복음 말씀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