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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다해 12월15일 화요일 [(자)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수도회]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스바 3,1-2.9-13
† 복음 마태 21,28-32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오른쪽에 달렸던 강도가 생각납니다.
어쩌면 일생 동안 나쁜 짓을 했을 이 강도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그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지 알 수는 없습니다. 보통으로는
오늘 성경의 맏아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 나중에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가상의 상황이지만 만일 오늘 복음에 나온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늦게라도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그들이 포도밭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일하러 간 맏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사실 저는 약간의 혼란을 느낍니다. 성경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먼저 하느님의 초대를 받았던 이들, 이스라엘
특히 사제들과 원로들을 맏아들로 나타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고 많은 이가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성경 본문이 조금 특이하기에,
한참 생각을 하다 보면 실타래처럼 뒤엉킵니다. 먼저 초대된 이들, 먼저
응답한 이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 마지막에는 과연
누가 먼저 들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복음이 겨냥하는 목표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착실하게 애쓰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추월을 많이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큰아들처럼, 이것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시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끝없이 넓으며, 입학 정원제를 시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말만 그럴 듯 하는 것에 그치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2.9-13
복음
<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드디어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역시 집이 좋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호주에서도 편안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네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또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오늘의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어느 책에서 ‘귀는 활짝 열어놓고 입은 되도록 느리게 열고, 분노는
천천히 내보내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이
말과 정반대로 생활하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만 합니다. 또한 목소리를 높여야 상대방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성급한 판단으로 빨리게 말할 뿐입니다. 자신이
제일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해서 분노를 상대에게 바쁘게
분출하는데 급급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기준으로 세우다보니 화가 가득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을 적극적으로 따른다면 어떨까요? 다른 이들의 말을
듣게 되며, 좀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분노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알면서도 실천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이 사랑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까요? 말만 하고 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비록 처음에는 옳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곧바로
뉘우치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어떤 부모님께서 제게 자신의 자녀에 대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아들은 말로만 잘 하겠다고 하지, 그때뿐 또 말썽을 부려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님과의 기도 중에 잘 하겠다는 말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지만, 말뿐이지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습을 따르기를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처음에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큰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는 작은 아들은 말만 할 뿐 아버지의
뜻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지도자들은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위선으로 가득차서 결국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은 반면에,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바꿔 행동했기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만 그럴 듯 하는 것에 그치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한 삶만이 하늘 나라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귀는 활짝 열어놓고 입은 되도록 느리게 열고, 분노는 천천히
내보내라.’라는 말을 잘 따를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싸움이며, 자기
자신을 이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승리이다(로가우).
우리나라의 반대편 산타는 이렇습니다. ㅋㅋㅋ
90%와 10%의 원칙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90대 10이라는
원칙을 말합니다. 즉, 인생은 10%의 일어나는 사건과 90%의 나의
반응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10%의 일어나는 사건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천재지변 등으로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말하지요. 하지만 나머지 90%는 나의 반응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나의 반응으로 이를 부정적인 인생으로도 반대로 긍정적인 인생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날이 추운거야? 추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네.’, ‘갑자기
추워졌네? 추우니까 정신을 더욱 더 차릴 수 있는데?’, ‘이렇게 추운
날에 힘든 사람들이 있을 텐데……. 내 주위에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등등…….
나의 어떤 반응이냐에 따라 인생 자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10%의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90%의 나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하는 것은 10%의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90%의 나의 반응입니다.
이렇게 따뜻한 곳에 있다가 한국에 오니 춥네요. ㅋㅋㅋ
◈ [서울] 대림 제3주간 화요일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제가 바빠서인지, 듣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성탄’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맘때면 성탄을 떠올리는 노래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고요한 밤, 화이트 크리스마스, 징글벨, 경사롭다.’
주님의 성탄은 곧 다가오는데, 바쁜 일상 때문인지 다들 무심하게
보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당에 있으면 이 무렵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김장을 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본당
달력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성사표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판공을
보기도 하고, 성가대는 성탄미사곡 연습을 하고, 아이들도 성탄 연극을
준비하기도 하고, 노인대학, 레지오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참견을 하며 성탄의 분위기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어제, 오늘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에 대한 ‘면접’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면접을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교리 시험 준비를 잘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성적이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과의 면접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인성이 좋지만 성적 때문에 신학교에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준비를 하도록 권하기도 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쉽게 작년에 지원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올해는 좋은 성적을 얻은 친구를 만나면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이 저의 성격에는 잘 맞지 않는
일이기에 매번 ‘면접’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그리고 연수를
통과해야 하듯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 또한 적절한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매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본당 출신이지만 한
학생은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고, 다른 학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기에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에는 함께 신학교에 다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의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생각은 실천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명의 발달이 되었고,
이것이 역사가 되었고, 이것이 생존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발효와 부패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발효의 과정에도 냄새가 나고, 음식이 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발효된 음식은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고,
새로운 영양을 제공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 변화됩니다.
부패는 그 과정이 발효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패된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기도 하고,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래되어 곰삭은 ‘묵은지, 된장, 간장’은 그 맛이 특별하고, 우리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부패하지 않고 발효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많이 배운 것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율법과
가까이 있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는 일의 직책에
따라서 더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키면 그 신앙은 성장하고, 은은한 영성의 향기가
이웃들을 기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이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의식과 마음이 부패하면 하느님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 보여도,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변화되면 주님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신앙안은 이걸 압니다.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신앙인은 이걸 압니다.
세상이 주는 지위는 겉옷일 뿐 맨 몸은 평등하다는 것 의미 있습니다.
세상은 옷이 날개라며 날개치장에 투자하고 자기내면엔 투자 안합니다.
날개 중심의 사람들은 마음엔 더더구나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겉만 훑어보고 사람의 품위와 가치를 평가하는 어이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든 하늘이지 세상이 아무리 고집해도 안 통합니다.
하늘은 옷 속에 감춰진 정신과 마음만 보는 데 신앙인은 이걸 압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오 21,3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21,31).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약을 어긴 예루살렘의 지도 계급을
비판합니다(3,3-4).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을 잘 알고 엄격하게 지켜왔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 사제와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을까요? 또 스바니야 예언자는 왜
예루살렘 지도계급을 비판하였을까요? 그것은 죄의 유무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삶의 태도와 회개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세리나 창녀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믿었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에 대해 가르치는
요한의 말을 믿지도 생각을 바꾸어 실행하지도 않았습니다(21,32).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원전 8-6세기에 세계를 호령하던 아시리아의 지배 상황에서 예루살렘
지도 계급은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스바 3,2) 그들의 눈에 이웃은 보이지 않았으며 정의를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진리를 실행하는 가난하고 충실한
이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3,12).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루살렘
지도계층처럼 하느님의 뜻에 온순하게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앞세우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고 현세의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이들답게 시간도 돈도
그분을 위해 쓰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도 그분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 시대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처럼 세례를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로서 축성을 받았으니 당연히 구원받으리라는 안일함과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믿음과 영성을 지녔다는 ‘나 홀로 의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적극적으로 생각과 태도를 바꾸거나
가난하고 힘없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채 말로만
떠들어대며 관념의 동굴 속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하느님보다는 자신에 집중하라고 부추기고,
하느님의 힘보다는 돈과 인간의 권력에 의존하도록 길들입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정보가 만들어내는 변화들은 스스로의 내면의 변화와
회개의 의지를 꺾어버리기도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도덕적, 지성적, 정서적 착각의 늪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스바 3,11)
판공성사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한해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노력했지만
돌아보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일도 많았고 이웃을 정성스럽게
사랑하지 못한 적도 많아서 부끄럽기 짝이없네요.
하지만 나의 부족함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고백하고 나면
더이상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게 된답니다.
오늘도 스바니아 예언자를 통해 우리가 맞이하게 될 성탄이 오면
우리의 죄와 악한 행실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확신을 주시네요.
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토록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처럼 째째하게 우리에게 조금 잘못한 사람을
용서 못하고 미워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랍니다.
다만 겸손하게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네요.
판공성사는 그래서 기쁨의 성사입니다.
자비의 성사이고 은총의 성사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백하러 갑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 21,28-32)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체험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새로워지고자 하는 갈망의 가치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간절한 그 무엇이 그들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긍정의 마음이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무시는 말씀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은 새로워집니다.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에게서 삶을 배우는 시간이 대림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자기 정화를 먼저 추구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아픔속에서도 성장이 있듯 어둠에서도 빛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읽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삶의 새로운 발견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진정한 체험이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말을 들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말을 들어라.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 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21,32).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 없는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가 7,29-30).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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