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산최씨(廬山崔氏)
여산 최씨(廬山 崔氏)에 대(對)한 자료(資料)가 없음,
과거(科擧) 급제자(及第者)
최응희(崔應希) 1603년 계묘생(癸卯生) : 무과(武科) 급제(及第) 인조(仁祖) 15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모두 1명 과거 급제자가 있다.
본관(本貫) 연혁(沿革)
본래(本來) 마한국(馬韓國)이었던 익산(益山)은 신라(新羅) 때는 금마군(金馬郡)으로 불렸고,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는 익주(益州)라 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여지도서「형승」조에 “용화산(龍華山)이 북(北)쪽에 우뚝 솟아 있고, 도순산(都順山)이 동쪽에 자리한다. 남(南)쪽에 세 줄기 냇물이 있어 춘포(春浦) 서(西)쪽으로 흘러들어가 해변(海邊)의 항구(港口)에 닿는다. 중앙(中央)에는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다”라고 실려 있는 익산(益山)을 두고 조선(朝鮮)의 문신(文臣) 박초는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오늘날 익산시(益山市)에 딸린 하나의 면인 용안을 두고 임종선은 “기름진 들녘이 바다에 잇닿아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지도서』에는 “비가 와야만 모를 내고 기를 수 있는 10리 규모의 천수답인 낙답평(落沓坪)이 백마강 하류에 자리하고 있다. 조금만 가물어도 흉년이 들고 조금만 홍수가 져도 흉년이 드니 기름진 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임종선이 시에서 한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라고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當時)만 해도 천수답이 그만큼 많았으며, 강 부근에서는 홍수 피해가 극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인 송을개는 기문에서 금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 하기도 하였다.
인구수(人口數)
1985년 통계청 조사 결과로는 0명
2000년 통계청 조사 결과로는 1명으로 나타남.
출처 : 姓氏의 故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