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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묵상글 (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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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는 내용으로서 루카 복음에만 있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파견 얘기 말고도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를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흔두 제자를 주님께서 더 파견하신 걸까요?
아니면 루카 복음사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얘기일까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선교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태오복음은
특히 더 유대인 선교만 생각했기에 열두 사도 파견 얘기만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만을 찾아가라는 얘기까지 하지요.
이에 비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열두 사도 말고도 이방인을 위한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을
다른 두 복음과 달리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로,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대인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화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들만 복음화하는 것은 실제 주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루카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거라”라고 하신 것은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내 가정부터 가까이는 이웃에게 멀리는 세상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고,
일흔두 제자에게뿐 아니라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입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이긴 합니까?
명령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데,
명령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주님 명령일지라도 나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티지는 않습니까?
어쨌거나 가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어떤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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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님처럼>
나의 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그 모든 곳으로
당신 앞서
보잘것없는 나를
기꺼이 보내시니
내가
있는 곳
그 어디에서든
나는
그저 내가 아니라
나의 님이 되어야 하리니
오직
나의 님처럼
따뜻하게 품고
오직
나의 님처럼
부드럽게 어르고
오직
나의 님처럼
아낌없이 나누고
오직
나의 님처럼
오롯하게 함께하고
오직
나의 님처럼
끝까지 살리고
그리하여
나는 사라지고
나의 님은 계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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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민수 11,25).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 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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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더 귀한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지역이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감사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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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키나와’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사르데나’도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사는 섬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에 사는 어르신들은 모두 ‘이키가이’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가치입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정확하게 길을 안내합니다. 마찬가지로 ‘이키가이’가 있는 사람은 삶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10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균형 잡힌 식단, 적당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도 100세 이상 노인이 많은 이유가 된다고 합니다. 사르데나는 마을에 높은 경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사를 매일 오르내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고 합니다. 100세 이상의 노인이 많지만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80세가 넘으면 50% 이상이 요양원엘 간다고 합니다. 가족이 돌볼 여유도 없고, 그만큼 몸이 허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르데나에는 요양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노인들과 대화하고, 아프면 찾아가서 돌봐준다고 합니다. 노인들의 경험과 연륜을 듣는 것이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요양원에서 말년을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것보다 공동체와 함께 말년을 감사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100세 노인들에게는 행복입니다.
동창신부님이 ‘황금전설’이라는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저자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1993년 11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상임이사 겸 부소장으로 일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가톨릭대사전』(전12권)의 편찬 책임을 맡았으며, 상당수의 연구서와 역사 관련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2005년 1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절두산 순교성지(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의 주임 신부를 겸임하면서, 박물관의 수장고 설치 및 전시 시설 보완을 통해 2009년부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지냈다. 2013년 2월부터 시흥4동 성당 주임 신부를, 2019년 2월부터 현재 우면동 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는 『옥스퍼드 교황사전』(존 노먼 데이비슨·켈리 마이클 윌시 지음, 분도출판사, 2014), 『르네상스 미술로 읽는 상징과 표징』(조지 퍼거슨 지음, 일파소, 2019)이 있다.” 저는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신부님은 모든 과목의 수업을 정성껏 필사하였습니다. 시험 때가 되면 많은 신학생들이 신부님의 방을 찾았습니다. 신부님이 필사한 노트를 복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인 노트를 기꺼이 친구들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같은 방을 쓴 적도 있고, 1986년 1월 30일에 같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의 노트필기 습관을 꾸준히 이어서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번역한 신부님께 존경과 찬사를 드립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이키가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이키가이는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편찬하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는 그들의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키가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맡겨진 ‘이키가이’를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인생을 오래 사는 것도 기쁨이지만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상에서의 100살이 아니라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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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파견이라는 말 안에는 그 목적지가 들어있습니다. 아무 곳이나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은 파견이 아닙니다. 파견은 그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목적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
이곳이 바로 자제들의 파견지입니다. 즉 주님께서 가시기 전에 미리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제자들이 갔던 곳에는 주님께서 꼭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화에 관한 이야기로 당부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제자들은 파견된 곳에 가서 평화를 빌어줍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제자들의 역할을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주님의 뜻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이는 온전히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역할도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뒷일은 모두 주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만약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 있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까지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뒷일 역시 주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기억하세요.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어주실까?
어떤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옛날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면
브루스가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기도하는 모든 기도 내용을 들어줍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은 혼돈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한 기도는 누군가에게 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요청한 것을 들어주시기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들어주십니다.
돌아보세요. 분명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이루어져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 기도의 청원은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나와 내 주변을 위한 이기적인 청원은 더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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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신용 정보 회사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에는 실패의 벽이 있습니다. 그곳의 안내문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쓰세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이 방식을 따른 사람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실패에 대해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큰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삶에 실패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패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태어나면서 계속 실패를 경험했던 우리입니다. 아기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넘어졌습니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실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 순간을 한 단계 자기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인간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로 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이 실패했다고 단정했습니다. 악에 패해서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보이는 수난과 죽음이 그냥 단순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져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로 보이는 삶 안에서도 예수님 사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위로와 평화를 전하라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분명 중요한 파견입니다. 또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면서 걱정도 가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가난과 검소한 삶을 강조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세상의 것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서 이 전교 여행이 실패로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외침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 나라는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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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면 차츰 그 행복을 크게 생각하여 남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한다(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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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5.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말씀의 전례 교회 공동체
-친교와 파견-
어제 제 영명축일에는 참 많은 분들로부터 카톡을 통해 축하 메시지를 받고 즉시 감사와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또 새벽 멀리 네팔에서 8월초부터 3개월쯤 머물고 있는 자매로부터 반가운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거의 10여년 이상을 매일 제 강론을 수백분에게 발송해주는 복음 선포의 일꾼입니다. 자매님의 시종여일 한결같은 삶에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시는 신부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네팔 포카라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내면서 행복해 합니다. 신부님이 이른 새벽에 저희들을 위하여 묵상글을 준비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어제에 이어 답신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님 성심상을 배경으로 서서 찍은 제 사진에다 축복기도 바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정성 가득 담아 보낸 대동소이한 메시지입니다. 위 네팔의 자매에게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여전히 언제 어디에서나 말씀의 봉사자로 최선을 다하시네요. 수도원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신부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러고 보니 세상 신자분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는 제 강론글들을 통해 예수님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됨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생명의 말씀을 섭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이지 않는 교회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교회 전례 공동체에 참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신앙생활이겠습니다.
전례중의 전례가 미사전례와 시편 시간경 전례입니다. 이 두 공동전례가 교회 수도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수도원 피정온 분들이나 방문한 분들도 전례에 함께 참여함으로 주님 중심의 전례 공동체에 속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전례기도의 은총으로 주님 중심의 온전한 일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그 회당전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에 벅차 거행하는 말씀의 전례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모세의 율법서를 펴자 온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 다음 무릎을 꿇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에 벅차 우는 온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참 아름다운 전례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쳐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미사때 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참 은혜롭겠습니다. 이런 공동전례가 아니곤 어디서 공동체 일치의 은혜로운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전례의 은총과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힘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한 광야 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이런 전례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온 백성은 선포된 말씀을 알아듣고 함께 먹고 마시며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다.”
라는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공동전례를 통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의 힘으로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자기만족, 자기폐쇠의 전례 공동체가 아닙니다. 곧이어 파견이 뒤따를 때 온전한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친교와 파견은, 복음 선포자로서의 파견은 공동체 생명의 리듬입니다. 파견의 선교가 없는 교회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 제자공동체의 친교의 일치를 위해 나름대로 말씀의 전례를 거행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주님은 일치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총사령관처럼 당신에 앞서 일흔 두명을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마치 당신의 일꾼을, 당신 복음의 전사를 파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로 파견되는 이치는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여전히 오늘날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눕니다.
첫째, 예나 이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습니다. 그러니 수확할 세상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니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나부터 주님의 성실한 일꾼이, 주님의 용감한 전사가 되어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이리떼 세상에 무방비의 양들로 파견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말그대로 자기를 비운 비폭력적 삶의 모습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본질적 무욕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힘이 아닌 존재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파견받은 복음 선포자의 신분입니다. 이리떼 가득한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대책은 없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비울 때 주님의 성령이, 주님의 능력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니 바로 텅빈충만의 기쁨과 행복이요, 주님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힘임을 체험할 것입니다.
셋째, 주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속으로든 겉으로든 진심으로 “평화를 빕니다.” 축복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존재 전체 자체가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 좋은 기도는 주님의 평화를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평화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환대에 감사하면서 번잡하거나 가볍게 처신하지 말고 이런저런 좋은 자리를 찾아 다니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주어지는 접대에 자족하면서 일정한 자리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선교사들에게도 참고할 내용입니다. 이런 무욕과 겸손, 분별과 절제, 예의의 선교사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다섯째, 언제 어디에 자리하던 병자를 치유해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죄도 병도 아픔도 많습니다. 대부분 영육으로 치유받고 구원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 전 내 존재 자체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 살 때 우리를 만나는 이들은 저절로 치유될 것입니다. 얼마전 하늘병원에 진료차 갔을 때 젊은 착한 간호원 둘이 자발적으로 강복을 청해 주었습니다. 강복을 청하는 그 마음이 하늘나라의 실현이요 동시에 영육의 힐링도 일어날 것입니다.
여섯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냉대와 박대로 아니다 싶을 때는 지체없이 단호히, 결연히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충격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무지의 사람들에게 주는 좀 과장된 충격요법의 경고입니다. 참으로 이런 심판은 주님이 아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요 재앙임을 봅니다.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파견받는 일흔 두 제자들은그들이 속한 제자공동체의 주님께 돌아가 그 성과를 보고합니다. 새삼 파견자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지쳐 고갈된 자신들의 영육을 충전시켜야 할 중심자리이자 정주처, 안식처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임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친교 공동체 안에서는 “당신의 제자”로, 세상에서는 하늘나라의 전사이자 일꾼인 “평화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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