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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4년에 걸친 휴식기, 그리고 명예의 전당 입성을 거쳐 다시 한 번 우뚝 선 세 명의 이야기.
2016년 9월 20일
단기간에 세 장의 앨범을 제작 하는 무모한 계획이 불러일으킨 알코올 의존, 그리고 모든 록밴드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 헌액을 경험한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은, 아득히 먼 옛날 밴드에 대한 몇 가지 룰을 정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앨범 발매 및 투어를 끝낸 후 지체 없이 다음 작품 작업에 착수 하는 것이다. 긴 휴식 기간은 밴드를 변질 시켜버린다고 주장 하는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빈티지 자동차랑 같은 셈이지. 타지도 않고 차고에 방치해 두면 녹이 쓸어서 움직이지 않게 되버린다고.’”
세 명은 질주하는 개러지 록 밴드처럼 많을 때는 일주일에 여섯 번씩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바보 같았지.” 베이시스트 마이크 던트가 말했다.
“즐겁긴 했어. 우리들은 멈추지 않고 20년간 그렇게 달려왔던 거야.”
밴드는 큰 성공을 거두고도 자만하지 않고 도전을 계속 해왔다. 빌리 조 암스트롱, 그의 절친인 마이크 던트, 그리고 드러머인 트레 쿨. 이렇게 워킹 클래스 출신 3인조가 2004년에 발매한 ‘American Idiot’은 21세기 록음악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고, 아이라이너를 그린 세 명은 거대한 스타디움 공연을 계속해서 매진 시켜 나갔다. 그리고 2009년에는 ‘American Eulogy : Mass Hysteria/Modern Wolrd’가 포함 된, 전작 이상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작 ‘21st Century Breakdown’을 발표 했다. “모든 것이 시리즈로 장대하게 되어 있었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그 과정에서 그린데이의 중요한 요소였던 바보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애주가로 알려진 암스트롱은 2012년 그 때까지 지켜왔던 어떤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발매일 변경을 강요 당하며 지체 없이 발매 된 3부작 ‘UNO! DOS! TRE!’(‘그것은 확실히 무모한 짓이었다’고 암스트롱은 회상했다)의 제작을 강행하는 한편,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암스트롱의 알코올과 수면제에 대한 의존은 멈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집에서 있을 때 조차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고 했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 때의 나는 완전히 실격이었어.”
알코올을 끊은 지 4년 째인 현재, 암스트롱은 자신을 옭아매어왔던 징크스를 깨려 하고 있다. 그린데이는 10월 7일, 4년 만에 신작 ‘Revolution Radio’를 발매 한다. 28년의 활동 기간 중 가장 긴 공백을 경험 했지만, 암스트롱은 이제 예전과 같이 밴드를 빈티지 자동차에 비유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오클랜드에 새로 지은 스튜디오 2층, 클럽하우스를 연상 시키는 라운지에서 고급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음 지으며 말했다.
“괴로운 일을 겪고 나서 배운 것이 있어. 바로 열정은 억지로 태어나는게 아니라는 것이야. 계속 발버둥 쳐왔지만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했고 어느 순간인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린데이라는 존재에 짓눌려 뭉개질 것만 같았지. 그렇기에 한 번쯤 멈출 필요가 있었던 거야.”
어떤 기믹도 갖고 있지 않은 12곡 수록의 본작은, 그린데이가 15년만에 원점 회귀를 시도한 앨범이다. “이 앨범은 빌리와 트레가 그저 소리를 내놓으며 맞춘 결과물이야.” 던트는 이렇게 말했다.
“’Kerplunk(1992년, 2집)‘를 만들었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소리를 만들어냈던 때가 말이야.”
U2에게 ‘All That You Can’t Behind(2000년 발매) 그랬던 것처럼, 이번 작은 그린데이가 밴드의 뿌리로 돌아가 만든 앨범이다. “지금의 우리들이 만들어야 했던 소리가 무엇인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시기가 있었어.” 암스토롱은 이렇게 말했다.
“그 답은 간단했어. 그냥 그린데이의 소리를 내면 된다는 것이었어. 그린데이 그 자체가 최고니까!”
‘UNO!’ 발매 직후인 2012년 9월 21일, 만취 상태로 iHeartRadio 페스티벌 무대에 선 암스트롱이 취한 행동은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밴드의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에 ‘1 Minute’’이 표시가 눈에 들어왔고 그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웃기지 말라고!” 감정을 들어내며 외쳤다.
“우리들은 1988년부터 이 짓을 해왔다고 쓰레기 같은 놈들아! 1분 남았다고? 난 저스틴 비버가 아니라고 멍청한 놈들아. 까불지 말라고!”
암스트롱은 기타를 산산조각 내고 무대를 떠났고, 던트도 그 뒤를 따랐다.
암스트롱이 만취 상태였던 것은 부정 할 수 없지만, 애초에 팝스타들이 모여 있는 페스티벌에 출연 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펑크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뜻을 굽혀서는 안돼.”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검은 청바지에 검은 컨버스, 검은 색 단추가 달린 다운 셔츠에 폴카 도트 타이, 그리고 빈말이라도 어울린다고 말하기 어려운 브라운 가디건을 입은 그들은 록앤롤 스타이면서 부모이기도 하다. 헤어 젤로 고정 시킨 새까만 머리카락과 오랜 기간 방치 시켜 놓은 빠진 앞니는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이지만 어느새 수염은 희끗희끗해졌다. 어딘가 진정 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학교의 선도위원 눈에 거슬릴 만한 불량함을 떠올리게 한다.
“왕에게 혹사 당하는 노예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들이 뿌린 씨니까. 필요하다면 NO라고 말할 수도 있지.” 그는 약간의 침묵을 갖고 이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거기서 했던 말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던트는 암스트롱이 무대 위에서 한 언행에 변명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지, 어릴 적부터 사귀어 왔던 친구가 타락해가는 것을 입 다문 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 녀석은 완전히 선을 넘어버렸지. 하지만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확실히 말해줘야만 했어. ‘이런 식이라면 밴드도 망해버려. 지금의 너 하고는 같이 연주 할 수 없어. 정신 차려!’라고 말이지.”
암스트롱이 재활 시설에 있는 동안 던트는 격려의 손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어려움에 뜻을 굽혀버린다면 밴드는 끝나 버릴 거야. 하지만 우리들이 이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한 번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 때는 최강의 밴드가 될 거야.”
암스트롱은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알코올을 끊기 위한 노력을 해왔지만, 2003년에 음주 운전으로 체포 당한 사건이 보도 되었을 때 조차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린데이의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인 Foxboro Hottubs가 2010년 뉴욕의 어느 클럽에서 열린 만취 라이브에 대해, 오랜 기간 뮤지션 동료였던 제시 마린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갑자기 바지를 벗고 무대 위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우린 이런 밴드다.’라는 선언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 나 역시 예전에 같은 짓을 한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이미 문제가 심각했던 것일지도 몰라.”
암스트롱과 마린 두사람에게 있어 넘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밤새 음악 얘기로 달아오르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The Replacements의 ‘Little Mascara’가 The Clash의 ‘Death Or Glory’의 표절인가 아닌가 같은 쓸데없는 일로 논쟁을 버리곤 했지.”
‘America Idiot’의 브로드웨이 뮤지컬화를 계기로 암스트롱과 친해진 감독 마이클 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주정뱅이는 만나 본적 없다고. 항상 그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 너무 과하다고 느끼긴 했지. 술이나 약에 빠져 있는 것 같진 않았어. 하지만 선을 넘어 버렸을 때는 상태가 너무 심했으니까. 아마도 버릇이 되어 있던 거였겠지.”
암스트롱 자신이 문제의 심각함을 자각 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때까지의 모습과 달라진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 내 안의 무엇인가가 붕괴되기 시작했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망가져 가고 있다고 느꼈어. 만약 그 당시에 술을 끊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이 곳에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길로 향하지 않은 것에 그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해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립해 나가는 모습을 제대로 봐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아들 제이콥은 이제 곧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똑바로 걸었으면 해. 내가 경험 했던 것 같은 암흑에 빠지는 일 없이.”
알코올을 끊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고 하는 암스트롱은, 다른 멤버들이 자기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눈뜨기가 편해진 아침에 네마리의 개(모죠, 미키, 로키, 클레오 전부 다 밴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를 산책 시키는 등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일상의 기쁨을 느낀다. 오클랜드에 새롭게 오픈 한 기타 샵 Broken Guitars에 들리고, 스튜디오로 발걸음을 옮기고, 귀가 후에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모두와 함께 왕좌의 게임을 보는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가 그에게 있어 큰 기쁨인 것이다.
2년 전, 그와 그의 아내 에드리안은 라스베가스에서 스무번째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는 세레모니를 펼쳤다. 그 날 밤, Rancid의 팀 암스트롱, 마린, 더프 맥케이건, 그리고 트레 쿨과 함께 하룻밤 한정 슈퍼 그룹을 결성하여 베가스의 작은 클럽에서 커버 곡들을 연주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94년에 자택의 정원에서 작은 파티(참가자들이 갖고 왔던 알코올의 총 수량이 1kg 정도였다고 한다)를 여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 했던 암스트롱과 에드리안에게 이 세레모니는 어떤 의미에선 두 사람의 정식 결혼식이기도 했다. “쑥스럽지만 나와 에드리안은 긴 여정을 함께 걸어왔어.“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왔지.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으니까.”(같이 연주한 적도 있는 이들은, 넷이서 녹음한 곡을 첨부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암스트롱의 자택에 있는 스튜디오는 이제는 아버지처럼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 두 명의 아들들에게 점거 당했다고 한다. 조이는 인디 밴드 SWMRS의 드러머, 그리고 제이콥은 The Strokes를 떠올리게 하는 Jakob Danger의 프론트맨으로 활약하며 컬크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Buger Records에서 EP를 발매하기도 했다. “제이콥의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야.”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조이에게 같이 레코딩을 해보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나는 그다지 남들을 칭찬하는 편이 아닌데 그 날 들었던 제이콥의 곡은 정말 놀라웠어. ‘이 녀석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라고 생각 했었지.”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이루어낸 아티스트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린데이는 여전히 DIY 정신을 소중히 여긴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던트는 예전에 버클리의 거대한 자택을 직접 시공했었고, 최근에 들렀을 때는 현재의 집주인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낡은 포드 팔콘의 엔진을 재조립하여 본넷에 스텐실로 조이 라몬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기름 투성이지.” 라고 암스트롱이 말했다.
신작 ‘Revolution Radio’에도 그 정신은 깃들어 있다. 외부에서 프로듀서를 영입하지 않고 오랜 기간 그들의 엔지니어로 일해 온 크리스 듀간과 함께 네 명만으로 비밀리에 레코딩이 진행되었다.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 조차 앨범 제작이 진행 되고 있던 것을 완성 직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페이스로 진행하는 것이 잘될 때도 있지.” 던트가 말했다.
“완성 되려면 아직 멀었냐고 재촉 당하는 건 질색이란 말이지. 우리들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일이니까 하는 게 아니라고.”
인기 프로듀서나 팝스타를 게스트로 초대하여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록밴드를 암스트롱은 비웃는다. “곡을 히트 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게스트를 초대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비꼼 섞인 웃음에는 20년 이상 이어온 커리어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우리들에게 그런 건 필요 하지도 않고 록밴드라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런 짓을 하는 건 겁쟁이 계집애 같은 녀석들이야.”
신작은 그들의 고향인 오클랜드에 새로 지어진 암스트롱의 스튜디오 Otis에서 레코딩 되었다. 스튜디오의 현관에는 척베리의 앨범 자켓 사진이 걸려있고 단상에는 암스트롱의 방대한 7인치 레코드 콜렉션으로 이루어진 빈티지 쥬크 박스가 설치되어 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오래 된 일본 만화책도 보인다. 라운지의 벽에는 거대한 캘리포니아 주기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1955년 할렘의 아폴로 시어터에서 열린 앨런 프리드의 ‘록앤롤 할로윈 파티’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통로에 놓여진 사물함은 암스트롱이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수위로 근무했던 형이 재건축 공사 때 가져 온 것이라 한다. “이걸 봤을 때 정말 놀랐었지.”라고 말하며 열어본 사물함에는, 1990년 3월 16일에 열린 그린데이의 라이브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플로링으로 만들어진 마루 바닥과 천장에 달리 전구가 눈에 띄는 직사각형의 레코딩용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작다(대형 스튜디오의 부엌에도 못미치는 크기다). 밴드는 7월에 막 레코딩을 끝냈고 스튜디오는 아직 기재들로 가득했다. 아레나를 의식한 커다란 드럼 사운드를 녹음하기 위해 그들은 통로와 부스의 옆에 있는 작은 화장실에 마이크를 설치 했다고 한다.
“거기서 일을 볼 때 들려오던 나의 드럼 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라. 문은 열어 놓고 환풍기는 꺼버린 상태였지. 흉내 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게 좋을걸.” 트레 쿨은 이렇게 말했다.
레코딩은 순조롭게 진행 됐지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던트와 7년 전에 결혼 한 아내 브리티니가 유방암에 걸린 것이 밝혀져 쉬는 날에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홉 차례에 걸친 수술과 화학 약물 요법 등으로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던트는 아내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8개월 간 간호에 전념 할 수 있도록 가족 전원이 남부로 이사 했다. “누구라도 좋은 부모로 있고 싶으니까.” 던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강한 여자야. 내가 만약 그녀였다면 ‘난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어’라며 진작에 포기 했을 거야.”
베이시스트로서의 전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던트가 옆에 있다는 것은, 틀림 없이 그녀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간호에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도 던트는 자신의 베이스 플레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 했다. 그는 재즈 교사의 지도 하에 스티비 원더의 ‘Sir Duke’를 완전히 카피 하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파고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암스트롱이 새로운 앨범 제작을 제안 했을 때, 던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고 대답했다. “커리어를 쌓아가며 내가 습득한 것들 중 한가지는, 바로 타이밍을 판별하는 능력이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안돼. 나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해.’라고 확실히 말했었지. 여러 일을 겪은 만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 했어.”
트레 쿨 역시 앨범 제작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는 사라 로즈와 막 결혼한 참이었고 드럼 키트는 부엌에 내버려 둔 채 긴 신혼여행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유럽, 멕시코, 벨리즈, 그리고 자메이카까지 갔었지.”그는 말했다.
“보통의 신혼부부처럼 그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마음 가는 대로 했어. 자신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말이지.”
멘도시노 교외에 있는 히피 사회에서 자란 쿨은, 동경의 대상이었던 다른 세상에서의 생활을 마음껏 누리는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블루베리 색의 스파이크 헤어 스타일에 트레 쿨이라는 이름을 붙인 43세의 남자에게 세상은 넓다 해도 그가 생각하는 정도일 것이다. 장기적인 커리어를 시야에 두고 있는 그는 “60세가 되어도 그린데이의 곡을 연주 할 것이다.”라고 공언하고 있고, 찰리 왓츠에게 장수 하는 드러머가 되기 위한 비결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그러나 ‘고칼로리 에너지 드링크를 섭취하고 힘을 빼고 친다’라는 대답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단적 워커 홀릭인 암스트롱은 장기 휴식을 환영하지 않았다. 과거 수년간 동안에도 The Everly Brothers ‘Songs Our Daddy Taught’의 커버 앨범 ‘Foeverly’를 노라 존스와 공동 작업 하고, Yale repertory theater에서 열린 셰익스피어 풍의 뮤지컬 ‘These Paper Bullets!’에 비틀즈와 꼭 닮은 곡을 다수 제공 했으며 영웅으로 모시는 The Replacements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가하는 등 그의 버라이어티함은 멈출 줄을 몰랐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버전 ‘American Idiot’에서 퇴폐적인 록스타 세인트 지미를 연기 했던 것은 암스트롱에게 있어 어떤 전환점이 되었다. 알코올 의존증에 가속을 더한 건 아니면서도(암스트롱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연기했다고 한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연기의 기회를 모색하게 된 그는 몇 개의 각본을 거절한 끝에 인디 드라메디(드라마와 코메디가 합쳐진 방송 용어) ‘Geezer’에서 중년의 위기에 빠지는 (전)뮤지션을 연기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가 쓴 발라드 곡을 인용하여 ‘Ordinary World’라고 개명 된 44세의 암스트롱의 첫 주연 영화는 ‘Revolution Radio’ 발매 다음 주에 공개 된다. 프레드 아미센, 셀마 블레어도 출연한 본작에서 그는 여러 씬들에서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감독 및 각본을 담당한 리 커크는 만약 이 세계에서 성공하지 않았다면 어떤 길을 걷고 있었을지 암스트롱에게 상상하도록 조언했다고 한다.
“만약 ‘Dookie’가 천만장이나 팔리지 않았다면 빌리는 주인공과 완전히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의 출연은, 암스트롱의 연기에 대한 욕구를 더욱더 부채질 했다.
“정말로 연기를 더 하고 싶어. 진짜 뮤지션으로서 뮤지컬에 출연하던가 말이지. 미숙하더라도 상관없어. ‘Ordinary World’의 촬영 때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모를 때도 있었어. 그래도 틀림없이 그때의 경험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였어.”
‘Ordinary World’의 중년의 위기라는 주제는 ‘Revolution Radio’에도 등장한다. 10대의 젊은이가 안고 있는 혼란을 훌륭하게 그려낸 암스트롱은 중년의 위기에도 똑같은 리얼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닐까라고 느낄 때가 있어.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틀림없이 진실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그런 식의 생각이 들 때가 있지.”
The Who를 떠올리게 하는 앨범의 첫 곡 ‘Somewhere Now’에서 암스트롱은 ‘병든 영혼’을 노래한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우울함을 극복하려 발버둥치는 그 감각. 그거야말로 이 앨범의 주제야.”
이번 작에서 암스트롱은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한 지금의 미국에 대한 생각을 스트레이트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오래 된 Dead Kennedys의 앨범 쟈켓을 연상 시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의 횡포에 가까운 폭력(그는 90년대에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 한 적이 있다). 그리고 Black Lives Matter Movement(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는, 본작에 있어서 메인 테마 중 하나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것들, 그것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야.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차 안에서 얻어 맞고, 형무소에 갇힌 채 거액의 보석금을 요구 당한다니 미쳤다고 밖에 할 수 없어. 그런 상황들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은 문제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야. ‘Blue Lives Matter(경찰관의 목숨도 소중하다)’, ‘ALL Lives Matter(모든 인류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와 같은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려 하지 말고 말이지. 우선은 가만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해. 행동으로 옮기는 건 그 다음이야.”
‘Revolution Radio’의 퍼스트 싱글 ‘Bang Bang’이 예고 없이 발표 된 다음 날, 1963년식 볼보로 버클리의 길만 스트리트를 달리고 있던 트레 쿨은 그린데이의 역사가 시작 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대형 마트나 맨션이 늘어 서있는 곳을 가리키며 원래 저 곳에는 낡은 창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목적지까지 반마일쯤 남은 곳에서 대쉬보드의 엔진등에 불이 들어왔고 차는 푹푹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곧 이렇게 고철이 될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그는 진심으로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교통량이 적은 도로의 주차 스폿까지 차를 밀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은 먼 옛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그에게 펑크의 신이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들은 아무도 없는 클럽을 향해 걸어갔다. 쿨이 밴드에 가입한 80년대 후반, 그린데이가 빈번히 출연했던 ‘924 길만’은 지금도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멤피스의 Sun Studio처럼 외견상으론 별다른 특징이 없는 건물이다. “내부도 그다지 화려하진 않아.” 쿨은 그리운듯한 얼굴로 말했다. 창문에는 최근 출연했던 밴드들의 스티커가 붙여져 있고 그 중에는 Jacob Danger의 스티커도 있었다(나중에 이 무대에 섰을 때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군.’).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발매로부터 20년 이상 지난 1994년 발매 된 ‘Dookie’가 이제는 마찬가지로 20년 이상 된 작품이 되었다는 것에 그들은 감개무량함을 느낀다고 한다. “’Dookie’랑 ‘Insomniac’이 나왔을 때, 자주 이런 말을 했었어.” 쿨이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클래식 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레드 제플린 등과 함께 섞여서 우리들의 곡도 방송에 나올 거야 라고. 물론 그 당시에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진짜로 라디오에서 레드 제플린 곡 다음에 우리들 곡이 나오곤 한단 말이지.”
파워 코드를 주로 사용한 심플의 극치인 음악성으로 그린데이는 KISS 못지 않은 빅밴드로 성장했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결코 줄지 않고 있다. 최근 아들 제이콥의 라이브를 보러 갔던 암스트롱은 Destroy Boys라 불리는 10대 소년 3인조와 만났다고 한다. 천진난만함이 묻어있는 개러지 록을 연주하는 그들은 그린데이가 그랬던 것처럼 고교 시절에 데뷔 앨범을 발매한 참이었다. 암스트롱이 경영하는 기타 샵 Broken Guitars에서 취재를 하고 있을 때, 그들은 갑자기 가게로 들어와서 ‘우리들은 Destroy Boys입니다!’라고 외쳤다. 암스트롱은 그들에게 받은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어 바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많은 베테랑 밴드들과 다르게 지금도 젊은 팬들을 늘려가고 있는 그린데이는 라이브에 오는 관객들 역시 젊은이들 위주다. 그러나 작년에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이루어 낸 후에 이루어진 ‘924 길만’에서의 시크릿 라이브에 모인 관객들의 연령층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높았다고 한다. 90년대 초에 리얼 타임으로 펑크 씬을 경험 했던 사람들로 가득 찬 클럽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어른이 된 펑크 세대들의 동창회 같았다. “정말 감상적이었어.” 암스트롱이 말했다. “플로어에 있던 건 그리운 사람들 뿐이었으니까. 당시에는 피어스 투성이에 염색한 머리였던 녀석들이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어.” 암스트롱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펑크를 내세웠던 그들은 교사나 아티스트, 작가 등 각자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옛날 친구들과 재회한 느낌이었어. 40년 간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실감하지. 믿기 어렵지만 인생은 긴 여행이야.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여기에 있어.”
암스트롱이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인생 최후의 라이브였다면 나는 어떤 후회도 없이 은퇴 할 수 있을 거야.”
번역 : 하작가
원문 링크 : http://rollingstonejapan.com/articles/detail/26669
** 일본 잡지 기사 번역은 7년 전 유학 시절에 했던 메탈리카 특집 기사 및 멤버 별 인터뷰 이 후로 처음입니다. 그린데이의 최신 앨범이 발매 된 작년 9월 쯤에 기재 된, 꽤 시간이 지난 기사지만 내용도 좋고 무엇보다 그린데이의 내한 혹은 일본 공연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번역 해보았습니다.**
첫댓글 재밌게 읽었어요
저도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그린데이카페로 스크랩하겠습니당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