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와 불륜, 혼인과 독신
에제 16,1-15.60.63; 마태 19,3-12 /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2024.8.16.
오늘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 제16장은 예루살렘을 의인화 시켜 풀어놓은 유배 이전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계약을 맺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고, 에제키엘은 이 우상숭배의 역사를 부정한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역사로 회고합니다. 버려진 아기가 왕비가 되기까지, 숭고한 사랑과 저속한 불륜이 나란히 등장하는, 그래서 읽기도 듣기도 거북스러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일깨워주고자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바빌론 유배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오기 위해 정화되어야 하는 속죄의 기간이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비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 남자들은 자비스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불륜의 혐의만 보여도 그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을 예수님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륜은 아내의 경우보다 남편에게서 더 많이 벌어질 가능성이 큰데도 그러했습니다. 이 매정하고 얄궂은 세태를 드러내는 질문이 바로,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도덕적 흠결을 핑계로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바리사이들의 얄궂은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는 부모를 떠나 혼인하면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인한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되고, 부부는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부부가 힘을 합해도 헤쳐 나가기 쉽지 않은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라면 바리사이들은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부부가 일치를 깨뜨리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내에게 문제가 생기면 남편이 이혼해도 좋은지를 물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고약한 물음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 결합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제한적인 말씀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혼인에 관한 제대로된 답변이라면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맺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더 강조하시는 말씀이 나왔을 것입니다. 부부가 자신의 사랑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졌음을 잊지 말아야만 그 은총으로 세파를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결혼을 남편과 아내의 양자계약으로 보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남편와 아내와 하느님 사이의 삼자계약으로 봅니다. 부부의 사랑 사이에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가치를 따져 교환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인격체라는 현실은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빛을 발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부부라야 그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는 자녀들도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치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독신 역시 하느님께 향한 신앙의 힘으로만 온전히 지켜질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함께 독신을 서원한 공동체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힘이 살아있을 때 독신의 어려움도 잘 극복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고대교회의 교부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은총과 의지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은총 없이 의지만으로 실천될 수도 없고 의지 없이 은총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가정이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이건, 하느님의 은총과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의지가 발휘될 때 성가정을 이룬 평신도들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충실히 살아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진실된 성과 사랑의 가치를 보여주는 예표로서 그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부부의 혼인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계승해 온 혼인성사의 은총을 신자 부부들이 고이 간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신자 가정의 성화를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충실히 살아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범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혼인에 빗대어 가르친 에제키엘 예언자의 메시지도 매우 소중합니다. 그만큼 에제키엘은 동족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처럼 친밀하고 소중하게 여기기를 소망했습니다. 함부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해석하자면,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사랑과 정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힘과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에제키엘 예언자의 어법으로 풀이하자면, 사랑과 정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혼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고, 힘과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은 겨레를 배우자처럼 받아 주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어제는 광복 79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강압으로 주권을 빼앗겼던 식민 통치의 어둠에서 독립된 나라로 살아갈 수 있는 빛을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독립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중이 일어나 맨손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 운동 투사들이 만주 벌판에서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피를 흘려 싸웠던 역사를 친일매국노들의 세 치 혀로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극우 세력이 지배하는 일본 정부는 백 년 전 강제로 한국을 합병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힘을 앞세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 겨레를 노예로 삼았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탈했으며 노동자를 강제로 징병하고 소녀들을 성 노예로 삼아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반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일본 정부가 저지르는 이렇듯 부당한 역사적 불의를 편들고 이를 노골적으로 정당화하는 친일매국인사들을 앞장세워 국민을 세뇌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에 반발한 광복회와 독립투사 유족들 그리고 야당들은 별도의 광복절 경축식을 열었습니다. 일제강점의 지난 과거 역사에 대한 이견이 이토록 큰 것입니다. 이러니 향후 완전한 광복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공동선에 대한 합의도 어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에제키엘 예언자의 메시지에 비추어 보면, 사랑과 정의라는 가치는 힘과 이익을 앞세운 불의를 바탕으로 해서는 결코 세울 수 없고 자유라는 가치 역시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고 책임은 사랑과 자유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고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동안 우리 사회는 가치의 정립을 위해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그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의 성화, 하느님과의 관계 정립, 힘이나 이익보다 사랑과 정의라는 가치를 우위에 두는 사회 질서가 우리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