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신미대사(信眉大師) / 작성자: 현산
1443년 완성, 3년 후 1446년 9월(음)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반포.
세종25년(50세)에 세계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한글이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에 신미대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모르고 있다.
세종대왕이 붕어 전 유지로 祐國利世 慧覺尊者(우국이세 혜각존자) 법호를 내렸다.
유학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祐國利世는 삭제되고 慧覺尊者 칭호만 후세에 전한다.
22세에 즉위한 세종대왕은 젊은 시절부터 워낙 독서에 열중한 탓에 40세 무렵부터는 독서가 어려울 정도로 안질이 악화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한글 완성 1년 전부터는 장자 문종 왕세자가 대리청정하였으며, 훈민정음 반포 4년 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신미대사는 세조와도 친밀한 사이가 되어 세조가 후원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낙성식에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케 하여 고질병인 피부병을 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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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세계불후의 명작으로서 우리 한민족 최고의 자랑거리다. 이 위대한 한글은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의기상통 투합해 만들어낸 작품이며, 한글창제는 신미대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혁명이었다고 본다. 한글 완성 후 주역인 신미대사가 홀연 사라진 건 유학자들의 세상에서 당신의 승려라는 신분이 새로 탄생한 옥동자 한글에 흠집이 될까 염려한 뜻이었을 게다.
수없는 외침의 능욕과 초근목피 가난에 허덕이던 중국대륙변방의 척박한 땅 한반도, 그 중에서도 북한의 무력위협을 등에 멘 반쪽의 소국으로 오늘날 세계10위권의 대한민국, 세계 속의 한민족으로 웅비할 수 있었던 건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5천년 한민족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최고의 문화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문화혁명과 박정희대통령의 국가개조 국민개조의 산업혁명 덕분이다. 박대통령의 산업혁명도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특히 21세기 지구를 지배하는 IT산업에서 한국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건 한글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오늘 568회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과 더불어 우리국민이 반드시 기리고 추모해야 할 분이 신미대사(信眉大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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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유학이 지배층의 사상 이념이었고 유학은 한문을 바탕으로 한다. 유학자들에게 한문은 사상 이념의 표상일 뿐 아니라 지배층을 이루는 특권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집현전학사들이 한글창제의 공로자로 알려진 건 부수적으로 참여하거나 한글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세종대왕의 원모심려였다고 본다. 한글창제를 주도했음이 분명한 신미대사가 공적을 나타내지 않은 것도 유학자들의 한글 흠집 내기에 빌미를 주기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라는 뜻밖의 혁명을 꿈꾼 원동력은 애민(愛民) 즉 인간에 대한 차별 없는 자비심의 발로였다. 세종대왕의 품성은 노비에 대한 혁신적인 조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소유물로 보던 노비에게 주인의 사형(私刑)을 금하고,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리며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고, 출산 1개월 전에는 쉴 수도 있도록 했다. 나는 세종대왕의 수많은 빛나는 업적 중 한글 다음으로 이게 자랑스럽다.
범어에 능통하고 유불선에 두루 달통한 신미대사의 하와중생(下化衆生) 보살원이 이런 세종대왕을 만남으로서 상상불허의 문화혁명을 이룬 것으로 본다. 스승도 배울 책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범어에 능통할 수 있었고 음운학까지 일가견을 가질 수 있었던지는 불가사의하다. 한글이 대중화 될 수 있었던 게 조선이 망한 덕분이란 사실도 불가측한 하늘의 역사이고...
세종대왕/ 1397.4.10 ~ 1450.2.17(음력), 태조 이방원의 셋째아들
1418년(22세)부터 1450년(54세)까지 32년간 재위
1418년 ~ 1422년 : 부왕 태종이 태상왕으로 대리청정 4년
1422년 ~ 1442년 : 친정 20년
1442년 ~ 1450년 : 붕어할 때까지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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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信眉大師)/ 1403년 ~1480년, 본명 김수성(金守省)
충북 영동 김훈의 장남, 본관 영산(永山)
집현전 학사에서 법주사로 출가, 범어에 능통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함
성종 11년 77세로 열반, 속리산 복천사에 부도(충북 문화재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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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하나 붙입니다. / 地中海
오늘은 568 돌을 맞는 한글날입니다.
세종25년(1443)에,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여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또 쓸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요즘들어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하나 -
우리의 한글 '훈민정음'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당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던스님인 신미대사(信眉大師: 호는慧覺尊者, 본명은金守省,1403~1480)의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미대사는 세종,문종,세조에 이르는 3대의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고승(高僧)으로 범어(梵語)와 티벳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습니다. 이 스님이 세종의 부름을 받고 집현전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충북 영동의 영산김씨(永山金氏)인 스님가문의 족보에는 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집현원학사득총어세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즉 스님이 집현전 학사였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스님이 수행정진했던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의 사적비에도 스님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해주고, 한글 창제에 응용할 수 있는 문자들을 수집,분석하는 등, 훈민정음창제에 지대한 역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창제의 초석을 다진 스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시주하고, 스님에게는 祐國利世 慧覺尊者(우국이세 혜각존자)라는 법호를 내렸는데,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로 祐國利世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慧覺尊者라는 칭호만 후세에 전해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쳤던 관계로 스님이 집현전에서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실록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세종29년 6월5일자 실록기사에「김수온의 형이 출가해 스님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했다.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이 심히 믿고 좋아해, 신미를 높은자리에 앉게하고, 무릎을 꿇어 절하고 예절을 다해 공양하고......」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작가 정찬주씨는 소설 "천강에 비친 달" (천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대사가 이룬 '한글창제'의 진실을 이야기한 소설) 에서 위 내용을 잘 담고있다고 합니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그런 신미대사를 존경하여 후일, 대사와 한글보급정책을 의논하기 위해 스님을 자주 찾곤 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