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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5년 1월 1일 입니다.
2개월 전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후 1달 만에 퇴원
퇴원한 지 1개월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긴박했던 순간들, 절망의 순간들, 기도의 힘, 가족의 힘을 느끼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삶을 통하여
임마누엘 하느님을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산방산 목욕탕에도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음악도 듣고
먹고싶은 음식도 먹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2년 전 아내와 함께 한 국내성지순례를 회상하며
그때의 감정과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2022년 위령성월을 맞아 국내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 증보판을 구입했다.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는 111곳이 수록되어 있는데
증보판에는 59곳이 추가되고 3곳이 삭제되어 167곳으로 늘었다.
아내는 2013년 성지순례를 시작해 111곳 중 반 이상을 했지만
10년이 된 지금까지 완료를 못했는데,
어떤 성지는 5번 이상 순례한 곳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함께 순례를 도와 내년까지 완료할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니까~
장시간 집을 비울 수가 없고 본당 제대꽃꽂이와
농사일을 감안해서 한 번에 열흘 정도씩 나누어서 하기로 했다
제주도에서 차량을 육지로 가지고 가서 전국을 3~4 지역으로 나누어
순례하기로 하고 1차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했다.
민구(개) 밥주는 문제와 산책은 근처에 살고있는 대자에게 부탁하고
마늘밭에 물 주는 것은 선녀씨에게 부탁했다.
일주일 전부터 일자별로 방문할 곳을 최단거리 루트로 정하고
숙박할 곳을 정하고 음식점등도 알아놓았다.
초행길이라 스케줄이 달라질 수 있어 숙박예약을 이틀 전에 하기로 했다.
여행은 늘 그렇듯이 실제여행보다는 계획을 짜면서
더 즐거운 것 같았다.
신혼여행을 설악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처가에서 마치는 7박 8일을 했기에,
42년 만에 하는 이번 부부 순례여행도 기대되었다.
그리고 신혼여행과 순례여행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2022.11.2(수)
오늘 묵을 숙소를 창성장으로 정하고 며칠 전 예약을 했다.
어제 마트에서 구입한 물건들과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싣고
제주연안여객 터미널을 향해 11시에 집을 나섰다.
13시 40분 출발하는 제누비아(JENUVIA)호에 배를 선적하고
대합실에게 기다리다가 승선했다.
4시간 30분 배를 타고 18시 10분에 도착하여 숙소로 가기 전에
산정동성당(가톨릭 목포성지)에 들렀다.
1. 가톨릭목포성지
가톨릭목포성지는 광주대교구의 신앙이 처음 전파된 시원지이자
옛 교구청이 위치한 신앙의 요람이다.
한국전쟁 때 순교한 세 분의 사제가 사목했던 곳이며
국내에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The Legion of Mary)가 처음 도입된
산정동성당 일원(一圓) 목포시 산정동 90-1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광주·전남 지역 가톨릭교회의 시발점이자 선교 활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곳이다.
산정동 성당
Basilica Minor(준대성전)
세계에서 5번째
아시아에서는 3번째
※준대성전이란?
준대성전은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에 붙여진 명예로운 칭호로서
교황님에 의해 그 특전이 부여됩니다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은 우리나라 첫 번째 준대성전 입니다
창성장(숙소)
9호 온돌 70,000원
전 국회의원 손혜원 조카가 운영하는 곳으로
옛날 여관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곳으로 방이 작지만
편리하게 디자인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인기가 있다.
예약은 카톡으로만 받는다.
우리가 잔 방은 온돌방으로 색동이불이 놓여 있어서
신혼여행 때 추억이 떠올랐다.
목포에 도착한 후 성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7시 30분이 되었다.
사전에 알아본 음식점에 전화하니 모두 문을 닫는 시간이다(오후 8시)
근처에 있는 민어골목으로 가서 민어회와 저녁을 먹었다.
색동이불을 덮고 자니 신혼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일 일정이 빡빡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 순례책자에는 없지만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에 있는 곳을 발견(다산초당)하여
급히 스케줄에 끼워 넣다보니 2시간이 지체되어 일정이 빡빡해졌다.
5시에 기상하고 공용주방에서 누룽지를 끓여먹고 커피 마시고
6시에 다산초당으로 출발했다.
순례가 끝나고 나주 지하터널 통과할 때 과속위반을 했다는
30,000 원의 범칙금 통보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에 서두르다보니 그리된 것이다.
"급할수록 천천히'라는 말이 생각난다.
2. 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3.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
나주 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대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 베드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
네 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4. 곡성 옥 터(곡성 성당)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27년 전라남도 곡성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5. 영광 순교자 기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 신자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로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만이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하였고,
김치명과 유문보는 병인박해 때 공주와 나주에서 각각 순교하였으며,
배교자 이우집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영광성당은 영광 출신 이화백과 양반 오씨(성명 미상)가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것을 기리고자
2010년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6. 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고창 개갑 장터는 신유박해 때 고창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이 처형된 장소다.
최여겸은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후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되며
전라도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강석진 요셉 신부는 최여겸 마티아의 삶과 개갑장터 성지의 영성에 대해
무시, 모욕, 천대를 견디는 십자가의 영성이라고 순교자의 길을 글로 남겼습니다.
‘시끌벅적 새벽부터 사람들이 개갑 장으로 몰려오던 날,
농악대 소리가 시장 입구부터 요란하다,
그 사내의 저고리는 찢겨져 있고 목에 걸린 명패에는 죄목이 적혀있습니다.
사학죄인(邪學罪人), 등에는 큰 북이 얹혀있고
포졸은 미친 듯이 북을 두드려 댑니다.
북소리와 포졸들의 행렬에 맞추어 지친 그 사내는
개갑장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고 장터에 있던 행인들은
수치심이 뼈 속까지 저려오는 그 사내를 바라 봅니다
사형집행을 알리는 소리와 사형판결문이 낭독되고
그 사내의 이름이 적막을 부숩니다.
최여겸. 사내는 혀로도 말이 없고 눈으로도 말이 없지만
그토록 보고 싶은 늙으신 어머니를 뵙지 못해
이승에서 마지막 절을 드리지 못한 아쉬움 뿐,
하늘 그분께만 자신을 맡긴 채 사형판결문을 들고 있습니다.
손을 뒤로 묶은 채 무릎을 꿇리며 목 앞부분에 나무토막을 대자
최여겸은 몸을 굽혀 땅을 바라봅니다.
오직 천국 본향만을 그리워한 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그 순교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업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속에
복자 최여겸(마티아)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순교 직전 늙으신 어머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으나
박해 당국자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최여겸은 어머니를 만나,
그녀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7. 김제 순교 성지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김제 동헌은
하느님의 종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45세를 일기로 참수 치명한 순교의 터전이다.
한정흠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오늘 2일차 순례여정을 마쳤다.
오늘 숙소는 김제에 있는 지평선모텔(온돌 45,000원)이다.
모텔에서 제주 마트에서 구입한 아귀구이를 안주삼아 맥주 2캔 마시면서
내일 묵을 숙소를 찾아보았다.
전주 나비잠한옥호텔에 문의했으나 만실로 방이 없었다.
금요일로 주말이기도 하지만, 인기가 있어 1주일 분이 마감된 상태다.
서둘러 다른 곳을 알아보았지만 쉽지않았고
겨우 조금 비싼 호텔(130,000원)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 순례장소를 이동하며 숙식을 하는 것이 42년 전 신혼여행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설악산 - 도고 - 직지사 - 부여 - 남원 - 전주 - 광주 - 부산으로 다니며
주로 시외버스를 이용한 것 같아.
아내가 떠준 커플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오징어,땅콩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날씨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8. 초남이 성지
초남이성지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가 나고 자란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박해의 위협 속에서 복음을 몸소 실천한 삶의 현장이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초남이에 초대하여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였고,
장남 유중철 요한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하였을 때 이를 지켜주기로 결심하였으며,
같은 뜻을 지닌 한양의 이순이 루갈다와 혼례를 추진하였다.
동정부부는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4년 동안 함께 동정을 지켰다.
특히 이순이가 옥중에서 친정 식구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초남이의 가정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정과 이웃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복음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은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며,
대역부도죄인으로 여겨진 유항검의 가족은 연좌형에 따라,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전주옥에서,
이순이 루갈다, 유중성 마태오, 신희와 이육희는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유항검의 어린 자녀들은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특히 유항검의 막내딸 유섬이는 9살의 나이에 거제도로 유배 가,
그곳에서 71세가 될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이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초남이의 궁궐 같은 집은 파가저택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 웅덩이로 만드는 바람에 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일부 웅덩이 자리 위에 지금의 성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거행한 시복식에서
유항검과 장남 부부인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
차남인 유문석, 조카인 유중성이 복자로 선포되었다.
9. 전주 숲정이 성지
“이곳은 천주교인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거룩한 땅이다!”
숲정이는 조선시대에 군사훈련 지휘소가 있던 곳으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던 처형장이었다.
당시엔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숲머리" 혹은 "숲정이"라 불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의 첫 천주교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아내와 제수,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신태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경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등이 순교했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 등 여러 사람이 순교했다.
이곳은 유항검이 처형된 풍남문 밖의 전동성당,
유항검과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이다.
10. 전주 옥 터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여서 신자들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혀 심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교살되었고,
이순이 루갈다는 옥중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 때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11. 초록바위. 서천교
초록바위는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12. 전동 순교 성지
전동성당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가
1791년 12월 8일에 참수되어 순교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순교터이다.
1801년 10월 24일에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관검이 이곳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고,
이어 김유산 토마스와 이우집은 참수로 순교하였다.
89년 봄, 전동 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 보두네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다.
오늘 전동성당에서는 행사가 있어서 차량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왔다고 사정을 하여 30분 시간을 얻었다.
근처는 전주한옥마을로 주차를 할 수 없었기에 특혜를 받은 것이지요.
특히 주말을 맞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활보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성탄 구유만들 때 사용할 한지구입과
상점을 아이쇼핑한다고 하여 한옥마을에서 내리고
혼자서 치명자산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여러 번 치명자산 성지를 다녀왔기에
다음 코스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13. 치명자산성지
이 산은 옛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등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4. 되재성당지(升峙聖堂址, 승치성당터)
되재성당은 1895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서울 약현동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되재'라는 말은 고개가 되다(=매우 힘들다)라는 뜻이라는 설과
고개가 꼭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성당 문고리에 숟가락으로 끼워놓아 그냥 지나치는 순례객이 많음.
우리도 순례도장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관할본당인 고산성당에 전화했으나
전화를 받지않아(점심시간이라 사무장 부재) 직접성당을 방문(16.8km)
마침 여성교우 한 분이 성체조배하고 있어 되재성당지에 순례도장이 없다고 말하자,
문고리에 끼워진 숟가락을 빼고 열면 안에 있다고 해서 다시 방문함.
1시간 지체했지만 고산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다.
15. 천호성지(天呼聖址)
천호성지(天呼聖址)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시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베드로), 성 손선지(베드로),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무명 순교자들과
그 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알지 못한 채 묻혀 계신다.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天呼)을 알아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째 바친 것이다.
얼마전 이탈리아에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오신 쟌바울라 수녀님 묘소가
천호성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참배하고 수녀님께서
건강하게 소임을 잘 하고 있다고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