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부터 이와모토 6단, 고수기 4단 일행이 방중하게 된다.
이와모토는 1940년대 중반 하시모토우타로(橋本宇太朗)와 함께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인물로 혁혁한 토너먼트 프로.
그때 처음으로 바둑 선진국인 일본 프로와 대국할 기회가 생겼는데, 이와모토에게 오청원은 석 점을 놓고 2연승, 두 점을 놓고 2집 패를 당한다.
그리고 고수기에겐 두 점으로 이긴다.
'북경의 천재소년'은 12세 여름에 일본프로와 자연스레 두 점 치수로 공인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초단과 5단 사이에서는 공식 승단시합에서는 두 점 이상을 놓던 시절이었다.
그 후 일본에서도 북경의 천재소년을 데려오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오청원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며 스승이 되는 세고에겐사쿠(瀨越憲作)와는 무려 5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았다.
세고에의 오청원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오청원과 조훈현은 같은 스승의 문파에 속한 사형(師兄).
제자 욕심이 많았던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로서 한국의 조훈현을 택한다.
세고에의 제자 중 또 한 명은 훗날 본인방에 오르는 하시모토우타로.
따라서 세고에는 한중일 삼국의 최고수 급인 오청원 조훈현 하시모토 세 사람을 제자로 둔 행복한 사나이였다.
1927년. 드디어 13세의 소년 오청원은 베이징 일인자가 된다.
그해 여름 또 다른 일본프로 이노우에 5단에게 두 점 바둑에서 승리, 정선으로 세 판을 두어 1승1무1패를 기록한다.
일본에서는 4단 이상은 고단자로 불렀고, 고단자와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이노우에와 정선이었다는 것은 오청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 193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 오청원은 오른쪽에 안경을 꼈다.
1928년 오청원의 스승이 될 세고에의 뜻을 받들어 하시모토가 또 찾아온다.
하시모토는 이노우에와 함께 후지사와 사카다 같은 걸물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하던 거물.
그 하시모토에게 오청원은 정선으로 덤벼 4집승, 6집승을 거두는 초괴력을 과시한다.
불과 14세의 소년의 기력이 일본의 신예 최강그룹과 맞먹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제 도일(渡日) 시점이 코앞에 다가왔다.
오청원이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28년 10월이었다.
일종의 용병으로 2년 계약이었다.
그러나 2년 후에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의 땅 일본을 등지고 다시 중국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바둑의 메이저리그였다.
과연 이 소년에게 몇 단(段)을 윤허할 것인가.
몇 단(段)을 주느냐는 오청원의 자존심이기 이전에 일본기사의 자존심도 걸려있던 중차대한 문제였다.
당시 단은 절대의 권위였다.
지금처럼 프로시합이 없었고 오직 승단대회가 최고 권위의 승부시합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절.
같은 프로라도 치수가 단위에 따라 달랐다.
여전히 토박이 정신에 투철한 기사들은 굴러온 돌 오청원이 기껏해야 초단밖에 더 되겠냐고 비아냥거렸다.
그의 스승 세고에만은 오청원이 3단 실력은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3단격(格)으로 간주하고 정식 단위 인정시험을 치르게 된다.
첫 상대는 그 해 정기 승단시합에서 1위를 차지한 시노하라 4단.
오청원은 흑을 들고 불계승을 거둔다.
2국은 수재 명인(슈사이 名人)과의 2점 바둑이었다.
수재 명인은 지금으로 치면 굵직한 타이틀을 전부 보유한, '9단 이상의 단'처럼 권위로도 최고의 존재.
본인방 수재는 35Kg에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청원은 여기서도 당당히 4집승을 거두었다.
명인에게 2점 바둑을 이긴 후 다시 무라지마 4단에게는 흑5집승. 비로소 오청원은 정식 3단을 인정받게 된다.
▲ 본인방 수재(本因坊 秀哉)와 시험기를 치르는 오청원(왼쪽).
3단을 인정받고 난 다음 오청원이 일본 바둑계로 곧장 뛰어든 건 아니다.
그는 평소에도 몸이 약해 장시간 두는 바둑은 힘들어 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진단 결과는 실망이었다.
"가슴에 결핵의 자연 치유 흔적이 있어 재발될 우려가 있다.
선천적으로 몸도 허약하다.
따라서 기사의 목숨을 건 승단시합에는 불참을 권유 한다."
단위의 높고 낮음으로 그 신분의 높낮이도 결정된다고 할 만큼 중시되던 승단시합.
일본에서는 승단시합을 대수합(大手合)이라 부른다.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첫해엔 오청원은 잡지나 신문바둑을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벤트 바둑이라고 보면 된다.
잡지사에서 주최하여 그 기보를 연재하기로 약속한 그런 임시 대회였다.
--- 3부에서 계속
첫댓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오청원9단님의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됩니다.
좋은 바둑 이야기 올려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다물님 설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정모에 반갑게 만나요.
31일 쯤 번개모임 가지면 어떨까요?
일년 계획,
설계도 완성?
설계가 탄탄하기
바라며...
오청원님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았습니까?
감사합니다.
북경의 천재소년에서
14세의 나이로 세고에의 제자로 일본에 건너간 오청원,,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면서 ~~감사드립니다 ~
명절 연휴,즐거운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
본격적인 치수 고치기
시합이 시작 됩니다.
새로운 곳에서의 뿌리
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분투하는 "오청원".
감동입니다
샛별이 초롱초롱한때,
답글을 주섰군요.
감사합니다.
자주 들려 주십시요.
배달한검님, 반갑습니다^^
바둑방에서 뵙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