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큰 자부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정의와 그분의 평화와 형제애를 말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고, 인간적인 논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하나의 선언,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마태 28,6; 사도 2,32 참조)는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세상에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마주하여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제껏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그들 곁에 살아 계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307쪽 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외면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우리의 인생도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의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 6,4-11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우리도 그분의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을 새롭게 다짐합시다.
2. 우리는 사랑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제자들은 모두 서둘러 길을 갑니다. 왜 그들은 뛰어갔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가슴 벅차도록 뛰게 했을까요? 무엇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했을까요?(마태 28,8; 루카 24,9; 요한 20,2 참조). 무엇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한 걸음에 무덤으로 달려가게 했을까요?(요한 20,4 참조). 무엇이 베드로를 물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해변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 가게 했을까요?(요한 21,7 참조). 이들에게는 한 가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들 마음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지상에서 그분께 충실한 사랑을 지녔던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 체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는 자리는 언제나 사랑으로 시작되고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고 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 자신도 부활의 영광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공동체인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인생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 위대한 사랑에 감사하며 세상에서 이 놀랍고도 아름다운 주님 사랑의 증인이 되어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부활을 믿는 우리를 통해 우리와 가까운 곳에, 그리고 또 먼 곳까지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이 미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3. 우리는 희망의 증인입니다
오늘 부활 미사의 복음에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는 광경을 보자 그들이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3)고 했습니다. 예전처럼 지금도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위세를 떨칩니다. 부가 특정한 소수에게 집중되고, 비참한 가난이 증대되는 경제적 불의가 난무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산더미처럼 먹다 남은 음식이 버려집니다. 어느 순간 종교처럼 되어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논리, 자본의 논리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터전인 대자연이 올바로 보호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불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부활의 복음 말씀에 다시 귀 기울여 봅시다. 파스카 날 이른 아침에(마태 28,1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부패하도록, 끝내 실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덤을 굳게 닫아놓았던 돌을 굴려 떨어져 나가게 하시고, 사람들의 죄악으로 유발된 모든 불의와 절망의 상황을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뒤바꾸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간 모든 이가 결코 죽음의 권세 아래에 내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보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불의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덤에서조차 생명이 움터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빛으로 언제나 희망을 얻는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의 의로움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불의를, 모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대자연의 모든 것이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돋아나는 온갖 나무의 잎새와 생생하게 피어나는 들꽃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의 믿음도 봄날의 햇살처럼 촉촉한 봄비같이 다시 깨어나 새롭게 부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사신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생각하며 부활을 새로이 살고자 다짐하는 모든 신자 여러분에게 복되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부활의 기쁨 안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고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2023년 4월 9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 종 강 시몬 주교
부활의 삶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마 아기를 업어 아이가 등 뒤에 매달려 있는데도 아기를 잃어버렸는줄 알고
애타게 찾는 건망증의 예를 표현하는 속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속담이 너무 과장되고 허황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아! 이 속담이 결코 과장이 아니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인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선배 신부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과 통화하며 식당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입고 있는 상의와
바지 주머니를 만져보고는 핸드폰이 주머니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놀라서 선배 신부님에게 “신부님! 제가 식당에 핸드폰을 놓고 온거 같아요.
다시 전화 드릴게요.”라고 급하게 말하니, 선배 신부님께서 “무슨 소리야?
지금 통화는 무엇으로 하는 건데?”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예전에 예를 들어가며 강의를 하다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도 많고, 요리한다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놓은 채로
다른 일을 하다가 음식을 다 태워버린 적도 여러 번 있고,
부끄럽지만 화장실에 다녀와서 깜빡 잊고 시원하게(?) 다닌 적도 있지만,
이토록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이건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무서워질 정도였습니다.
제 건망증을 한탄하며 사순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부활 시기의 많은 일정을 잊지 않으려고 꼼꼼히 메모하고 확인을 하다가
문득 내 ‘영적 건망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중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시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수차례 제자들에게 당신은 머지않아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스승의 현세적인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고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덤이 비어있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에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 보고서야, 잊고 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게 됩니다(요한 20, 1-9).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의 즐거움과 탐욕과 시기의 감정에 정신이 팔려 주님께 약속하고 서약했던
많은 것들을 다 잊고, 항상 더 달라 청하고 고난은 멀리하게 해주십사고 애원합니다.
마치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주머니에 핸드폰이 없다고 식당으로 뛰어 들어가던
‘건망증’처럼, 주님의 은총을 가득 받고서도 난 받은 게 없다고 불평하며
부활 선물을 달라고 떼를 쓰는 ‘중증 영적 건망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약속받은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는데도 이 생이 전부인양 머물고 매달리며 집착하는
영적 건망증을 어찌해야 할까요? 이렇게 주님을 잊고 있다가 종국에 주님 대전에
나아가 주님을 뵙고도 몰라보는 영적 치매로 악화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부활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글; 한영기 바오로 신부 – 성 라자로 마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