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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병풍에서 족자로 변한, 국보 제139호 군선도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1. 29.
1.군선도
군선도(群仙圖, 국보 제139호), 이 그림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가 1776년 봄에(32세) 그린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중의 대표작으로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2.8센티미터, 가로 575.8센티미터지만 원래는 8폭짜리 병풍으로 그려진 것을 6․25사변을 겪으면서 3개의 족자로 분리 표구되어 지금에 전한다.
군선도
단원이 32살 때에 그린 그림으로 서왕모(西王母)의 집에 복숭아가 무르익자, 8신선들이 약수(弱水)를 건너 초대되어 가는 모습이다. 본래는 8폭짜리 병풍이었으나 민규식의 부인이 6.25 난리 통에 그림만을 오려 가지고 부산으로 가져왔다. 일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손재형이 입수했고, 현재는 3개의 족자로 분리 표구되어 삼성미슬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군선도 부분도
군선도 부분도
그림에 나타난 신선들은 중국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인물들로, 실제로는 살았던 시대가 서로 다르나 8선(八仙)이란 개념으로 통합되어 마치 동일 시대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림은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반도(蟠桃, 천도복숭아)가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집에 익었다고 하자, 신선들이 약수(弱水)의 파도를 건너 초대되어 가는 모습이다. 그림은 배경이 모두 생략된 채 신선과 그를 모시는 동자를 세 무리로 나뉘어 옛 사람의 시각 습관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진시키고 있다. 특히 행진 방향에 따라 인물의 숫자를 줄인 것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주목시키게 하고, 등 뒤에서 부는 바람으로 옷자락이 힘차게 나부껴 그림 전체에 생동감과 박진감을 불어넣었다.
신선들의 이름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으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오른쪽의 무리에서,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가 일행을 선도하고 그 뒤로 두건을 쓴 종리권(鍾離權), 두루마기에 붓을 든 문창(文昌), 복숭아를 손으로 받쳐 든 동방삭(東方朔)이 보이고,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호리병을 들여다보는 이철괴(李鐵拐)와, 맨 머리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여동빈(呂洞賓)도 보인다. 가운데 족자에는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張果老), 딱다기를 치는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漁鼓簡子:竹筒)와 술통을 든 한상자(韓湘子)가 보인다. 그리고 여신선을 표현한 왼쪽 족자에는 영지를 허리에 매달고 곡괭이에 꽃바구니를 매단 꽃의 여신 남채화(藍采和)와 복숭아를 든 하선고(何仙姑)가 보인다.
이 그림은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해서 청색, 갈색, 주홍색을 곁들여 그렸는데, 인물의 윤곽은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그리고, 얼굴, 손, 기물들은 정확하고 섬세하게 처리하였다. 또 옷은 담청을 주로 해서 엷은 음영만 나타내고, 얼굴은 담갈색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 ‘丙申春寫(병인춘사)’ 라는 관기(款記)와 ‘士能(사능)’이라는 자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김홍도인(‘金弘道印)’․‘사능(士能)’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전체적으로 인물만을 배치한 구성과 제각기 살아 넘치는 인물의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2.서화와 술을 사랑한 풍류객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으로 인물, 산수, 화조, 풍속화에 모두 능한 천재 화가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사람으로 자(字)는 사능, 호는 단원․단구(丹丘)․서호(西湖)등 여러 개를 썼다.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그의 호를 따서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도 좋았으며 넓은 마음씨에 성격까지 활발해 신선과 같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분재를 팔고 있었다. 매우 기이한 것으로 가지고는 싶었으나 김홍도는 살 돈이 없어 안타깝게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려 달라며 삼천 냥을 보내왔다. 그러자 김홍도는 이천 냥을 들여 매화를 사고, 팔백 냥으로 몇 말의 술을 사서는 벗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백 냥은 쌀과 땔감을 사는 밑천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하루 생계조차도 되지 못했다.
이 일화를 통해서 김홍도의 통 크고 멋스러운 풍류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궁중의 화원이 된 김홍도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29세 때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는 영광까지 누렸다. 기예를 인정받은 김홍도는 이듬해에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게 된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는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관동팔경들을 두루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받쳤다. 이것은 지방을 직접 돌며 산천경개를 감상할 수 없는 임금의 처지를 생각해 화원으로 하여금 승경(勝景)을 대신 그려 오게 한 것이다. 40대 후반에 든 김홍도는 충북 연풍(延豊) 현감에 제수 받아 약 3년 간 근무하기도 했다. 이는 화원에게는 파격적인 영광으로 그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대변한다. 경상도 문경과 지척인 연풍은 현재 괴산에 속한 면으로 높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고장이다.
옛 말에 ‘연풍은 울며 왔다가 울며 떠나는 고장’이란 말이 있다. 양반으로 태어나 꽃구경 한 번 못하고 온 종일 글공부만 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 팔자 좀 펴 보겠다고 송별회까지 마치고 연풍으로 접어든 현감,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첩첩산중에 시냇물 소리뿐이었다. 백성은 어디에 있고 술을 만들 농토는 어디에 있는가? 기가 막혔다. 그러자 기대만큼이나 억울하고 원통한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세월은 흘러 임기가 찬 현감이 연풍을 떠날 때이다. 그는 또 가마 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뿌려야 했다.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에 가득 찼던 나날이었던가! 비록 벽촌이지만 먹고 입기에 부족함이 없고 백성들은 검소하고 온순하여 나를 어버이처럼 따르듯 했다. 백성들은 철따라 꿩, 돼지고기를 가져와 잡수라고 권했고, 방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는 잣죽의 별미, 멧돼지에 송이버섯을 안주 삼아 문경 새재의 타는 듯한 단풍을 즐기며 문경 현감과 기울이던 국화주, 말 한 마디 손끝 하나에 정성을 수북이 담아 주는 관속들의 따스하고 흐뭇한 인정미. 아! 어디를 가면 다시 이런 즐거움을 구경할 수 있겠는가!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한 김홍도는 연풍에 머물며 상암사(上菴寺)에 치성으로 불공을 드려 김양기(金良驥)를 얻었다. 그러나 두 해에 걸쳐 삼남지방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김홍도는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의 만년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병과 가난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한다. 어느 날, 멋들어지게 춘정을 불태웠던 기생을 바라보며 김홍도가 지은 시조가 전한다.
먼데 닭 울었느냐 품에 든 임 가려하네
이제 보내고도 반 밤이 남으리니
차라리 보내지 말고 남은 정을 펴리라
3.병풍에서 그림만 떼어오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군선도가 19세기에 들어 순조와 철종 조의 세도 정치, 민란, 그리고 후반기에 열강 제국의 침략과 약탈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 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자료로 확인되는 것은 고작 일제 시대의 일로 합천에 사는 임상종(林尙鍾)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그는 호가 해려(海旅)로 천석지기의 부자였다고 한다. 고서화 수집에 깊이 빠진 임상종은 가진 재산을 처분하며 고서화를 사 모았고, 마침내 돈이 떨어지자 남의 돈까지 빌려다 투자를 했다. 하루는 친구가 임상종을 불러 따끔한 충고를 했다.
“여보게, 어쩌려고 빚까지 내어 그림을 사 모으나?”
그늘진 얼굴에 술잔을 든 임상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라고 아나. 그림만 쳐다보고 있으면….”
“사람에게는 분수가 있는 법이라네. 내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정신 좀 차리게.”
“가진 것은 팔기가 싫고 남의 물건은 자꾸 탐이 나니 할 수 없지 않는가?”
고서화를 비롯한 고미술품은 팔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그 물건을 가지고 싶어 안달 복걸하는 사람을 만나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다.
“허 허, 세상에는 기막힌 물건은 많고 가진 돈은 한정이 있으니 언제나 밑지는 장사 아닌가?”
“돈이 원수일세. 돈만 있다면 모조리 쓸어 모을 수 있을 텐데.”
임상종은 친구의 충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이 없음을 한탄했다. 친구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혀만 차고 돌아섰다.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임상종은 급기야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군선도를 비롯한 고서화를 맡기고는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썼다. 당시에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다. 마치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서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로 넘어갔다. 욕심이 부른 파멸이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임상종의 손아귀에는 손바닥만한 고서화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고리대금업자 최상규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곧 임자를 찾아 나섰다. 그때 소문을 듣고 군선도를 차지한 사람이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차남인 민규식(閔奎植)이었다. 일부에선 이 그림을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 소장하다가 민규식에게 양도했다고도 한다. 김용진은 19세기말에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金炳國)의 양손자로 1905년 관직을 떠난 뒤에는 오직 서화 수집에만 전념한 사람이다.
민영휘는 19세기 후반부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온갖 영화를 누린 인물로, 명성황후가 집권할 당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로 소문났었다. 갑오개혁이 있고서는 유배까지 갔지만, 1910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까지 받아 친일파로 행동했다. 그는 일본을 등에 업고서는 장안의 갑부가 되었다. 권력과 돈을 이용한 그가 천일 은행(天一銀行)과 휘문학원(徽文學院)을 설립한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민규식 또한 장안의 거부로 소문났고, 그가 고서화를 수집하자 골동계에 소문이 금세 퍼졌다.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민규식이 소장하던 군선도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51년 1․4후퇴 직후의 부산에서였다. 당시 부산은 인민군 치하에서 숨죽여 살았던 서울의 기라성 같은 수집가들이 1․4후퇴를 기해 소장품을 몽땅 싸 들고 내려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던 때였다. 수장가들은 골동 가게에 모여 전세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소장한 고미술품도 팔고 샀다. 어느 날, 부산 시청 앞 대로변에 자리잡은 고두동(高斗東)의 가게에 낮선 여자가 들어왔다. 그 가게는 아담한 이층집으로 일본식 집이었다. 점포와 창고까지 갖춘 가게의 이층은 다다미방인데, 서재로 사용했다.
그때 가게에는 인민군 치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1․4후퇴 때에 가까스로 피난 온 손재형도 함께 있었다. 그는 들어선 여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골동품을 거래하면서 서로 안면이 있던 민규식의 부인이었다.
“언제 내려오셨어요? 민 선생은요?”
반가운 표정으로 손재형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인민군이 잡아갔어요.”
여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인가 코를 훌쩍이더니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민규식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두동이란 골동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눈물을 훔쳐 낸 부인이 두루마리에 싼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재형이 두루마리를 풀고 그 안을 살폈다. 그러자 천하의 명품인 군선도가 나왔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혹시 이것이 병풍 아니었나요?”
그러자 민규식의 부인이 또 다시 울먹였다.
“예. 본래 병풍이었는데 피난 보따리에 병풍을 넣을 수 없어서 그림만 오려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민규식의 부인은 급한 김에 병풍에서 그림만 떼어 둘둘 말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또 다시 치마를 끌어다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팔려고요?”
그녀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이 그림은 고미술품을 수집하던 장석구(張錫九)에 의해 500만 환에 이야기되었지만 너무나 어이없게도 군선도는 일본으로 밀반출되고 말았다. 전세가 불리하자, 민규식의 부인은 군선도를 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경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아들에게 보냈다. 김홍도의 대작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이 손재형이다. 국보급 문화재의 반출에 대해 그는 가슴을 치며 통탄하고, 하루빨리 되찾아 오라고 민규식의 부인을 다그쳤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본으로 전보를 쳤다.
하늘이 도왔던지 이 그림은 그때까지 팔리지 않은 채 그 아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9․28수복으로 한국의 정세가 안정되자, 군선도는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온 군선도를 손재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당한 값을 치르고 인수했다. 그 후 군선도는 정치에 투신한 손재형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자 ‘세한도’ 부분에서 이미 다룬 내용과 같이 삼성의 이병철에게 옮아갔다. 군선도는 1971년 12. 21일 국보 제139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호암미술관을 거쳐 삼성미술관 리움에 진열되어 있다.
(참고:①이영섭씨가 「월간 문화재」에 기고한 글 ‘문화재계 비화’.②「화선 김홍도 그 인간과 예술」- 오주석, ③「대동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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