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22>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을까?(下)
난공불락 콘스탄티노플
무너뜨린 ‘우르반의 거포’<巨砲>
수차례에 걸쳐서 도시의 방어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한 메흐메트 2세는 제국의 전 역량을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전군(全軍)에 동원령을 발동해 총 10만 명에 육박하는 대군을 모았다.
여기에는 오스만제국의 정예병력인 예니체리 군단과 아나톨리아 보병대는 물론이고 슬라브인·헝가리인·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비정규군들도 수천 명씩 포함돼 있었다.
헝가리 태생 대포 제작자 우르반이 만든 거포(巨砲). 이 거포의 가공할 위력은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결국 무너뜨렸다. |
술탄 메흐메트 2세, 가공할 위력의 대포 만들어 53일간 5만 발 발사
천년 역사 이어온 견고한 성벽 균열…오스만제국 새로운 수도로 선포
술탄 메흐메트 2세 병력이 콘스탄티노플 성을 공격하는 모습.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을 끈 것은 헝가리 태생의 대포 제작자 우르반(Urban)과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거대한 대포였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젊은 술탄의 환대에 감동한 우르반은 헝가리 출신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대포 제작에 매진했다.
얼마 후 마침내 세계사를 바꾼 무기로 회자되는 ‘우르반의 거포(巨砲)’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작이 완성된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 8.5m에다 청동제 포열의 두께는 무려 20㎝에 달했다. 어찌나 무거운지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에디르네에서 제작한 대포를 콘스탄티노플 외곽까지 운반하는 데 육중한 황소 60마리가 동원될 정도였다. 대포는 지름이 64㎝에 이르는 석환(石丸)을 1.6㎞까지 날려 보냈다. 당대에 이에 필적할 만한 무기가 없을 정도로 가히 가공할 위력을 지닌 술탄의 비밀병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메흐메트 2세는 드디어 1453년 3월 초 당시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즉각 항복하고 성문을 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난공불락의 성벽이 지켜주리라고 굳게 믿은 비잔티움 황제는 술탄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낙관이 심각한 비관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밀병기, 우르반의 대포가 그 진가를 드러낸 것이었다. 대포에 관해 보고를 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이었다. 한 달여 숨 고르기 끝에 술탄은 드디어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군대에 공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1453년 4월 12일, 최전방에 배치된 포대가 불을 뿜으면서 역사적인 전투의 막이 올랐다. 우르반의 거포가 하루에 거의 일곱 번씩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향해 육중한 석환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장 53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포격이 이어졌다. 사전에 포격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 특히 다량의 화약을 확보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술탄의 군대는 공성 기간 중 화약 25만톤을 사용해 거의 5만 발에 달하는 거대한 대포알을 콘스탄티노플 성벽으로 발사했다. 이날의 공성전은 화약 무기 시대의 본격적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매일 날아간 거대한 돌덩이들이 견고한 성벽에 점차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천 년에 걸쳐 강화돼온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붕괴는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을 의미했다. 거포에서 발사된 포탄은 성벽을 넘어 시내 한복판에 떨어지기도 했다. 도시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비잔티움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열세한 병력을 이끌고 성벽에 의지해 거의 한 달 이상을 버텨냈다. 하지만 점차 수비병들의 피로가 누적되고 비축된 물자가 바닥을 드러냈다. 온갖 불길한 소문이 떠돌면서 도시민들의 사기마저 빠르게 떨어졌다. 오스만제국의 공격이 개시되기 이전에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통합을 조건으로 서방 진영에 지원을 요청한 바 있으나 이미 때가 늦었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실상 당시 서유럽 각국은 내부 문제로 인해 먼 동방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랜 백년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독일의 제후들은 서로 이전투구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5월 29일 오스만군은 총공세로 돌입했다. 우선 비정규군으로 구성된 보조병 부대가 한바탕 휘저은 후 곧바로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의 파상 공세가 이어졌다. 공격이 도시 북서쪽의 취약한 성벽지대에 집중된 탓에 점차 방어선이 흐트러졌다. 이때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 군단의 공세가 이어지면서 잘 버텨오던 수비대의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침투한 예니체리 병사가 외성 성탑에 오스만제국의 초승달 깃발을 내걸었다. 사투 끝에 오스만의 병사들이 내벽의 망루를 장악하고 성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곳으로 오스만제국의 병사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성벽에 의지해 불과 7000명의 병력으로 수성(守城)에 임하던 비잔티움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격전의 와중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술탄의 병사들은 소피아 대성당 앞 황제의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성당의 청동문 뒤로는 수많은 도시 주민이 몰려들어 각자의 수호성인에게 도움을 간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염원도 약탈과 살상을 막을 수 없었다. 술탄은 이 도시를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했다. 이어서 도시 및 동방교회의 상징이던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시켰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동방정교회의 심장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의 중심도시로 명함이 바뀌었다.
사건의 역사적 영향
1453년 5월 29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천 년의 세월 동안 존속해온 비잔티움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아준 방파제,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그 이교도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은 온 유럽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무엇인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듯한 두려움이 유럽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도 그럴 것이 긴 세월 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존재감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스만제국은 이를 발판으로 동지중해 및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서양의 축성술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 대포의 위력 앞에서 중세의 기존 성곽은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됐다. 중세의 성벽은 향상된 대포의 포격을 견디기에는 부적합했다. 높은 성탑은 적에게 포격목표와 그 사거리까지 가늠케 하는 애물단지로 변했다. 대포의 성능 향상과 반비례해 중세 성의 정치·군사적 기능은 약화됐고, 포대의 공성(攻城)에 대응할 수 있는 고비용의 새로운 축성술이 절실해졌다. 중세처럼 한 지역의 영주가 자신의 성에 의지해 안보를 담보하던 시대는 이제 옛말이 됐다. 대포가 대형화되면서 마을의 대장간에서 망치질로 주조하던 시대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근력 무기의 시대가 아닌 화약 무기의 시대, 기병의 시대가 아닌 보병의 시대, 그리고 중세 봉건국가가 아닌 절대왕정의 시대가 바야흐로 개막된 것이었다.
화려함을 자랑한 한 세력이 쇠하면 다른 기운이 부상하는 것이 역사 전개의 이치인 듯, 비잔티움제국의 멸망은 유럽의 새로운 변화인 르네상스를 자극했다. 천 년 넘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간직해온 비잔티움제국이 사라지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특히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면서 이들과 함께 온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이 르네상스라는 근대의 흐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흔히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수중으로 떨어진 1453년을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내주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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