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83
♧ 개경에 부는 등극의 바람 .
왕도 개경에 폭풍이 지나갔다.
송악산도 무너지고 오천(烏川)도 뒤집어질 광풍이었다. 고려를 폐하고 한양으로 몰려간 신생국 조선의 주역들이, 개경으로 몰려와 거센 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방간과 방원의 싸움을 사서는 물론 교과서에도 '제2차 왕자의 난' 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방간과 방원의 싸움은 '난' 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건지겠다는 구국일념도, 폭정를 일삼는 군주를 몰아내겠다는 명분도 없었다.
오로지 형제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 뿐이다. 영역 다툼을 하는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싸움질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난' 이라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국의 침략을 병자호란, 정묘호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건 분명 전쟁이다.
피 기득권층이 기득권층을 상대로 봉기하는 것을 난이라 한다면, 전쟁은 국가의 총동원 하에 살육과 방화와 약탈이 자행된다. 무고한 백성들은 희생과 학살이 뒤따랐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백성들의 피해가 거의 없었던 방간과 방원의 쟁투는 그들만의 싸움이었다. 그냥 정변에 불과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는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승패는 갈렸다.
패배자는 방간이었고 승리자는 방원이었다.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 역시 패배자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후속조치가 취해졌다. 연복사에 모여 회합을 가진 방원 일당은 방간을 살려둘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삼성(三省)의 이름으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토산으로 귀양 보낸 방간을 개경으로 끌어다 처형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임금의 지친에게 흉측한 장래가 있으면 반드시 베는 것입니다. 이것은 '춘추(春秋)'의 법도입니다.
방간이 동복아우로서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왕실을 보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였으니 법대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疏)가 비록 적법하나 내가 어찌 골육지친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차마 동모제(同母弟)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정종임금이 소를 보고서 통곡하여 울었다. 형제를 죽일 수 없다는 정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방간의 처형을 거두고 귀양지를 안산으로 옮겼다.
안산은 이숙번의 아성이다. 토산은 동북면과 가까워 태조이성계와 방간을 지지하는 세력이 어떤 일을 꾸밀지 염려스러웠다.
동북면은 태조 이성계의 오랜 연고지역이고 방간이 한때 다스렸던 고을이다.
혁명의 설계사 하륜으로부터 상소가 올라왔다. 방원을 세자로 하자는 것이다. 예정된 수순의 길목으로 가는 징검다리이다.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靖安公)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이번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소서."
"경(卿)의 말이 옳다."
자신의 적장자를 무시하고 왕의 아우를 세자로 하자는 데 정종 이방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제를 세자로 하는 변칙도 때론 통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이란 1급수보다 혼탁한 물을 좋아하는 생태 환경적 친화력이 강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용상에 앉아 있었지만 정종 임금은 힘이 없었다.
정종은 도승지 이문화에게 전지(傳旨)했다.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번의 변란은 나라의 근본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다.
나에게 얼자(孽子: 서자)가 있으나 혼미하고 유약하여 외방에 둔 지가 오래다. 동복아우 정안공(靖安公)을 세자를 삼아 또 내외의 여러 군사를 도독(都督)하게 한다."
군권까지 방원에게 준다는 것이다. 왕이 군권까지 내주었으니 허수아비의 길로 들어섰다, 어쩌면 등극 그 자체부터 식물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빠르게 재편되었다. 좌정승에 성석린 우정승에 민제가 발탁되었다. 민제는 방원의 장인이고 하륜의 친구이다.
방원이 세자의 신분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무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호종했다. 조정이 텅 비어 국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호곶(壺串: 경기도 장단)에서 매를 놓고 사냥하는 흥겨운 놀이였지만 군사 수백명이 뒤따랐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리를 내놓지 않고 버티고 있는 정종 임금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두번이나 지켜봐야 했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다. 국사에 관여하지 않고 흥천사와 정릉사를 오가며 먼저 떠난 신덕왕후와 이제 그리고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어 불귀의 객이 된 방석의 영혼을 위로하는 불사를 벌렸다.
태조 이성계가 신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베풀 것 이라는 정보가 방원의 사저에 날아들었다.
"덕비께서 참석하신 다는데 정빈도 참석하시구려." 방원이 말을 꺼냈다.
덕비(德妃)는 정종 비이고 정빈(貞嬪)은 세자비로서 방원의 부인 민씨를 이르는 말이다.
"세자께서도 참석하시어 태상왕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자가 참석하면 아버님의 심기가 불편하여 아니 감만 못할 것입니다. 정빈만 다녀오시구려."
권력은 바람이다. 태조 이성계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방원은 사양했다. 부인 민씨가 몸종을 거느리고 신암사(神巖寺) 불사에 참석했다. 시주도 두둑이 했다.
부인 강씨 신덕왕후와 방번과 방석 그리고 사위 이제의 극락왕생을 비는 태조 이성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불사에 몰입했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지켜보는 민씨는 가시방석이었다.
이때였다. 불사를 주관하던 주지스님이 몸을 비비 꼬며 비틀대다가 죽어 버렸다.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깊은 산속 산사는 소동이 벌어지고 불사는 중단되었다.
불미한 일을 겪은 태조 이성계는 불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정빈 민씨는 자신의 죄업만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황당한 일을 목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직접 찾기로 마음먹었다. 개경인들의 눈이 부끄러워 칠흑 같이 어두운 사경(四更, 1시~3시)에 개경을 떠났다.
정종이 부랴부랴 서둘러 아버지를 지송(祗送)하고자 숭인문에 이르렀으나, 태조 이성계 일행을 따라잡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원은 따라붙었다.
130여필의 마필이 동원된 태상왕 행차가 임진나루를 건너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다.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자신의 행차에 방원이 따라붙은 것을 발견한 태조 이성계는 행차를 멈추라 명했다.
"네가 따라오면 신도에 가지 아니하고 행차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 갈 것이다. 냉큼 돌아가거라." 불호령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명에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대장군(大將軍) 박순이 붙잡았다.
"태상왕께서 비록 저하로 하여금 따라 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돌아가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상왕께서 한양에서 오대산으로 거둥 하신다는데 만일 저하가 따라가시면 태상왕께서 반드시 가시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천을 발섭(跋涉)하여 멀리 오대산에 가실 것이니 뒤에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갔다. 한양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에서 정근법석(精勤法席)을 베풀고 옷을 벗어 부처에게 시사(施捨)한 다음 오대산으로 떠나버렸다. 태상왕의 행적이 오리무중에 빠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법왕도승통(法王都僧統) 설오(雪悟)를 한양에 보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청하였지만, 설오가 오히려 설득당하여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져 버렸다.
"창업한 임금은 자손이 마땅히 받드는 법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태상왕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수상(首相)과 두세 훈로(勳老)를 보내어 나라 사람의 정을 진솔하게 전달해서 거가를 돌이키도록 청하여 성체(聖體)를 보전하고 편안하게 하여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태상왕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비록 재상을 시켜 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힘없는 임금을 마구 흔들어대는 실세들 속에서 정종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방원 때문에 상심한 아버지를 돌이킬 미력도 없었고, 아우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부복하여 석고대죄 하라 설득할 힘도 없었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었다.
임금이 힘을 잃고 흐느적댈수록 방원 세력의 압박은 거세어졌다. 좌우에 포진한 방원의 추종세력 때문에 정종 이방과는 숨 막힐 지경이었다.
견디지 못한 정종은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을 불렀다.
"왕세자(王世子)에게 선위(禪位)하겠다."
도승지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라 명했다.
폭탄 아닌 폭탄선언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며칠 전부터 수창궁 후원에 밤마다 부엉이가 나타나 울고 여우가 울더니만 불측한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정종 이방과에게는 어쩌면 홀가분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학문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는 교서(敎書)를 받들고,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은 국보(國寶)를 받들어 인수부(仁壽府)에 나아가 방원에게 바쳤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