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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묵상글 (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기적과 회개. 등 )
*** 08:50. 반영억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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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적과 회개>
하느님께서
나 있게 하심이
기적이요
하느님 뜻대로
나 있음이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기적이요
하느님과
내가 함께함이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나에게 보내심이
기적이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사람을 품는 것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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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경고도 사랑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 얘기의 끝에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자들은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소돔보다도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경고에 이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하시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경고는,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곳 사람들이 불행해지라고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이고
경고를 통해 그들을 돌아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고는 주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불행은 경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행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이고,
불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발작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불행이며
그래서 불행에서 돌아설 기회를 날려 버리는 불행입니다.
사실 이들은 기적을 보고도 그것을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린 자들입니다.
기적마저 그렇게 만든 그들이었니 듣기 싫은 경고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로 그것이요,
경고의 주님을 행복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 인간이 감히 행복을 꿈꾸다니요.
더욱이 신자라면서 하느님 없이 행복을 꿈꾸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 바자회를 합니다.
기도와 관심 부탁 드리고, 오셔서 함께해주시기를 또한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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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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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을 잘 듣는 사람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 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게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5)하셨으니 사랑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주님의 품에 머물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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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목정보 10월호에 곽승룡 신부님의 ‘부정한 생각 간파하기’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찰과 식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의식 성찰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양심 성찰, 영의 식별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성찰과 식별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자세히 살피면 성찰은 내가 하는 것이고, 식별은 주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곧 의식 성찰의 감사, 은총을 청함, 성찰 반성, 개선할 결심들은 내가 합니다. 식별에는 기준이 있는데, 주님의 눈인 성경 말씀으로 자신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에 이끌려서 말씀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식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식별을 통해서 문제의 깊은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 그렇게 하기는 힘들지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는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적 식별에서 문제의 깊은 의미를 간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악이란 무엇인가? 원수는 누구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고백성사’의 다섯 가지 단계가 생각났습니다. 고백성사는 ‘성찰, 통회, 결심, 고백, 보속’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묵시록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성찰, 통회, 결심‘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찰, 통회, 결심‘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을 할 때 고백성사의 은사가 온전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찰, 통회, 결심’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유배지에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찰과 통회를 보시고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진심으로 성찰하고, 회개한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결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성찰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봅니다. 지도에는 한결같이 ‘현 위치’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하는 신앙인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릇된 길로 가곤합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도 올바른 방향으로 사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매일 드리는 저녁기도에도 반성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이 한 죄를 사를 뉘우치오니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행복하여라! 밤낮으로 주님의 가르침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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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예로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드십니다.
여러분은 회개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회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을 것입니다.
저는 회개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하늘나라도 방향 지어 걸어가기.’
이렇게 걸어가는 회개의 길에서 우리는 가끔 길을 잘못 들어섭니다. 우리는 가끔 어두운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사막과 같은 건조한 길에 들어설 때도 있습니다.
또한 알면서도 나 자신을 속이는 어두운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 길이 밝은 길도 옳은 길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을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회개의 길은 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그 맹세는 거짓 맹세로 우리에게 죄책감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악마는 우리의 죄책감을 이용해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회개의 길은 우연한 길입니다. 다시금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입니다. 몇백 번, 몇천 번이라도 좋습니다. 늘 하느님을 향하는 곳으로 우리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의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회개의 길을 걷습니다. 매 순간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말입니다.
요리는 맛을 그리는 것이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 아시죠?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류의 고전 중 고전일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대사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리는 맛을 그리는 것이다.
맞습니다.
요리는 맛을 그리는 것입니다.
어떤 재료로 언제, 어떻게, 무엇을 이용해서….
이렇게 그리는 사람에 의해 그 맛은 천차만별이 됩니다.
이 말을 따른다면
신앙도 그리는 것 아닐까요?
주님께서 주신 도화지에 우리의 마음과 선행과 노력으로 주님 보시기에 예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오늘도 멋진 한 폭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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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모차르트는 600여 곡을 작곡했고, 베토벤은 650곡, 바흐는 1,000곡 이상을 작곡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곡이 명곡으로 남아 있을까요? 런던 교향악단이 선정한 세계 50대 고전 음악의 목록에 모차르트 작품은 6곡, 베토벤 작품은 5곡, 바흐의 작품은 3곡만 올라 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들이 쓰는 곡 모두가 명곡은 아니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1,093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 삶을 바꿀 발명품이었습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248편의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논문 중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고의 천재라고 알려진 사람도 무수한 시도를 했음을 알게 됩니다.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니라, 계속된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 한 번의 기도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계속된 신앙생활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운이 좋기를 바랍니다. 그 운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도 역시 계속된 노력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음에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를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이 도시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다른 도시에 비해 상업이 활발한 곳으로, 먹고사는 형편이 나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을 보고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도시에 사는 것을 자기들이 잘 나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티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지역의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앞선 세 도시보다 훨씬 더 상업적으로 번성해서 잘 사는 이방인의 도시였지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들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곧바로 회개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당연함은 회개의 노력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한 없는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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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변화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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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성령은 우리를 침묵과 경청으로 인도한다.”
“침묵과 경청, 성령이 말하게 하라.”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말마디가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회개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의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무지한 인간, 인간에 대한 부정적 정의입니다. 마음의 병중 으뜸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등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무지입니다. 정말 극단의 이념에 중독되어 상대방을 극도로 혐오, 증오, 저주하는 댓글들을 보면 무지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광신이 얼마나 치명적 무지의 병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참으로 강조하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이런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뿐입니다.
“가기싫다!”
거의 십여년 동안 로마에서 공부하다 잠시 귀국하여 수도원에서 3개월 쉬다가 어제 다시 출국한 수도형제가 엊그제 큰 소리로 고백한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길게 느껴지던 3개월도 순간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아,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죽기싫다!”
길게 느껴지던 인생도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할 때 대부분 저절로 터져나오는 말마디일 것입니다.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고백한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어와,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기다리고 있었네.” 침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이런 준비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어제 깊은 애정과 신앙으로 군인들을 상담하는 일을 책임감있게 수행하는 어느 자매로부터 긴박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옆 부대의 젊은 20대 하사 군인이 자살하여 연미사를 청하는 전화였습니다. 한참 살아야 할 젊은이들의 이런 자살 소식을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전화를 준 자매는 퇴근하자마자 저녁미사에 참석했고 끝기도때까지 성전에서 기도하다 떠나던 모습이 또 눈에 밟힙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나에게 있고 답도 대부분 나에게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답이 회개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죽음을 위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역시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필요합니다. 수도생활은 결코 유난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고 항구한 회개의 삶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사람이 됨을 목표로하는 수도생활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수도성인들이요, 오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브루노도 이에 속합니다. “위대한 침묵” 영화에서 소개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창립자 성 브루노입니다. 1032년경 독일 퀼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원 창립자로 1101년 선종때까지 참 치열한 회개의 여정을 살았던 수도성인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받은후 사제품을 받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교수겸 학장으로 재직중 성직매매로 추문을 일으킨 라임스의 주교 마나세스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마침내 마나세스는 사임했고 이어 대주교가 되어 달라는 라임스 교구민들의 바람을 뒤로한 채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본격적 은수자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몇몇 동료와 함께 노동과 관상기도의 생활을 하면서 기도소와 개인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엄격한 고독과 침묵, 가난을 실천함으로 카르투시오회의 시작이 됩니다. 성인은 수도회를 떠나 잠시 성직자들의 개혁을 담당하는 교황의 보좌로서 얼마동안 활동하다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설득하여 다시 수도원에 돌아와 선종때까지 계속 은수생활을 합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자들의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은 1.하느님을 찾음, 2.복음적 증거, 3.숨겨진 삶으로, 세상 속에서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샤를로 후코의 후예들인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영성과 일치하니 이 또한 참된 회개의 열매이겠습니다. 브루노 성인은 공적인 명예를 취득하지 않는다는 카르투시오 규칙에 따라 시성식은 치러지지 않았고, 1674년 교황 클레멘스에 의해 축일만 공포됩니다.
회개의 여정을 살아감은 믿는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한 주님의 예언자적인 깊은 탄식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고을을 향한 “불행하여라!” 불행선언은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회개에 대한 마지막 호소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부정적 현실은 계속 반복되는 듯 하니 무지한 인간의 숙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럴수록 절박해지는 회개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우리의 회개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비단 주님의 사람인 성직자의 강론 말씀뿐 아니라 이웃 형제들의 말에도 회개의 열리 마음으로 경청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런 경청의 영적수행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겠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참된 말은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에게까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어제 미사중 화답송 시편 19장 일부 구절들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런 주님 말씀에 맛들일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런 주님 “말씀”과 더불어 “기도”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말씀과 기도의 수행이 회개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의 참회의 기도는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진솔한 회개의 고백기도인지요! 하느님을 떠나선 회개와 겸손도, 참미와 감사도, 지혜와 자비도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회개가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참된 겸손과 지혜의 참사람이며 회개없이는 무지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합니다.
그러니 평생을 살아도 자기를 모르고 헛된 삶을, 괴물과 악마, 폐인의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를 통해 참사람이 되는데, 하느님과 관계를 깊이하는 데, 기도와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에, 평생 영성 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이 “회개-기도-말씀-성체”를 담고 있는 미사입니다. 세상에 미사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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