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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원한인 지국과 당나라 송나라 시기의 필적 고고학 고적을 새로 발견하였다.
新发现古仇池国及唐宋时期字迹古迹考略
2021년 04월 15일 11:14 펑장황한 기사. 소스: 이페어케이
文/满正人
필자는 작년에 간쑤성현 얼랑향 안자촌을 탐방하였다호두산, 용상골 고보, 고동 발견 남송가태 2년(1202년)연)제각과 불교 페르시아혼합주문제 각석교부처님의 유적을 새기고 좌불하다.근 1년의 시간이 지난 고증그리고 탐방을 넓히는데, 또 있다.경내 및 인접 지역발옛 길, 옛 관문 등의 유적이 현재 남아 있다.이들 유적은 위진남북조 때 유지( 仇池) 국저양(國氐杨陽)의 경영 하변(下 。)과 험니공산( 险泥功山)에 의한 자보(自保), 당나라 성주(成州)에 의한 치니공산( 。功山), 남송(南宋)의 항금(抗金)에유적은 관련 문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며, 구지국과 당송시대 성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물증이다.
《독사방여기요》 권59재:"주는 강·융, 통로인 농·촉, 산천이 험난하여 예로부터 용무의 땅이었다.후한우란 무도태수라 하고형상의 지세를 점하고, 군영을 쌓으면 백을 쌓는다.80개소로 강족을 구제하다.제갈무후도겸관농어는 먼저 무도를 택하여 북쪽에 있다.벌채의 도. 진의 쇠약함.양 씨, 저 원수에 따르면 지, 도청. 우두 북침농서, 천수, 남요한중, 종횡무진 백여 년.비록 서쪽 끝은 외진 곳이지만, 그 길의 요점을 잘 파악하여 이용할 수 있게 하였으니, 유용해서는 안 되겠거니와…." 청오붕은 《무주비지·산수》를 날며 "(이공산은) 군봉보다 높고, 당송 이래 천수원수못공도였으며, 원명병화 이후 주민이 희미해져 범과 표범의 수원이었던 도도가 수세하여 나무꾼의 길을 통할 뿐"이라고 말했다.간쑤성 현은 고적이 많고 폐허가 된 고읍지·고도·역참·고수루가 군데군데 불경기로 방치된 지 오래여서 역사를 놓고도 말이 많다.성현이랑 향토이공산 자락에 있는 안자애벽의 옛 보루가 다행입니다.옛 동에 남아 있는 유적은 시간, 공간, 종속관계와 문화적 특징으로 볼 때 많은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어서 역사의 한을 풀어주고 보완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지금 필자는 관련 유적과 문헌 기록을 간단한 도킹으로 하고, 천박한 견해도 마다하지 않고 벽돌을 던져 옥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니 방가홍유(方家鴻遺敎)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이궁산(지로산, 비구니산)
《원수지국지》에는 "저본왕 양모는 졸졸졸졸졸을 색출하고 길다.아들은 대항하기 어려우며, 어린 아들과 함께 부곡을 나누어 가진다.난적은 좌현왕이라 부르는데, 둔하께서 변명하시니 견두이다.호는 우현왕, 둔하못이다."이걸로 알면 옛날 원수지나라의 정치 중심은 종제한다.2대 근본 왕양은 대항하기 어려울 때가 이미 되었다.하변으로 옮겨라. 그 다음의원수'는 이미 범람하였다.이름은 원수지산이 아니라 '化'라고 한다.여러 문헌에 따르면, 옛 조유요가 동진태흥 3년(320년)과 동진영창 원년(322년)에 걸쳐 '원수지양저본'을 두 차례 공격한 것과 같이 원수지양저본은 '위험자보'에 해당한다.동진 태녕원년(서기 323년)에도 양난적(楊難敵)이 전조(前趙)를 두려워하여 아우의 두목과 함께 남으로 달려가 성한(成漢)에게 인계하였다.유요는 밭을 진남대장군, 익주자사, 진구지로 숭배하였다.같은 해, 조병퇴. 양난적은 한안북의 장군 이치를 위해 뇌물을 바쳤기 때문에 청두로 보내지는 않고, 무도로 송환되었다.양난적은 한나라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결국 "험불복"하고 "불법이 많으니" 어린아이가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이웅에게 말하였다.청전, 하변전 시작.웅견은 이어, 이어, 이어, 이어, 이어, 이어, 저어, 음평.난적이 파견된 것을 거부하여 장수할 수 없다.이치와 이조는 하변까지 쫓아왔다.난적들이 그 귀로를 끊고 사방에서 공격하였으나, 어린애와 어린애들이 깊은 곳에 지원을 받지 못하여 모두 난적들이 죽임을 당했다.험준한 곳에 따르면 경내 협곡이 종횡으로 펼쳐지고 절벽이 대치하는 하변수 협곡, 저도 협곡, 보루가 삼엄하고 방어하기 쉬운 군사 요충지인 '이공산'이다.이때부터 후대 원수인 양정치(楊定治)가 상록(上禄)을 받들었는데, 이때 이공산의 전략적 위치가 더욱 뚜렷해져 후대에는 저승사자인 양(楊)이 민족의 존신으로 받들기가 어려워지면서 이공산을 '이랑산(二郞山)'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성현 이랑향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남으로 이주한 무도국, 무흥국, 음평국은 복원하여 원수지산, 이공산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많다.제영명중(488년)의 저본 남량주 자사, 구수지 공양 영진, 토공산을 차지하여 귀금, 제세상은 양영진 북량주 자사, 구지공이다.이때의 양영진은 진흙을 차지한 산이었지만, 제 조정에서는 여전히 '원수지'로 불렸다.대통 4년(538년)에 니(義)로 파면된 서위(西衛)의 문제(文帝) 을불씨(乙佛)의 황후(皇后)가 그 아들인 무도왕 원무(元武)를 따라 이공산(功功山)에 가서 대흥불사를 하면서 '니고산( 。 。山)'으로 불렸다.《신당서·지리지·4》운 : "이공산, 성주동곡군, 본한양군, 치상록.천보원년(742년)은 이름을 바꾸고, 보응원년(762년)은 토번( 吐)에 미치지 못했다.정원 5년(789)에 동곡의 서경인 이궁산에 성주를 권좌에 두었다. 또 《신당서 목종기(新唐書 木宗紀)》에 따르면 당목종(唐木宗) 장경(長慶) 3년(823) 다음 5월에 주(州) 보정보(寶井寶)로 옮겨진다.동곡군은 50여 년 동안 이공산과 권치행성주를 다스렸다.
이궁산의 험준함과 군사전략적 위치의 중요성.농산은 짝이 없지만, 그 높고 험하며, 그 절박함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그 곳에 있는 사람을 어렵게 한다.그림 1) 먼 옛날로이곳의 두보도 발가락 도랑 때문에그 진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푸른 흙 위로'를 남기고황혼이 깃들다.북쪽에서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오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총총합니다"라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하지만 원수지국의 역사에서는 천혜의 절경이었다.서진군봉이 가로로 늘어선 남쪽 변연과 휘성분지 서북쪽의 광천하천에 있는 계곡물로서, 1봉의 양쪽 날개로 서진령의 최고봉인 해주산(염교부추산)을 북쪽으로 들이받으며 좌우로 6개의 골목수, 위무수, 흑곡수, 황저관 등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서쪽 변방 전역을 꿰뚫고 서역군의 적을 저지할 수 있다.남익이 주 부지로 쭉 뻗어 있어 용문수(지금의 성현진원용문산마을)를 설치하면 성주 전역을 내려다보면서 동서양 수십 리 협곡을 감시할 수 있다.동쪽으로는 능공저하가 펼쳐져 있고, 둘째랑, 왕마, 황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시코가 안쯔구쵸와 목 놓아도 된다.여섯 골목마다 손을 흔들어 소식을 전하다.(그림 2 참조) '친룽(秦龍)의 열쇠, 파촉의 숨'이 여기에 해당한다.
图1 泥功山要砦 그림 1 이궁산 요령
그림 2 산서쪽 조산 图2 泥功山西侧曹山
해발 2000여 미터의 진흙공산은 윗부분이 남·북·북·서쪽이 오목한 말안장형 봉우리로 되어 있다.청광서 8년(1882년) 조증인이 쓴 《이공산 운제암 전관략서 중수》에는 "고찰대(古 刹代)가 묻히고 비석 폐종과 고적(古见)의 기물견(器物)이 있고, 한대 수관(漢代修觀), 당나라 건사(唐代建寺), 송수菴院), 오대폐(五代 废), 원(元)가 저마다 창조되어 있다…최고탁립지세에는 기묘( 崔 偶之勢)가 있다.현재 정상 중부에는 동서 약 150m, 남북 폭 60m의 오목한 경사지가 있고, 대형 건물들이 남아 있어 대기를 다지고 있다.산등산 문치서 전체는 승사치동북, 불감, 도관, 불전은 남북의 산봉우리와 서쪽의 절벽 사이에 있고, 목탑은 북봉의 거대한 괴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동북산 기슭은 오랫동안 이름을 떨쳤던 운제암사이다.
둘째 낭안자(양가애 집)계채)
흙으로 만든 공로인 산서성 기슭에, 한 곳이 있다.산으로 둘러싸인 절벽이 마주하고 있는 협곡의 깊숙한 산대 굴지가 바로 성현의 둘째 낭향안자촌이다.그 동쪽의 조산은 말이 거꾸로 뒤집힌 것처럼 위로는 평행하게 100무에 가깝고, 하은동혈, 고보, 촌락이 그 옆에 있다.서쪽의 청림산은 서화육항향 두태마을의 석가산 청명골 산수와 맞닿아 있다.남쪽으로는 수리협곡에 옛부터 비룡사가 있어 비룡협이라고도 한다.북쪽은 얕은 산 완만한 경사지이며, 그 사이에 경작할 수 있고, 목축할 수 있고, 사냥할 수 있으며, 가둔할 수 있다.그 길을 가로지르는 길은 여섯 골목, 흙탕물과 맞닿아 있다.그 사이에 서 있는 성처럼 날아다니는 도둑은 들어오기 어렵고, 강적은 공격하기 어려우며, 특히 협구 양쪽에 서 있는 호두산, 용상애벽은 마치 신처럼 이 수토를 충실히 감싸주는 곳이니 '안자(安子)'라 할 만하다.
《계주직속주속지》에 의하면.기록:무도성 동남쪽 70리 지점에 양가애(楊家 又)의 명가 계채(名家計寨)라는 위험요소가 있다. "내( 仇 仇)는 양저목의 묘계, 보존을 위한 채집이다…송건염, 소흥간(绍興間, 1127~1163) 오홀 형제 도보촉구시(圖保蜀口)…각주마다 택지조( 地地)를 지어냈는데, 가장 험준하고 집채에도 적조(積粟 , ,)하며, 또 물소(粟水泉)의 곡조( ,)를 쌓았다.장유 구지국지: "각 시기의 구지국강역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진서에 기재된 주군을 강으로 하여 현 아래 각 사서에 있는 산천의 지명 90여개를 구하고, 무도현 아래 아래에는...이공산, 양가애, 측백수, 진번돈 등 12개소가 있는데, 이로부터 양가애(楊家崖)는 바로 이구산 주변에 있다.두산은 용상골의 옛 보루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용상골호두산고보
용상골 고보는 안자촌에 위치해 있다동남쪽 조산 서쪽의 절벽 중부.보혈은 암벽이 붕괴된 공구(空區)로서, 동구는 동서로 가로놓여 있고, 동고는 서쪽이 낮고 중폭은 좁으며, 서(西)는 계곡물과 맞닿아 있고, 동(東)은 절벽 옆의 가파른 비탈과 밀림이다.혈보 편구형으로 동서 76.2m, 중부 4m, 가장자리 높이 1.5m, 깊이 8m다.보혈 안에는 달구지 벽 15개가 남아 있어 크기와 깊이, 높이가 다르고, 큰 것은 주실과 곁방, 거실, 곳간, 토담, 부뚜막 등이 있으며, 작은 것은 주실, 온돌뿐이다.집 담장과 가장자리 보호벽(높이 60㎝, 폭 30㎝, 길이 75m) 사이에 폭 1.7m, 길이 75m의 통로가 남아 있다.대부분 담장에 그을음 불이 섞여 흙덩이를 태운 것으로 보아 두 번 이상 또는 여러 번 지은 것으로 의심된다.보혈 중부에 거실이 있는 실내애벽돌면에는 '후주' '음' 두 조의 삼자(三字) 땔나무·탄재(炭 字迹) 글씨, 옛 예서체(古 隶體)가 남아 있다(그림3·그림4 참조).지름은 0.5~0.4㎝이다."후주"라는 두 글자는 결체와 필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체세는 고대 예서에 가깝고, 관습은 횡세이며, 희용은 교전파 대필법이며, 특히 "주"자는 위쪽 한 점을 길게 쓰고, 가로로 쓰며, 상삼횡과 밑을 일횡으로 의도적으로 멀리하였는데, "飮"의 식자 옆은 갑골문결체와 비슷하여 두 개의 삼각형을 가지고 상형 "유"자를 이루게 하였다.거실이 있고 외벽에 진흙으로 칠한 평면에는 집짓기 계획도와 같은 '체크무늬'가 두 세트로 새겨져 있는데, 그 윗부분에 뾰족한 모양의 그림으로 '뇌 雷'(두 번째 글자가 희미함)을 새기고 높이 35㎝, 너비 20㎝로 동한 말년에 근본수의 성을 판별해 뇌정( 雷定), 동(銅)이 있었는지 궁금하다.중부에 거실이 있는 바닥 먼지에서 조립식 구리 담배냄비 머리, 부녀자의 목재로 비녀와 시대별 도·자 파편 등이 발견됐고(그림 5, 6 참조), 벽 구멍에서 옥수수 잎으로 묶은 솔빗이 발견됐다(그림 5, 6 참조).옛 보루의 위치와 이들 유적의 재질, 모양, 용도를 분석해 보면 부족이나 모조직의 집결 장소로 여러 번, 오랜 시간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图3 龙床沟古堡字迹“侯主” 그림 3 용상골 고보의 글씨 '후주'
图3 龙床沟古堡字迹“侯主”그림 3 용상골 고보의 글씨 '후주'
그림 4 용상골 고보의 글씨 "뢰£"图4 龙床沟古堡字迹“雷£”
호두산 고보는 청림 산동 측애에 있다벽은 용상골 고보와 마주하고 있으며, 약 300m 높이의 절벽 중부에 세워져 손발을 사용하는 작은 운전대가 통하고 있으며, 동굴보 역시 절벽 붕괴공구, 편구형, 보루가 동쪽으로 나 있으며, 남으로 가로놓여 있으며, 보구는 길이 30m, 중부 높이 약 5m, 변두리 높이 1.2m, 깊이 4m이다.보구 옆에는 길이 30m, 높이 70㎝, 폭 30㎝의 흙담 하나가 남아 있어 생활시설이 없고, 다른 유적도 발견되지 않는 단일 방어시설이다.
图5 龙床沟古堡残存陶片그림 5 용상골 고보 잔존도편
그림 6 용상골 고보 잔존 비계图6 龙床沟古堡残存发笄
현지 노인의 말에 따르면 제2보보는 시간을 보존한다.동치 원년(서기 1862년)에 산감 회민 반청 투쟁이 서북으로 파급되어 각 현의 관아들이 각지에 보루를 쌓고, 그릇을 장만하여 민단을 조직하여 예기치 못한 사고를 방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백랑은 민국 원년 4월 하남의 보풍인 백랑, 제6진통제, 혁명당 오록정의 참모였던 오록정이 암살되자 분개하여 도적이 되었고, 후에 백랑은 "백랑"으로 잘못 불리어 8천여 청장년 봉기군, "부제빈을 잡자", "원세개를 몰아라", "완벽한 정부를 세우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백랑군은 3년 5월 간쑤(甘肅)에 들어가 진안(秦安)·감곡(甘谷) 등을 점령한 뒤 휘성현(徽成)을 거쳐 남하하다가 천군(川軍)에 막혀 서쪽을 향해 점민주·파조주(破 。州)로 향하다가 마자군(馬家軍)에 패했다.
백마동
《시경·사수》 편 《모》전: 백마흑하이에 가는 로크라고 한다.허신《설문해자》 : "로크, 말의 흰색이하미도."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은 "황제는 낙명( 骆明)을 낳고, 낙명은 백마를 낳았다.곤, 즉 우제의 아버지로서, 근본인은 곤우를 시조로 여겼다.또 《풍속통의교주》의 일설에 따르면, 근본언어는 탐욕을 물리치고 죽을 때까지 이익을 얻는다.낙재산계(樂在山界), 본서남서이(本西南 。), 別種號)는 백마(白馬)이며,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중랑(中郞) 곽창(郭昌) 등을 징집하여 무도군(武都軍)으로 항복시켰다.군치는 지금의 서와 낙욕을 다스린다. 로크지의 백마숭배와 백마의 시조인 곤우의 조상을 숭배했던 옛 무도의 근본호는 백마라는 것을 알 수 있다.《진공도기》는 "하늘의 명을 받아 가옥 우적을 10과 2공으로 황제의 흙벽돌에서 제작하였다."서협송(西 狭颂)은 '후우지적(後宇之籍)은 세래복(世來福)'과 지금의 백마동(白馬洞)을 답습한다.백마사, 백마사,모두 근본 사람들의 원시 풍습 중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림 7 백마동
图7 白马洞
얼랑안자백마동굴은 용상골 고보에서 오른쪽 위로 약 100여m 떨어진 v자형 절벽 사이에 있는데 현지인들은 '백마동'을 '백마당굴'이라고도 부른다.이 동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때문에 접근하는 사람이 적다.동벽은 사력암에 세사암을 끼워 겹겹이 쌓아놓았는데, 빗물에 의해 침식되어 세사층이 무너져 A자형의 용동을 이루었다.동구는 북쪽으로 폭 22m, 높이 15m, 깊이 48m, 깊이 3,5m, 높이 2,6m의 약 1,000m² 규모다.동 중앙에 석조좌불(石造座佛·그림 7 참조) 동구가 흙담 한 줄을 가로질러 세워져 중부를 넘어뜨리고, 폐목조문 부채와 문설주(門框·높이 2m·폭 2.7m)를 만들어 동구 동쪽 바닥에 흩뿌렸다.동구 동서 양쪽 탁상 바닥에는 흙으로 돌을 다져 쌓은 슬레이트 1인, 2인 온돌 3기가 남아 있고, 부뚜막·돌대 등이 따로 있다.동굴 입구에 있는 상수리나무 고목 3그루 중 1그루는 이미 말라죽었고 말뚝 밑부분은 둘레 5.6m, 높이 3.5m, 줄기새 3그루, 높이 약 30여m, 직경 2~1m에 이른다.동구 우측애벽에는 주문 14자와 함께 가태 2년(1202년)에 제각된 맷돌과 돌집이 새겨져 있다.
동굴 중심에서 수공하다퇴적된 완만한 흙언덕에 석조좌불(石造)이 있다.불신좌는 길이 70㎝, 너비 25㎝, 세로 90㎝, 어깨 40㎝, 머리 높이 30㎝, 머리 옆 너비 20㎝, 정수리 너비 18㎝다.부처님은 몸을 반좌( 盘座)로 하고, 오른쪽 두 팔을 두르고, 양팔을 늘어뜨리고, 수결선정법(手結禪定法)을 탯줄 밑에 찍으며, 이족작 결가부좌(結 。座)를 하고, 넓은 척추를 넓게 하고, 어깨는 반듯하게 하고, 코는 오똑하게 하고, 머리결문( 。文)이 없고, 표정이 온화하다.깔끔한 무늬의 의상과 목, 얼굴에 점착제가 남아 있어 표정이 흐릿해 보입니다.(그림 8 참조)
그림 8 백마동 석불
맷돌을 제거하면 굴이 명확하다.이 착각시간, 석불과 주문문제는 다듬을 시간이 없습니다.이런 유적의 착각연대를 판명하기 위해서는 유적자체가 제공하는 정보와 당시의 역사적 환경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앞서 이공산, 안자가 후구지 양정시대와 당현종 천보에서 당덕종 정원시대 가장 혁혁했던 유적들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의당도세《법원주》.임'운 : 우편식(右袒式)과 통견식(通肩式)의 두 가지 양식이 중토(中土)에 전해진 후 한(漢)지(地) 최초의 불상(佛像)의 기본양식이다."16국, 남북조 시기 수많은 민족화 불의 양식이 불교조상의 주요 표현으로 자리 잡았고, 중국 불교예술이 한창일 때 보여준 포용성은 불의 양식으로 잘 나타나 있다. '통견식(通 和式)'과 '우부식(右袒式)'도 그런 것이다.한 시기에 중요한 불의 표현은 우편식(右袒式)이 인도 밀교조상(密敎造像)의 전래와 함께 어느 정도 표현됐다.'불은 융신이고 마땅히 겸봉해야 한다'는 근본인 수령의 비교적 이른 불교의식, 전(前) 진부(秦苻)는 양양구석도 안봉석안위정교합일지도자를 공격했다'고 전하며 여광정서역구구구구구마라시래중원경홍법, 이는 민족감정의 필요이자 한화의 사연이요하고 정치통치의 필요였다."전진(前秦)이 북방을 통일한 뒤 정복당한 부족, 정권 상층부의 유화적 대책에 원수 양씨(楊氏)도 있었다.옛 원수가 멸국하기 전 내란으로 피살된 양송노의 아들 불노, 불개가 진나라로 망명해 부견의 중용을 받았다.부처는 우장군, 부처는 무이장군, 불노의 아들 양정은 부견의 사위가 됐고 이후 원수지의 부흥은 양정에서 시작됐다." 큰 좌절을 겪고, 진부마(秦驸馬)와 力 挽의 대장군(大將軍)이 패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원수지( 仇池)의 소저왕(小氐王)이 된 양정(楊定)은 세상사와 인생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과국( 。國)과 개인의 돌연변이를 신의 섭리에 걸었다.후대 원수가 녹봉을 다스리는 데는 요긴한 방벽이 없었으므로, 공산과 안자의 은밀한 요새에 근거하여, 부처님을 뚫어 모시고 평안을 기원하였다.
높이 걸려 있는 동굴은 오직 그것뿐이다입자가 크고 점성이 떨어지는 자갈과 돌을 굴착해 간이 기물을 만들기도 어려운데도 '80종이 좋다'는 신위(神威)에 걸맞게 만든 고수는 결코 민간 속수가 아니다.옛사람들은 "백화수복혜, 삼신수복혜"라는 경건한 궁중조상사는 반드시 불상을 장엄하게, 법대로 하여 붓다의 품성과 내면을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붓다의 깨끗하고 장엄한 외모가 보여 중생의 귀귀심과 공경심을 불러일으킨다.이 장엄한 섭수력, 안정감, 원만한 상과 신위불상은 궁중전문조상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후원지저왕 양정뿐이다.
3. 현관 오른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면 1.2미터 낭벽의 접각에 "옴부임 \morni 逹理吽□(㗶)吒吒 \ \ 临 临 临 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해서, 지름이 0.3센티미터이고 세로형 세 줄로 되어 있으며, "唵部林" "唵部 临" " 分置"는 "唵manman"唵尼理吒 ""로 높이가 한 글자 반 정도 낮다.(그림 9 참조)
그림 9 백마동 한전불교와 페르시아교의 혼합 주문图9 白马洞汉传佛教和波斯教混合咒语
옴부림 팔자잠언주제각무시간과서단자는 왼쪽에 있는 '가태 2년'이라는 문구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두 문항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옴부임( "部林)이란 주문은 자형의 날렵한 힘의 결합으로 늘씬하게 뻗어 있고, 소잠두연미(小 燕頭 。尾), 다당법(多唐法)의 기질은 차분한 것 같지만, 실은 칼을 뽑아 들고, 방력(方力) 속에 맑은 기운이 있고, 유공(柳公)의 힘도 있다.
대방광보살장경중문수리근본1자다라니경(字多羅唵)은 ' "'은 부처의 마음을 나타내며 법(法)·보(報)·화(化)의 삼금강(三剛·신금강·어금강·의금강)이라고도 하며, 모든 제불보살의 지혜로운 몸·어(語)·의(意)를 나타낸다.응( 白色)도 흰색이며, 본존의 지혜를 상징하며, 선정파나밀다(禪定波羅蜜多)에 속하는 것으로 오만심을 없앨 수 있다.옴니임'은 '一字大 轮'이다.큰 바퀴의 한 글자 저주가 바로 부림이다.
옴부 임화 옴치는 한전 불교 문수보살의 호위가 된다身 咒语 , 即 《 文殊 八字 咒 》 : 唵 阿 尾 啰 吽 佉 左 洛 , 《 文殊 八字 真言 》 : 唵 阿 味 羅 吽 卡 佳 拉 。그러나 이곳 주문은 첫 번째가 같지만 잠언은 '옴 모 니 逹 리 吽 □ (㗶) 나타'이다.'마니'는 마니교를 가리킨다.페르시아인 무니가 세운 종교다.그 교육은 광명과 어둠이 대립한다고 선전한다.선악의 근본을 위하여. 마니가 명나라를 대표하므로 마니교는 명교, 명존교라고도 한다.고대 페르시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기 3세기 중엽 페르시아인 무니를 위해 창설돼 바빌론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종교다.마니교는 주로 유대교-기독교 등의 교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을 형성하는 한편, 소로아스데교의 성분도 적지 않게 받아들여, 대략 서기 6~7세기에 동아시아로 들어와 동양으로 전파되고 흡수되었다.불교적 색채를 약간 받아들이다.그것의 주요 교리는 2종 3제론이다.당무후 연재 원년(694년)에 중국에 정식으로 전파되었다.종교문화가 유입되면서 페르시아 상품, 종과 상업관념, 문화의식이 폭넓게 융합됐다.회골한은 당나라를 도와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당 왕조와 비교적 긴밀하게 왕래하였다.무후연재 원년, 페르시아인 스다가 이종경을 가지고 조정에 왔으며, 당나라 대종 3년(768년)에 장안건 마니사에서 대운광명사를 하사하였다.장안·낙양·서역 상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당나라 사람들은 신도들을 마니라고도 불렀다.《구당서·회흘전》: "오월에 迴鶻재상, 도독, 공주, 마니 등 오백73명이 입북하여 공주를 맞이하고 於홍臚寺에 안치되었다."
상기 문헌을 통해 기록된 시간과 안자가 처한당시 동곡군 치지는 지리적으로 이코야마에 있었다.안자백마동은 서역과 장안을 오가는 페르시아 상인들과 현지의 비교적 이른 종교의 장지로서 최중화방식으로 관한전 불교 옴부임과 옴치를 비롯하여 명교인 '옴모니 逹 理 吽 □ (㗶)吒'을 몸소 백마인과 옛 원한지국의 종교장소로 남겼다.。
동문 오른쪽 절벽의 밑부분에 맷돌을 하나 박아놓는다.맷돌은 밑받침만 남긴 직경 24㎝, 두께 10㎝다.돌집의 직경은 12센티미터이고, 깊이는 12센티미터이다.가운데 약 10㎝의 곡면( 弧面)에는 '가태 2년 6월 1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세로형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해서 0.2㎝로 글씨가 얕다.(그림 10 참조)
그림 10가태 2년 (1202년)에 제각图10嘉泰二年(1202年)题刻
"가태 2년"이라는 제목은 각설하고, 필체가 육골차다.기복이 심하고 자연스러우며, 왕양은 드넓고, 고대의 뗏목은 동파 거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제목에 새겨진 동의(動意), 입지(入地), 자형(字形) 등은 '옴부림(唵部林)'의 주문형 글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므로 이 두 글자의 취지는 약간 비슷하다.그러나 시대 풍향을 분석해 보면 남송 숭상도교, 성주 내 다도교 비각, 여성현 오선동에 남송 개희 원년(기원기 1205년), 선교랑 통판 성주군 주사 조희연이 쓴 오선동 비기와 가정팔년(기원후 1215년) 참정소선, 우승상사 미원 봉칙부묘.등이 있지만 한전 불교와 페르시아교의 혼합된 문제점은 드물다.가태 2년은 남송오희(南宋吳喜)가 금병(金兵)을 경계하거나 그 지역의 대부호(大家)가 전란을 피해 도망갈 때 새긴 것으로 보인다.
백마의 이름을 딴 동굴·묘우·사원이 많다서한수와 하변수 유역에 집중하여 유안자 백마동은 한말 위진시대 불교가 중토와 당말 페르시아교의 중원 및 남송항금수비에 전해진 역사적 단편 가운데, 이랑애배의 백마묘 호법신 벽화는 옛 저승사람의 풍채를 그대로 답습하고 이복고관, 장갈색 팔굽다리, 호저피장화 등의 장식을 갖추고 있다.천수맥적산 78굴 공양인의 의상과 비슷하다.(그림 11 참조)
그림 11 둘째 낭애배백마묘 벽화图11 二郎崖背白马庙壁画
고경
최근 몇 해 동안 두보를 둘러싸고 농산에 있었다.행기시의 구체적인 동선과 장면지, 고(故) 소경비 당대 두보연구전문가가 이끄는 산둥대 '두보전집' 과제팀, 임가영 란저우대 교수가 이끄는 란다시 고찰단, 녜다슈 천수사범대 교수가 이끄는 '천수두보연구회' 등이 두보농의 우행, 특히 서와 성현의 접경지대를 두루 살펴봤다.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여러 차례 서와 육항과 성현의 둘째 낭향 사이의 관련 지대를 답사하고 《두보롱우시》《적초령》금지고》라는 글을 쓴 장 선생은 당시 동곡군에 속했으며, 서와 아래 6항목의 초산량은 두보시의 '적초령'으로, 두보는 '두보령'에서 "두보종석"이라고 주장했다.협곡, 절벽,길의 기초가 넓고 경로가 쾌활하여 소달구지와 말들이 통행하는데 지장이 없고, 도중에 마을이 많이 생겨서 15km정도 걸으며, 가볍게 포장하는 데 약 5시간이 걸린다.(12일 참조) 이 경로는 육항수·위무경·흑곡경·황저관을 잇는 군사의 전추(傳刍)의 길이자 예로부터의 상여 통로였다.두보는 가족을 거느리고 틀림없이 차를 타고 말을 탔는데, 옛 길을 따라 지름길로 가는 것이 상례에 맞았다.또 '방여승람·권칠십·동경부'에 따르면 "비룡협, 원수산 아래에 있다.근본이 바로 백양지라 하는 자는 용을 비룡하여 그 이름을 얻었느니라그 동쪽은 두보천보 피난처이다.용만, 호랑이 굴이 있다"고 말했다.이곳 '원수지'는 이공산 아래 안자(양가애)로 불리며 비룡사, 비룡협, 용상골, 호두보 등의 지명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图12 二郎武坝大烂泥沟古迳
이 물건을 새김질하는 방법 외에, 그대로'하변수(下 形成水)'가 만들어내는 '하변도(下 辨道)'는 이미 남북의 길목이다.『남제서·권59·산서8』에는 "(성현) …남하(南河)는 물을 가르고, 현 서남쪽(북쪽) 청거보를 나오면 회동하는 하천이 룽샤(龍協)에 들어간다.이곳의 '출현 서남'에는 틀림없이 오류가 있을 것이다.물 밑을 따라 형성된 '하판도'는 정구명(政區名)이자 도로명이다.하판수출현 서남쪽(북쪽) 청거보는 유경이 길고 수량이 많은 서와 육항 두대마을 청명구와 안자고보를 수원(安子古寶)으로 하는 이름이다.
동한건령 4년(171년)으로부터서협송(西 狭颂)과 건녕오년(建寧五年, 172)의 阁閣颂)이라는 비석(碑)에 따르면 농촉고도의 저도( 沮道, 지금의 성현 비룡협에서 산시약양에 이르는 청니하곡)는 당시 관공서가 건설한 통촉의 요지였다.그 상류의 하판수하곡은 서화지성현의 편리한 옛길이다.'하변도'는 도로명사(路名史)로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기산도로에서 저도로를 잇는 편리한 옛길이다.지금의 서·노·하진초관, 선경, 6개 항에서 3번씩 토공산을 거쳐 하변현(지금의 성현포사)까지 약 40㎞를 통과한다.
"옹제춘 선생은 천수에 마탄진 묘를 띄웠다출토된 전국시대 목판지도 연구 결과, 진한(秦漢) 시기 천수남하순서한수(天水南下順西漢水)를 거쳐 무도(武都)로 가는 군사교통로가 존재하며 응용된 사실이 밝혀졌는데…."남북이 분단된 시기에는 대립적인 정치·군사적 정세로 남북의 주요 교통 소통이 단절되거나 막혔고, 구지양저( 。) 정권은 유연한 외교정책과 농촉의 독점을 내세워 수백 년을 정권과 종횡무진했다.
돈황문헌p.3718 장청통사진찬병서'에 따르면 돈황귀의군은 당말 황소농민들이 봉기한 후 촉도를 행하는 당 희종(僖宗)과 연계를 유지하기 위해 천험을 다하여 하서회랑에서 농촉고도를 거쳐 촉도에 이르렀다는 역사기록과 《신당서·황소전》에 실려 있으며, 당 희종은 조정에서 관문을 점거하는 황소군을 막기 위해 농촉을 점령하였다고 하여 상왕도를 통솔하였다.
필자가 이 고도의 유적을 찾으려 할 때 공교롭다.우성현 포사진마협마을의 82세 장영생씨는 "남하는 일찍부터 '천하(天河)'라 불렸다"며 "북으로는 삼경통서(三京通西)와 육항(陸街), 초관(草關), 석경( 晒經)으로 나뉘는데, 길제첩(路捷)로 인해서 바로 앞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1972년 서도로 개통으로 황폐화됐다.구체적으로는 협구에서 용문산 아래까지 이어지는 곽하구(郭河口)를 북서·동북 2경(東北)으로 나눈다.서북에는 삼차하, 연하, 칠반하, 하하, 조하(여기는 동북도경 담하, 엄하, 대하, 애배, 엄가하, 서화휴대, 초관)의 소하(안자비룡협)에서 서와 육항으로 나누어진다.동북 지방은 무가하, 향수동, 황하, 장하댐, 가게를 통과하지 못한다.자촌(子村), 지랑(二郞), 흙탕물골문( 烂 、門), 조패(趙 鞍), 안산(安山)과 서(西)와 석경( 晒經), 곽하(郭河), 칠반하(七 。河)에 잔도유적이 있다.
그림 13 성현 진원칠반하교각 잔도유적图13 成县陈院七盘河桥阁栈道遗迹
장영로께서 말씀하신 경로대로 필자는 일곱째이다.반하 하곡 동서 양안의 넓은 곳에는 높이 약 80㎝, 폭 약 3m의 돌로 쌓은 노반이 다수 발견됐다.또 양안의 좁은 지역에서 잔도유적 2곳, 교각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방잔공 6곳, 한 변의 길이 30㎝, 깊이 22㎝, 둥근 구멍 4개, 직경 20~16㎝, 깊이 15~22㎝의 간격을 찾아내고 있다.모두 원형 잔공으로 추정되는 8개의 잔도유적지에는 구경 27.5㎝, 깊이 7㎝의 잔공 6개, 구경 7㎝, 깊이 6㎝의 잔공 2개가 있다.[사진 13]이랑애배마을 이량자(二 梁村村二 梁子)에서 옛 사람들이 굴착한 옛길의 계단이 너비 20㎝, 길이 45㎝, 나가골에서 읽을 수 없는 옛 비석 1통(一通·별문기술)과 옛 보루 유적 등을 발견한다.북쪽으로는 서(西)와 여섯 골목인 곽패마을 인두산(人頭山), 두타이(頭山)의 청명(淸明)골에 이르는 지대가 넓고 고개가 완만한 곳(사진 15 참조)이다.노하휴대까지는 이 마을 조수사에 비각(碑刻)이 세 통 있는데, 한 통의 훼손이 심해 읽을 글자가 없다.《재건조수사비기》에는 "청광서 5년(1875)에 세운 《재수조수사비다》에 의하면, 조수사는 송(宋)에, 절은 협(協) 입구에, 이름은 목죽사(木竹寺)이며, 숙대( 。臺)는 명(明)에서 이주했다.청옹정기는 '곡유사(谷有寺), 가경년(嘉慶年) 현령 장공(張公)이 이름을 지어 조수사(潮寺)라고 했는데….'반쪽의 비석(碑)은 높이 45㎝, 너비 60㎝, 총 16행 120자로 지름이 3㎝, 해서( 。書)이다.(그림 16 참조) 가식(可食)은 '비괴/지무촉(至武蜀)자의 답내성읍(沓山 崩 崩衝)이탈세환형기유(在有)/내수재부수(內數 载数)를 민의(民意)로 고치려 한다/
图14 成县二郎崖背二梁子古径그림 14 성현 낭애배이량자고경
图15 西和六巷郭坝人头山古迳
그림 16 서화휴대민국시 진휼감산도로잔비图16 西和歇台民国时赈修甘陕公路残碑
"지무촉자가 답래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는 통이다.무도와 촉지의 옛길.비석에는 관련자 정보사(史)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화양진재회(華洋 。災 。會)'에는 짧은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황가양이 쓴 《화양의구호회: 잊혀지지 말아야 할 자선 단체》에 실린 글에는 "이 단체는 민국 시기의 많은 민간 자선 단체 중, 재해 구제 효과가 가장 크고, 재해 복구 경험이 가장 성숙하여, 후세에 가장 큰 의의를 지닌 자선 단체이다.1906년부터 1935년까지 설립되었다. 화양의구제총회의 산하 회원은 10여 개나 된다. 산동, 하남, 후북, 산시, 강서, 사천, 구이저우, 윈난, 간쑤. 1928년 서북한재, 화양의구호회는 공업으로 구제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관중에 서란도로(섬서, 간쑤성, 양성회)를 포함한 여러 가지 도로를 건설하였다.원래 시안~란저우로 편도 18일, 도로 완공 후 3일이면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이 불편했다."이곳 잔비와 관련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민국 때에 도읍은 여전히 천합지진(川之之進)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결어
간쑤성청지랑(甘肅成縣二郞) 내 유적 새로 발견, 문헌을 통해유적 양상좌증해 보면, 이공산·안자는 위진 남북조 시기 원수인 옛 나라가 압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령으로, '하변도'는 정구명(政區名)이자 도로명(道路名)으로, 기산도가 저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당나라 대역년 페르시아 상인과 당숙종 건원 연간 두보농우행 및 당말 황소농민봉기 돈황귀군왕래촉지( 黄皇煌军軍 往来 往来道)이 있던 촉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