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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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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성(定州城) / 백석
산턱 원두막을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잠자리가 졸던 무너진 성터
반딧불이가 난다 파란 영혼들 같다
어디서 말소리가 나는 듯이 커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하늘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 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정주성 : 백석의 고향인 정주에 있는 조선시대 성곽이다.
*아주까리 : 다른 말로 피마자라고 하며, 독성이 있는 열매에 가열을 하면 사람이 사용해도 되는 기름을 짤 수 있다.
*청배 : 배의 일종이고 일찍 익으며 푸른빛을 띄고 과즙이 많다.
주막 /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군들을 따러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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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난곬족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 누이 사촌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옆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사슴≫(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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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統 營 )1 /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흰 밤 / 백석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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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 / 백석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찰쌀탁주
가 있어서
삼촌의 흉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촌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가에서 왕밤을 까고
싸리 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들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두둑히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 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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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랑집 / 백석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山)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즘생을 쫓는 깽 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즘생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엔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山)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네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미꾸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 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어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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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 백석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https://m.blog.naver.com/boybb/150154088084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오리치*를 놓으러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커다란 소리로
―매지*야 오너라
―매지야 오너라
새하러*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 굴을 아배와 내가 막아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오리치: 야생 오리를 잡는 도구.
* 동비탈: 산비탈.
* 동말랭이: 산꼭대기.
* 시악: 마음속에서 공연히 생기는 심술.
* 대님오리: 대님의 끈.
* 엄지: 짐승의 어미.
* 매지: 망아지.
* 새하러: 땔나무를 장만하러.
하답(夏畓)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https://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9420
산(山)비 / 백석
산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어느 자연주의자는 “자연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 비를 내린다.”고 말했다. 그렇다 비 내리는 광경은 자연이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감성적으로 실감케 한다.‘산뽕잎에 빗방울이 치는’ 모습을 드려다 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보다는 풍성한 감성을 소유한다
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집 ≪사슴≫ (1936)
https://m.blog.naver.com/9594jh/222414841613
수라(修羅) /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절간의 소 이야기 / 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낳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산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七十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山나물을 추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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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추었다 : 추스렸다.
정문촌(旌門村) / 백석
주홍칠이 날은 정문(旌門)이 하나 마을 어구에 있었다
'효자노적지지정문(孝子盧迪之之旌門)'──몬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木刻)의 액(額)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자(字) 둘을 웃었다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어드는 아츰
구신은 없고 부헝이가 담벽을 띠쫗고 죽었다
기왓골에 배암이 푸르스름히 빛난 달밤이 있었다
아이들은 쪽재피같이 먼길을 돌았다
정문집 가난이는 열다섯에
늙은 말꾼한테 시집을 갔겄다
삼방三防 / 백 석
갈부던 같은 약수藥水터의 산山거리엔 나무그릇과 다래나무지팽이가 많다
산山너머 십오리十五里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山비에 촉촉이 젖어서
약藥물을 받으려 오는 두멧아이들도 있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https://m.blog.naver.com/kyorai/120162197002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여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구붓하고 : 몸을 약간 구부리고
* 개지꽃:나팔꽃의 평북 방언
* 개지 : 나팔꽃의 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쇠리쇠리하여:눈부시어의 평북 방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타샤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의 여주인공 이름,
북국의 소녀의 보통명사의 성격이 더 짙은듯.
* 흰 당나귀 : 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던 터로서
백석, 윤동주 시인이 다같이 좋아하던 이미지.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난한 내가, 눈은 푹푹 날리는데.. 혼자 슬쓸히 소주를 마시고
더러운 세상을 버릴지라도 슬프거나 초라하지 않은것은..흰 당나귀와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타샤가 있으므로...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10/03/2003100370144.html
夕陽 / 백석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https://m.blog.naver.com/boybb/150153990749
절망 / 백석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
북관(北關)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아
검정치마에 받쳐 입은 것은
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었더니
어느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파로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외가집 / 백석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 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복족제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 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왓골에 무릿돌*을 던지고 뒤 울안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어 달고 부뚜막의 큰솥 작은 솥을 모조리 뽑아 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 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 씨굴씨굴: 수두룩하게 많이 들끓어 시끄럽고 수선스런 모양.
* 쇳스럽게: 카랑카랑하게.
* 무릿돌: 많은 돌. 길바닥에 널린 잔돌.
* 쩨듯하니: 환하게.
* 재통: 변소.
* 잿다리: 재래식 변소에 걸쳐 놓은 두 개의 나무.
* 모랭이: 함지 모량의 작은 목기.
* 넘너른히: 이리저리 제각기 흩어서 널브러뜨려 놓은 모습.
동뇨부(童尿賦) / 백석
봄철날 한종일내 노곤하니 벌불 장난을 한 날 밤이면 으례히 싸개 동당을 지나는데 잘망하니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
첫여름 이른 저녁을 해치우고 인간들이 모두 터앞에 나와서 물외포기에 당콩포기에 오줌을 주는 때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
긴긴 겨울밤 인간들이 모두 한잠이 들은 재밤중에 나 혼자 일어나서 머리맡 쥐발 같은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
그리고 또 엄매의 말엔 내가 아직 굳은 밥을 모르던 때 살갗 퍼런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것이다
팔원(八院) / 백석
서행시초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八院)은 지명으로, 평안북도 영변군 팔원면이다.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녕변군 팔원로동자구.
허준/ 백석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뒤짐을 지고 지친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확자지껄한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아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 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한울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어진 어깻죽지에
당신에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은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은 안다
'도스토이엡흐스키'며 '죠이쓰'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모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로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안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냥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 백석
오늘은 정월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련만
나는 오늘 때 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었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 소리 삘뺄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 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억병: 매우 많이.
*반관: 작은 중국 식당.
*원소: 중국에서 정월 대보름날 먹는 새알 모양의 전통 음식.
*느꾸어: ‘긴장이나 흥분을 풀어’라는 뜻의 평북 방언.
*오독독이: 오독도기. 불꽃놀이에 쓰는 딱총의 하나.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이면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불꽃이 떨어진다.
*호궁: 중국의 전통 현악기의 하나. 우리나라의 해금과 비슷하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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