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코스프레 / 신미균
기억을 휘휘 저어 바닥을 긁어 본다. 녹아 없어진 줄 알았던 기억이 슬슬 떠오른다. 기억은 비눗방울처럼 떠오르다, 하나둘 톡톡 터져 제풀에 사라지기도 하고 풀잎에 앉아 한참을 빙그르르 돌기도 한다. 멍청한 크림치즈 케이크가 빙그르르 돌고 있다. 동생이 케이크 위의 딸기를 집어 먹으려 하자 어머니가 기다리라고 손등을 딱, 때리신다. 뒤로 물러난 동생이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빨아 먹는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으시면서 싱크대 앞으로 가신다. 그러면서 접시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시늉을 한다. 동생이 케이크 위 체리를 얼른 입에 넣는다. 오빠는 장식된 녹색 초콜릿을 입에 넣는다. 그러자 동생이 케이크 한 귀퉁이를 뜯어 눈치를 살핀다. 어머니의 전화가 길어진다. 오빠가 케이크에 손을 찔러 넣어 한 귀퉁이를 떼어 낸다.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아니 천사 같은 아이니까 엄마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 사이 오빠와 동생은 크림을 입에 묻혀가며 악다구니처럼 먹는다. 작은 케이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없어지고 바닥에 지저분하게 조금 붙어있다. 오빠와 동생은 먹을 만큼 먹었는지 휴지로 입과 손을 쓱쓱 닦고 방으로 들어간다. 전화를 끊은 어머니가 벌써 다 먹었느냐고 나만 보고 눈을 흘긴다. 맛도 못 본 케이크가 아직도 나를 약 올리며 빙그르르 돈다. ㅡ웹진 《님Nim》 2024년 11월호 ---------------------------
* 신미균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교육대학 졸업. 1996년 『현대시』 등단. 시집 『맨홀과 토마토케첩』 『웃는 나무』 『웃기는 짬뽕』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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