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 태우다 / 현상연
맨드라미 붉게 타오르던 날 그녀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세상이 서늘하였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길들여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되었다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되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되었다
초여름 날 예측하지 못한 검은 행렬이 깃을 세우고 다가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 불길 앞 마른 눈물이 바닥을 기었다
화구에 들어간 그녀 까만 재 들추니 씹지 못한 쇠붙이 한 개 마지막 유언처럼 거룩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 시집 『울음, 태우다』 (지혜, 2024.09) -------------------------------
* 현상연 시인 평택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2017년 『애지』 등단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울음, 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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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를 울음을 태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들어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된 그녀의 내력에서 온전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그녀가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잿빛 바람”이나 “숯이” 될 때까지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된다. 그리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될 만큼 화자에게는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 속의 기억으로 “마지막 유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울음, 태우다」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는 상상력과 이미지다. 보통 우리가 시의 제목을 정할 때는 “울음을 태우다”로 하는 게 일반적인데, 현상연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울음, 태우다”로 시 제목을 사용하였다. 시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몇 가지 추론을 해볼 수 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울음과 태우다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오직 대상에 대한 애정과 회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대상에게서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성과 성찰의 계기를 갖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울음을 태우다”라는 단순한 표면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기억을 울음으로 태워버림으로써 기억이 기억을 소거하는 형태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상연 시인에게 “화구에 들어간 그녀”는 잿빛 바람 또는 숯이 된 새의 파편들이 부추기는 울음이 아니라 불이 된 울음이었고, “울음을 토하지 못하는 울음”으로 태워도 울음이 멈추지 않는 영원한 시적 대상자로서 여전히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고 있다. 이러한 일면의 서정이 나타나는 작품이 참으로 많은데, 그 시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숫돌에 물 먹이며/ 녹슨 기억 벗겨”(「날을 세우다」)보는 장면이나 “제 본분”(「못의 담론」)을 잃지 않고 항상 곧게 펴져 있어야 하는 못의 기능을 지적하거나 “조상의 내력”에서 “파도의 묘지가 된 방파제”(「테트라포드」)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또 “밀착된 낡은 기억, 대기권 밖에서 깜박거리는 행성, 기억의 균열”(「치매」)로 잘 탐색해낸 “치매” 또한 오랜 서정을 소환하는 기억의 한 부류로 작용한다. 이외에도 「폐차」나 「간판」, 「1시와 3시 사이」 등에서도 현대문명의 이기나 정당하지 않은 노동의 환경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작품도 모두 오랜 서정을 추동하며 이미지를 시작품에 잘 적용시켜낸다.
- 권혁재 (시인) 시집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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