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다 / 장옥관
다시 일요일이다 태양은 여느 태양과 다르지 않다 어제 그 자리 그 시간에 조금 옆쪽으로 비켜 앉았다 직접 보진 못하고 감은 눈으로만 보았다 어젯밤엔 초나흘 달을 보았다 눈 아래 찢어진 흉터 같았다 그제 밤에 본 것보다 좀더 벌어져 있었다 파밭의 파가 조금 더 솟고 자두나무 가지가 조금 더 처진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늙었다 그젠 삼십 년 입은 바지를 버렸다 옷을 버리는 일은 슬프다 버리고 버림받는 일은 유정(有情)한 일이다 다시 일요일이라서 슬프다 하루하루를 버린다 어제보다 우주가 조금 더 옮겨 앉았다
—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
* 장옥관 시인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계명대 국문과 및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졸업 1987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등. 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2004년 김달진문학상, 2007년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2023년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 퇴임
**************************************************************************** 이 시는 ‘일요일, 초나흘, 삼십 년, 어제, 하루’처럼 익숙한 시간의 명명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달력의 시간은 천체의 운행 주기에 따라 지구상의 계절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1년은 태양이 황도를 따라 운행하다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므로, ‘삼십 년’은 태양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삼십 번 한 만큼의 시간이다. ‘하루’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면서 한 바퀴 자전하는 시간이고, ‘한 달’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초나흘’은 달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해서 나흘째 되는 날이고, ‘일요일’은 태양•달•화성•수성•목성 • 금성•토성의 일곱 개 행성을 따라 만든 일곱 개의 요일 중 하나이다. 시는 이처럼 구획된 시간의 단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획된 시간 단위들을 몸으로 체화하고 재생산해낸다. “다시 일요일이다/ 태양은 여느 태양과 다르지 않다”는 전통적인 시간의 측량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부정하는 이중적인 발언이다. ‘다시 일요일’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시간의 구획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태양은 여느 태양과 다르지 않다’는 이러한 구획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양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고 그에 따른 변화 또한 구체적으로 측량할 수 없음을 뜻한다. ‘초나흘 달’ 역시 ‘눈 아래 찢어진 흉터’와 비슷한 모양으로서 ‘그제 밤보다는 조금 더 벌어진 상처’처럼 보이지만, 정확하게 변화를 측정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시간은 ‘어제’와 ‘오늘’로 명확하게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달의 모양이 천천히 변하고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가 조금씩 변하는 것처럼 변화의 양태를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시간의 양상이다. 계량적으로 측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파밭의 파가 조금 더 솟고 자두나무 가지가 조금 더 처지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이 ‘어제보다 조금 더 늙었음’을 안다. 그것은 측량되는 시간의 계산법이 아닌 ‘감은 눈’을 통해(오히려, 눈을 감은 덕분에) 아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반복되는 요일이 아니라 눈을 감고도 몸으로 느껴지는 ‘나’와 주변 것들의 미세한 변화이다. 시에서 ‘나’는 그제 ‘삼십 년 입은 바지’를 버렸다. ‘옷을 버리는 일’은 그동안의 세월과 있었던 일을 버리는 것이므로 슬프다. 그러나 이 슬픔은 미련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인간의 유정(有情)함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간의 정서적 반응을 대변하는 말이 곧 ‘슬픔’인 것이다. ‘슬픔’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달력의 시간은 체화되어 재해석된 우주의 시간으로 확장되어 간다. 버리고 버림받는 일 즉, 이별을 경험하며 체화된 시간은 시인으로 하여금 전 우주의 변화와 흐름을 몸으로 감지하게 하는 것이다.
— 문혜원 (문학평론가) / 계간 《시인시대》 2024년 가을호, [시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