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山 정원규님의『법화경 강설(불광출판사), 초판 1쇄』, 이건 아니다(11)
“然 世尊先知我等 心着弊欲 樂於小法 便見縱捨
不爲分別 <汝等當有 如來知見寶藏之分>
世尊以方便力 說如來知慧 我等從佛 得涅槃一日之價 以爲大得
於此大乘 無有志求
我等 又因如來知慧 爲諸菩薩 開示演說 而自於此 無有志願
所以者何 佛知我等 心樂小法 以方便力 隨我等說
而我等不知眞是佛子
(信解品 第 四)
●이 경문에 대한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미 저희가 마음으로 세간의 거친 욕망에 집착하고 작은 법을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
곧 보고도 내버려두시면서, 저희에게도 마땅히 여래의 지견이라는
보물창고의 몫이 있다고 분별하여 설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는 방편의 힘으로 여래의 지혜를 설하셨지만, 저희는 부처님으로부터 열반이라는
하루분의 노임을 얻은 것을 크게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이 대승법문에 대하여 구하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또 여래의 지혜로 모든 보살을 위해 법문을 설하실 때에도 스스로
대승법문을 원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께서는 저희의 마음이 소승법을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 방편력으로 저희의 근성을 따라 설하셨으므로 저희는 정말로 불자인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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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경문:
世尊以方便力 說如來知慧 我等從佛 得涅槃一日之價 以爲大得
於此大乘 無有志求
我等 又因如來知慧 爲諸菩薩 開示演說 而自於此 無有志願
세존께서는 우리들(사리불들)에게 여래지혜를 깨닫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셨다. 부처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래지혜에 대해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사리불들의 그런 무관심을 크게 두 가지로 뭉뚱거려 설명하는 그림이
바로 위의 <문제의 경문>이다.
세존께서는 사리불 등 제자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쳐 보살이 되게 하고자
첫째, 방편을 수단으로 여래지혜를 설법하셨다(간접적인 방법).
그러나 그들은 여래지혜에 대해 1 도 관심이 없었다(無有志求).
방편 그 자체가 최상의 지혜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번에는 여래지혜를 바탕으로 개시연설하셨다(직접적인 방법).
그러나 이 개시연설에 대해서도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無有志願).
말하자면, 사리불들로 하여금 여래지혜를 깨닫게 하려고(다시 말해 보살이 되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방편을 사용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래지혜를 바탕으로
설법하셨다. 그러나 사리불들은 그 어느 설법에도 관심이 없었다, 는 게
위 <문제의 경문>이라 이름 붙여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경문의 진짜 내용이다.
그런데 두 번째 경문, <我等 又因如來知慧 爲諸菩薩 開示演說 而自於此 無有志願>을
覺山 정원규님은 어떻게 번역했는지, 또 시중의 번역서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보자.
먼저, 覺山 정원규님은 부처님께서 <보살들을 위해(爲諸菩薩)> 개시연설하셨지만
사리불들은 관심이 없었다고 번역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들(사리불들)을 위해 개시연설하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보살들만을 위해 개시연설(但敎化菩薩)하셨다고 번역했으니 말이다.
다음, 시중의 모든 번역서는 <보살들을 위해(爲諸菩薩)> (부처님이 아니라)사리불들이
여래지혜를 개시연설했다. 그러나 사리불들은 보살들을 위해 개시연설만 했을 뿐,
그들이 설한 여래지혜에 대한 관심 따위는 없었다고 번역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자기들은
1 의 관심도 없는 여래지혜를 보살들을 위해서는 설했다고 번역했으니 말이다.
삼류 코미디 대본을 연상시키는 이 부분의 번역은 게송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다시 한 번 보기로 한다.
두 번역은 한결같이 <爲諸菩薩>을 <모름지기 보살이 된다>가 아니라, <모든 보살들을
위해>라고 오역하여 불자들을 헤매게 하는데 입을 맞추고 있는가 하면,
시중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아마 전부일 것이다)은 개시연설한 주체가 (부처님이 아니라)
사리불들이라 번역하여 그들의 무개념, 무성의, 그리고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법화경을 바로 펼쳐보시라.
상기 두 번째 경문은
<世尊(A) 又因如來知慧 爲諸菩薩 開示演說 而我等(B) 自於此 無有志願>을 약간
변형시킨 문장이다. 즉 (A)를 생략하고 (B)를 맨 앞으로 가져왔다.
(A), 즉 <世尊>을 생략한 이유는 바로 앞 문장에 한번 등장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因如來知慧>는 <여래지혜를 바탕으로>라는 의미다. 그리고 <爲諸菩薩>은
여기서 <모름지기 보살이 된다>는 의미다.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라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문제의 경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리불들이 여래지혜를 깨달아 보살이 되게 하고자 부처님께서는
첫째 방편을 사용하여 가르침을 펼쳤으나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無有志求).
둘째 (방편을 사용하지 않고) 여래지혜를 직접 설했으나 역시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無有志願).
(<爲諸菩薩>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마르고 닳도록 설명한 바 있다. 참고하시라.)
●이 경문에 대한 나성거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저희들이 부질없는 탐욕에 집착하여
소법(小法)에 만족하고 있음을 이전부터 알고 계셨던 터라,
<여래의 지견에 담긴 귀중한 보물 가운데 그대들의 몫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시지 않고, 저희들을 가만히
버려둔 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세존께서 방편의 힘을 빌어 여래지혜를 설하셨을 때,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펼치시는 방편을 통해 하루치 품삯 정도에 불과한
열반을 깨치고는 이미 더없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겼으니
이 대승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세존께서 저희들에게 무릇 보살이 되라고 하시며
여래지혜를 직접 펼쳐 자세히 설법하셨을 때에도
저희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관심이 없었는가.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이 소법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을 아시고
각자가 지닌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방편을 펼쳐 설하셨지만,
저희들은 참되고 올바른 불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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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